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9, 2011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경


말씀의 독특한 쓰임새

시편 119:1-16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지가 복이 있도다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미옵소서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밀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입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교회의 본질이 나타나야 함

개혁교회가 교회의 표징으로 성경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세 가지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과 둘째 선포된 말씀에 반응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교회의 member로 세우는 세례와 말씀을 보이는 현상으로 상징을 통해서 공급하는 성찬과 세째 교회의 순결과 사랑을 드러내는 권징을 진실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성립되는 요체는 교회의 주인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정상적으로 세워질 수 있는 조건들을 구체적으로 갗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한 보이는 교회의 요소만 있으면 교회로 성립 되는 것이 아나라 본질의 교회, 보편의 교회(Church Catholic)의 참된 교회의 속성이 거기에서 드러날 때 비로서 정상적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 본질의 참된 속성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만 갗추어 주시는 거룩한 조건들인 것입니다. 결국 보이는 교회의 sign들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교회의 참자태와 본질이 나타나는 형태를 참으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장을 보면 “지상에서 가장 순수한 교회라 할지라도 거기에 불순한 요소가 섞이기도 하고 또 잘못도 저지를 수 있다. 어떤 교회는 도저히 그리스도의 교회라 부를 수 없고 오히려 사탄의 회라고 불릴 정도로 타락하기도 한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9 절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 교회가 모든 형식을 구비하고도 사탄의 회가 되기도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말씀이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은 경우

성경은 예술적인 요소, 역사적인 자료, 종교학적인 근거, 도덕적인 것이나 사상적인 것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로서의 성경 본래의 의미로서 사용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는 상실하는 것이다.

성경이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되려면, 성신님이 그 말씀과 함께(cum verbo) 역사해야 한다. 그리고 성신님의 역사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한마디로 죽음이라는 상태에서 생명으로 태어나는 현저한 역사이며, 그 새로 태어난 새로운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을 수 있도록 조명해 주시며 가르쳐 주시는 역사이다.

성경이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고도 얼마든지 기독교라는 종교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이런 현사은 배교라는 위험한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첫째 결과, 새로운 생명

성경이 은혜의 방도로 시용되었을 경우에 첫째의 큰 결과는 그것이 사역된 사람에게 반드시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의 상태로 옮겨 놓았다는 현저한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와 허물로 하나님 앞에 죽어 있는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가 그에게 효과있게 사역한 사람, 즉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정한 사람들은 때가 이르러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불러내시는데, 그의 속에 성경이 경전의 말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사역하여 성신님이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므로 첫째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상태에서 새로운 생명의 자리에다 갖다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은 결국 영원한 생명,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2) 하는 말씀대로, 참으로 그에게 성경의 말씀이 들어가서 은혜의 방도로 사용될 때 첫째의 결과는 생명이라는 것을 참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복음적 사실이 먼저 들어가야만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지 간단한 몇 마디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복음 사실 자체가 어떤 마술적인 효과가 있어서 곧 생명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자체는 살리시는 그 분이 주시는 것으로서 사람이 어떻게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신님으로 그에게 생명을 주시는 동시에 일반적으로는 그의 정신이 각성되어서 복음 사실을 바로 인식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음 사실에 대한 정당한 각성은 예수님을 위대한 인격으로 믿는다든지 세상의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다는 정도로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이 아닌 것이며, 이 문으로 들어 가지 않으면 절도요 강도가 되는 것이다. (요한 복음 10)

죄책과 죄의 권세에서 벗겨 주심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첫째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다시 살아 나셨다는 복음 사실을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로, 무한한 사랑을 가지신 분으로, 무한한 능력과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 믿는다 할지라도 이 복음 사실을 바르게 믿지 않으면 구원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첫째는 나는 죄인이다라는 전제와 이 죄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영원한 형벌에 해당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 죄책을 다 담당하실뿐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하신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속죄의 사실은 죄의 무서은 권세에서도 나를 건져 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죄를 지은 자는 죄의 노예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사람으로서는 그 무서운 세력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즉 탐욕이나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남을 미워하는 마음, 늘 자기를 인정하는 마음, 이런 끊을 수 없는 죄의 세력으로부터도 우리를 건져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므로 내 죄의 값, 죄책만을 면제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무서운 주권, 나를 지배히는 지배력 (dominion), 권세에서도 벗겨 주신 사실을 믿어야 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런가 하고 그냥 바라보는게 아니라 믿어야 효과가 나는 것입니다. 물론 속죄한 것도 믿어야 효과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할 때 십자가 즉 속죄는 전하면서 죄의 무서운 권세에서 나를 벗겨 주신 사실이 거의 은폐되고 있는 것이 불행한 현실입니다. 자기를 노예 시장에서 사내어 자유를 주셨다는 위대한 사실이 충분히 가르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구원의 신앙을 형성하기에는 불완전한 요소로 작용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의 신앙에서 지적인 요소가 불완전하면 증거자로서도 불완전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교회라는 것을 바로 증거하지 못하면 과연 교회인가 아닌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야기할 때에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지체 하나 하나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교회가 살아 있다면 지체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지체는 다 죽었는데 교회만 살아 있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신앙의 지적 요소가 그에게 족하게 있어야 비로소 증거자로서 자기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증거자로서 자기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서 사랑의 띠로 매어지고 거룩한 교회의 형식을 갖추는 데서 비로소 교회로서의 내실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결과, 성화
말씀이 들어가서 첫째로 이렇게 그가 죽음에서 나와서 생명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증명히는 이 사실이 바로, 성경 말씀이 그냥 경전의 말씀으로 종교를 형성한 것인지 그렇지 아니하면 참된 교회를 형성하여 생명을 증명하는지를 갈라놓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 속에 들어가되 말씀과 함께하시는 성신님의 역사가 그에게 명백하게 있을 때에는 생명이라는 사실이 먼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문제로서 늘 기억해야 할 것은 말씀이 나에게 은혜의 방도로 역사한다면 성화의 역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Sanctification의 역사라고 합니다. 불완전에서 완전을 향하여 더욱 이끌고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이 성화의 첫째 아이디어는 물론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것을 깨끗하게 하시는 사실입니다. 즉 죄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하신 그 거룩한 성신님의 역사를 현실상 적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죄를 씻는다고 할 때는 죄책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죄가 나를 지배하는 상태에서 나를 자꾸 벗겨 주시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죄가 나를 지배한 상태를 통틀어서 대표적인 말로 하면 나라는 것, “아상이 지배할 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이상적인 주장이 나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나, 아상이 나에게서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상태라면 그것을 씻어내야 합니다.

