Sunday, December 11, 2011

Living in Christ's Church (1)

1. 하나님을 예배하는 총회

예수님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셨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습니다( 5:25). 그리스도의 사역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그분께서 오셔서 세우신 교회를 생각해야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의 종교기관이나 제도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과의 사귐으로 이루어진 살아있는 언약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주님과 아주 긴밀히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에서 교회에 관해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는 주님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시내산에서의 총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16:18)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제자들에게 아주 익숙한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하면서 사용한 헬라어 단어는 “에클레시아”(εκκλησια) 입니다. 이 말은 “총회”(assembly)를 의미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총회” (the congregation of the LORD, the assembly of the LORD"라고 불렸습니다( 23:3). 이 단어의 의미는 “하나님 앞에 함께 나아와 선 하나님의 백성”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거대한 총회는 매우 독특한 광경으로서, 그것은 시내산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온 역사적인 모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구출하셨는데, 이것은 그들을 단순히 노예로부터 자유하게 하셨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섬기도록 하기 위해 그들을 불러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다. (7:16)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그분의 백성이 된다는 뜻이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시내 광야로 불러내셔서 지키게 하신 거룩한 절기와 관계되어 있으며, 그것은 곧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5:1).

시내산에 모인 이스라엘의 총회는 광야에서의 시민대회(Town meeting)가 아니었으며, 족장들이 백성을 조직화할 시기라고 결정했기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 앞에 서도록 모으신 분은 영광의 구름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셨습니다(4:10).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불 가운데 강림하시고, 산이 진동하고, 총회를 소집하는 나팔 소리가 울렸으며,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 떨며 산 아래에 서 있었습니다. 이것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신 사건의 절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다”(19:4)고 말씀하셨고, 이 사건 이후에 이 날을 “총회의 날”로 언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9:10, 10:4, 18:16). 후에 모세는 죽기 전에 이스라엘을 축복하면서 시내산에서의 이 광경을 우주적인 광경으로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33:2). 여호와 앞에 선 것은 이스라엘 총회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의 천사들이 만군의 주와 함께 있었으며,(68:17) 시내산은 천지의 하나님의 성소가 되었고, 그분 주위에는 하늘의 거룩한 무리인 천시들이 둘러섰으며, 그 발아래에는 땅의 거룩한 무리인 성도들이 서 있었습니다. (33:3)

약속의 땅에서의 총회

그렇지만 시내산에서의 그 놀라운 광경이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관계를 다 나타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내산은 영광스럽기는 했으나 하나님의 영광이 최종적으로 머무르게 될 곳도 아니었고,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가장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곳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시내산으로부터 이끌어내어 그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위해 거기서 한 장소를 택하실 것을 말씀하시고, 그곳에 “하나님의 집”성전이 세워지고, 그분께서 백성 가운데서 거하실 곳이  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 광야에서 행진중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의 임재를 나타낼 수 있는 이동식 성소인 회막(tabernacle)을 모세로 하여금 만들게 하셨으며,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는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심을 고정된 성전을 짓게 하심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시내산에서의 총회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언약을 맺으신 모임 이었습니다. (19:16-25, 24:1-8) 후에도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총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모세는 광야 생활 마지막에 다시 백성들을 소집했고, 그들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기 전, 하나님은 그들과의 언약 을 갱신하셨는데, 신명기는 이 갱신한 언약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는 여호수아에 의해 총회가 소집되어 언약을 맺었는데, 여호수아서 23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언약이 갱신되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 언약 갱신을 위한 비슷한 성격의 총회들이 여러 번 소집되었는데, 대개는 그 백성들이 하나님을 오랫동안 배반한 후에 갱신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후,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인도하에, 귀환한 프로민들의 총회가 모였으며, 이 총회는 후에 회당모임의 전례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모임에서는 늘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거나 읽혀졌으며, 하나님의 언약에는 한 주제, 곧 하나님의 독특한 계시가 선포 되었습니다.

언약 갱신을 위한 모임 외에 또 이스라엘의 절기에 모이는 총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 년에 세 번 제물을 가지고 시온산의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나아가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절기들로는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이 있습니다 (레위기23).

여호와 앞에 나아가는 이런 총회들은 이스라엘의 생활과 예배의 부수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시내산 총회에서 이스라엘은 한 국가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됩니다. 그 이전까지 야곱의 자손들은 함께 따라 나온 이민족과 뒤섞여 있는 구출된 노예들의 오합지졸에 불과했으나, 시내산에서 그들은 모두 여호와의 총회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언약 갱신을 위해 모인 훨씬 후의 총회들은 이스라엘이 부르심을 받은 것을, “여호와 앞에 선 하나님의 백성”, “하늘의 거룩한 무리의 주되신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지상의 성도들” 등으로 극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절기에서도 똑같은 가르침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궁정에 들어가 여호와 앞에 서서, 함께 그 이름을 찬양하리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구원을 바라볼 때, 그들 역시 총회,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서 베풀어지는 큰 잔치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의 회집을 보았습니다. 이 잔치에는 만방이 함께 참예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2:2-4, 56:6-8).

우리의 총회 , 곧 하늘의 시온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시내산의 장면을 상기시키면서(12:18-29), 우리는 불과 흑암과 폭풍우와 나팔 소리가 있는 시내산에 가본 일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광야 유랑생활의 최종 목적지인 시온산에는 우리가 가봤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시온산은 헤롯 성전이 서 있었던 이 땅에 있는 도시가 아니다. 그렇다 우리가 가려는 곳은 위에 있는 시온, 곧 하늘의 하나님의 총회이다. 그곳에는 모든 거룩한 무리, 곧 만만의 성도와 천사들이 있다. 시내산과 시온이 보여준 모형은 하늘 총회의 실체로 성취되었다.

그러면 그 차이점을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예수께서 하늘의 시온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 간다.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이 그랬던 것처럼 이 땅의 제단 위에 피를 뿌리는 것과 같은 일은 이제 하지 않는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보좌에 자신의 피를 뿌렸기 때문에 이제 황소와 염소의 피는 의미가 없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뤄진 완전한 속죄의 터 위에서, 우리를 위해 하늘에 들어가셨다. 우리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우리를 대신해서 말해 주는 예수님과 또 그분의 뿌린 피로 나아간다. 아벨이 그의 형의 손에 죽임 당했을 때 그의 피가 복수를 위해, 처벌을 위해 땅에서부터 부르짖었다. 그러나 우리 죄를 위해 쏟으신 예수님의 보혈은 복수가 아니라 용서를 위해 부르짖는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께서는 참된 하늘 성소(9:11, 24)에서 일하신다. 하늘 성전의 예배에서는 천사와 성도들이 함께 찬양한다( 12:22-23). 이 예배야말로 영광스런 최후의 큰 잔치, 곧 하나님의 거룩한 무리의 즐거운 성회이다. 이 성스러운 예식은 의인들의 영들이 거룩한 천사들과 완전히 연합하여 주(Lord)를 찬양할 때에 이미 시작되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장차 그 즐거운 총회에 참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지금”, 곧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영(spirit)으로 천상의 시온에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고 가르친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우리의 찬송은 천사들의 노래와 믿음의 선진들( 11장 참조)의 찬송과 한데 어우러진다.

교회를 총회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가 여기 땅 위의 총회들에서 함께 모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 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성도들과 천사들과 함께 모이는 엄청난 특권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의 제사장 되신 예수께서 그곳에 계시므로 우리는 거기로 나아간다. 그 보좌에 예수님의 피가 뿌려졌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죄에서 깨끗해져서 하나님의 거룩한 무리의 총회에 나아갈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도들을 잔치에로 부르셔서 찬송하게 하신다. 유월절은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어린 양이 되심으로 완성 되었다. 오순절은 성령께서 다락방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임하셨을 때 성취되었다. 이는 오순절에 추수의 첫 열매를 거두어들이기 때문이다. 맨 마지막 대잔치는 추수를 완전히 끝내고 축하하는 절기인 장막절이다. 이 절기는 하늘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우리도 지금 그 절기에 참여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들이 함께 모이고 있는 모임(총회)을 폐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10:25). 하늘에서 늘 모이는 것처럼 우리는 땅에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생각해 보라. 우리가 함께 모이는 모임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임이 아니다. 교회란 하나님 백성의 총회로서 모일 때 우리는 주 앞에 서는 것이다. 우리만 단순히 예배하러 한 자리에 모인 것 같지만 우리는 천사들과 모든 성도들과 함께 모이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도, 다윗과 엘리야와 이사야와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도 함께 모이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 주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모이는 것이다.

예배하는 교회

교회는 땅위에 이미 모인 하늘의 총회이기 때문에, 예배는 교회가 감당해야 하는 첫 번째 의무이다. 바울은 교회를 “각처에서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로 묘사했다(고전 1:2). 베드로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쓰고 있다(벧전 2:9).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시내산에 모으시고,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절기들을 지키도록 소집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들을 부르셔서 하늘에서 열리는 그분의 기쁜 성회에 들어가게 하신다. 시온의 성전에 들어갈 때 우리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를 부른다. 예배 시에 우리는 믿음의 귀로 천사들이 “아멘송”으로 화답하는 소리를 듣는다. 형제들 중에서 아버지를 찬양할 때는 예수께서 친히 하늘 성가대의 대장이 되신다 (히브리서2:12).