성신님의 성화의 역사는 점진적이어서 신자의 일생 동안 끊임이 없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희미한 상태에서 점점 새롭고 능력있는 상태로 올라가는 것이고 따라서 예수를 믿는 시간이 오래되면 될수록 성화의 사실은 그에게서 현저하게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달리 표현한다면 신자가 병이 없이 정상적으로 장성해야 한다는 의미로 말할 수가 있습니다. 병이 없이 정상적으로 장성해 가는 사실이 신자에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은혜의 방도가 그에게 역사한 증거이고 보람입니다. 이런 것 없이 자꾸 종교를 형성하거나 혹은 몇 가지 윤리적인 인간상을 형성해 나가는 것 가지고는 절대로 말씀이 은혜의 방도로서 정상적인 역사를 한 것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은혜의 방도로서의 정상적인 역사가 없다면 그것은 교회에서 공급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자태가 아닙니다. 교회에 가면 어디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방도로보다도 과학적인 사실로, 역사의 사실로, 어떤 사상적인 내용을 진술하는 종교 철학으로 전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한 은혜의 방도로서 사역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의 독특한 쓰임

말씀이 은혜의 방도로 사람의 속에서 역사할 때의 독특한 상태를 성경에서는 몇 가지의 중요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첫째는 복음이라고 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 사람에게요 또한 헬라 사람에게로다” ( 1 :16). 은혜의 방도로서 역사하는 사실의 별다른 표현을 또 하나 인용하면 베드로후서 1:5-9 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이것은 성화의 한 자태일 것입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가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만일)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하게 하심을 잊었느니라장성하는데 갖춰야 할 것들은 이런 것들인데, 믿음에는 덕이 있어야 하겠고, 덕에는 지식이 있어야겠다, 지식이 있은 디음에는 절제가 있고, 절제에다 인내를 붙이고, 인내에다가는 경건을 붙여야 하고, 경건에다가는 형제 우애를 붙여야 하고, 거기다 사랑을 또한 공급해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이처럼 차츰차츰 필요한 것들을 그에게 공급해서 장성하게 해 줍니다. 첫째는 구원하시는 복음, 새로운 생명과 속죄를 내게주시는 바 복음의 내용이 기본적으로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 다음에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가치를 바르게 판단하는데 이르도록 필요한 분석과 분해를 하게도 해 줍니다. 즉 정체를 바로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먼저는 사실의 판단을 정확하게 해야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표준하에서 정당한 가치 판단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초적으로 중요한 그런 분해와 분석, 모든 것을 잘 드러내어서 정체를 파악하게 하는 작용을 또한 성경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양쪽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양쪽에 날이 서 있는 칼과 같이 어느 쪽으로 쳐도 참 무섭게 작용합니다. 가령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 전달되면 그 사람에게 말씀이 기대하는 거룩한 적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기도 하고, 그 사람이 그 말씀으로 인해 쇠해 버리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효과를 나타내지 아니할 때 말씀은 그냥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냐 하면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경우든지 능력이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 말씀을 또 한 군데 보겠습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첫째 망하는)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쫓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구원 얻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허리요” (고후 2: 15-16). 어떤 한 사람이 하나님 말씀으로 구원받을 사람인가 망할 사람인가 우리는 모르지만, 말씀이 전해지면 망할 사람과 구원받을 사람이 분명해진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이르러서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로 나타나지만 망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말씀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정죄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멸망으로, 사망에서 사망으로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전도한 말을 안 듣는 그것이 죄하고 상관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실은 그것 자체가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까닭에 더욱 복음의 내용은 정당하게 공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공급된 이상 받고 안 받는 문제는 명확히 갈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으면 구원을 받지만, 받지 않았을 때는 그것 때문에 무서운 멸망과 흑암이라는 것이 그에게 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많이 준 자에게 많이 달라고 하고, 또 알고서 잘못을 할 것 같으면 모르고 잘못을 한 사람보다 더 맞는다는 큰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들어갔든지 그 사람에게 들어갔으면 안 들어간 사람과는 달리 그가 말씀에 대해서 바로 대접하는가 푸대접하는가에 따라 큰 은혜를 누리든지 문책을 받든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은 예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보통의 경우 말씀을 듣고서 구원 이외의 것에 더 관심을 두는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이 생활에서 도덕적인 교훈으로만 그 사람에게 작용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어떤 도덕적인 교훈으로 이것 하지 말아라, 저것 하지 말아라 하고 지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도덕적인 교훈으로 작용하는 일은 안 믿는 사람에게도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에게는 말씀이 그렇게 단순히 도덕적인 교훈으로만, 혹은 지켜야 할 율법의 조항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합니다. 마치 율법의 말씀 곧 하라, 하지 말라 히는 명령이 그냥 실정법적인 효과만을 내고 마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산다고 하면서 특정한 법적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만이 그대로 곧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인 줄로 아는 것은 큰 오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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