소요리문답 제1문항에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기는 것이다.”라고 되어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골로새서3:17)해야 하는 한편, 우리의 가장 귀한 특권과 즐거움은 예수님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높이는 일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예배드리는 총회가 되어야 한다. 함께 모여 하나님께 절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은 강해지고, 사랑이 새로워지며, 마음이 신선해진다. 또한 하나님을 경배함으로 말미암아 만방에 증거를 하게 되기도 한다.

시편과 선지서 들은 시온산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반역에서 돌이켜 주의 백성과 함께 세상의 유일한 구주를 찬양하도록 열방들을 부르셨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부를지어다”( 100:1).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 96:3).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만민을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의 예배의 한 부분이다. 선지서는 열방들이 주를 경배하러 끊임없이 나아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 하나님의 집은 만민을 위해 기도하는 집이 될 것이다(2:2-4, 56:6-8, 66:18-21). “크신 하나님”이라는 찬송은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전하는 찬송이 된다. 교회란 순수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임이라는 것을 한 공동체가 깨닫게 될 때, 그들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고전14:25, 45:14) 라는 말을 듣기에 합당한 자들이 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예배를 드림에서 힘을 얻고, 다른 사람들도 와서 우리와 함께 찬양하게 된다. 예배의 영광과 교회의 영광은 우리가 무엇을 얻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데 있다. 놀랍게 여겨질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신다. 우리가 아무리 무가치하고, 원수된 자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우리가 더듬거리며 드리는 찬양을 기뻐하신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부족한 찬양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을 기꺼이 받으신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신다.

로마서 12 1,2 절을 읽을 때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이란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바울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헌신의 생활, 즉 ‘우리 몸을 산제사 (living sacrifices)로 드리라’는 말씀을 생각할 것이다. 이 말을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런 큰 헌신을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전연 다른 관점에서 그 말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그분의 어전에 부르셔서 예배드리도록 허락하셨다는 사실은 바울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전에는 어떤 이방인도 예루살렘 성전에 나와서 제사를 드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 우리는 황소나 염소를 드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드려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며 우리 입술로 찬양(13:15)을 하나님께 드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총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그분에게 경배드림은 하늘을 맛보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장차 우리가 거하게 될 곳은 성령 안(in the Spirit)일 것이다. 하늘에서 우리의 가장 큰 기쁨이 될, 하나님께 찬양 드리는 일은 땅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하늘의 총회는 정해진 날에 교회에서 몇몇 찬송을 선택해서 부를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보좌 앞에 설 수 있고 성도들과 천사들의 무리와 함께 할 수 있는 자들의 총대 명부가 있다. 제자들이 전도의 사명을 다 마치고 예수께 돌아왔을 때,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는 동안 그들에게 임했던, 귀신들을 이기는 권세로 인해 무척 흥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때에 주님께서는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누가복음10:20)고 말씀하셨다.

총회의 명부

민수기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명부는 성경에서 장애물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영감(inspire)된 하나님의 말씀이 왜 마치 전화번호부 같은가? ‘하나님의 총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기록된 특권을 보여 준다’는 것이 그것에 대한 대답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용사와, 제사장과, 또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을 이스라엘 가족의 명부를 기록하라고 명하셨다. 그 반면 신명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의 총회에 암몬 족속과 모압 족속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는 것을 본다( 23:1-3). 이러한 사실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대적했던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총회의 명부는 땅에 보관되었다. 그런데 모세는 또 하나의 책, 곧 하나님께서 보관하시는 명부를 이야기한다(32:32-33).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말하기를,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4:3). 하나님의 총회에 이방인들이 들어오리라는 빛나는 예언들은 신약의 교회에서 성취되었다. 시편 87편은 이방인뿐만 아니라 원수의 나라들도 시온 백성의 두루마리에 기록될 날을 예언하고 있다. 예배에 참여하기 위해 모이는 것은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제는 땅에서가 아니라 하늘서 예배 중에 있는 우리에게 여전히 말씀하시고 계시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12:25). 지금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은 과거 갈릴리 땅에서 말씀하신 그 주님이다.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조상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1:1-2). 예수님의 말씀은 그것을 직접들은 자들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졌다(2:3-4).

이 말씀을 우리는 가볍게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예배를 위해 모인 우리에게 선포되는 말씀은 바로 주의 이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예배시에 믿음으로 하늘에 들어가 주님 앞에 설 뿐만 아니라, 주께서도 예배드리는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예수께서는 두 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들 중에 항상 계실 것을 약속하셨다(18:20). 교회가 주님 앞에 모이면,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을 들려주신다. 예수님께서는 회중 기운데서 성부를 찬송하신다(2:12).

이 모든 것은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실현되어지는데, 이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찾아오시고, 우리는 그분에게 나아가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성부와 성자에게 연합시킨다. 교회는 예배의 기쁨 가운데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나타내는 총회이다. 성령께서는 오순절 날에 하나님의 백성의 새 총회에 강림하셨다. 신약의 교회는 거룩한 영적 성령의 총회로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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