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December 13, 2011

Gospel and Kingdom 6

6장 에덴에 계시된 하나님의 나라

창조 이야기는 성경에 나오는 일종의 “옛날 이야기”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토대를 처음부터 확립해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 (sovereignty)을 말할 때, 우리는 그분의 왕권, 즉 절대적이고 양보될 수 없는 왕권을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피조물은 그 분의 다스림을 받으며,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의 완전한 다스림의 영역 안에 속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의 능력으로 만물을 창조하심으로써, 자신이 창조주로서 만물을 다스릴 권리를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피조물이 완전하게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다스림이라는 틀 안에 있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주되심은, 모든 실재 (reality)는 하나님께 속한 실재이며, 모든 진리는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우리에게 말해 주고 있읍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면 우리는 세상을 영적인 것과 세속적인 것으로 분리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실재가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지닌 말씀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와 오류에 대한 인간의 사상들을 심판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반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기독교 교리는 창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무엇이 옳은지를 판단하려는 피조물인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하나님의 말씀간의 관계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읍니다. 그것은 마치 손전동과 태양의 관계와 같은 것이므로, 사람이 자기 주머니에서 손전등을 꺼내 켜서 태양을 비추어 보며 그 태양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보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진실성은 인간의 자기 중심적인 이성의 하잘것 없는 빛에 의해서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존재를 창조했으므로 이 말씀이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해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

“우리의 형상”(창세기 1:26)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인간에게 모든 피조계를 다스리는 권위를 주셨읍니다(창세기 1:26 이하).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인간의 이러한 지배권, 즉 창조물을 다스리는 기능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봅니다. 한편, 다른 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인간은 남자와 여자 둘다임을 지적합니다. 그러므로, 그 “형상”은 남자와 여자의 관계성안에서 보일 수 있으며, 특별히 그것은 남편과 아내의 연합 안에서 가장 완전하게 표현되는 것이며 , 또한 남성과 여성이라는 그들의 성적 양면성(Sexual Polarity) (창세기 2:24) 기초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 단계에서는 인간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분명하게 정의하지 않고 있으나,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참 형상이라고 지적해 줄 것입니다. 이 단계에서 주목해야 할 기본적인 요점들은, (1) 피조물의 정상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인간의 독특성과 (2)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는 전적으로 창조주께 의존해야만 하는 인간의 피조성입니다.

에덴 동산-하나님의 나라

창조 사실이 우리에게 왕에 대해 말해 주듯이, 에덴은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앞의 제5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신약의 용어임)가 전적으로 성경적인 개념이며, 이 개념이 성경 전체의 줄거리를 지배하고 있음을 살펴보았읍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패턴이 세워진 곳은 바로 에덴 동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범죄하지 않은 상태의 아담과 하와)과 낙원인 에덴 동산(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완전한 환경으로서 예비하신 처소)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표현되고 있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보게 됩니다. 절대주권을 가진 왕으로서 하나님께서는 자유의 범위를 정해 놓으십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창세기 2:16-17).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에 왕은 그의 백성들에 의해서 도전받아서는 안 됩니다. 창조주와 피조물,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사이의 완전한 관계는 만일 피조물이 그 분의 다스림을 거부함으로써 창조주의 역할을 탈취하려고 하면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세기 2:17).

에덴 동산에 대한 서술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이해하는데에 필수적인 틀을 제공해 주고 있읍니다.

·         하나님의 백성(아담과 하와)
·         하나님의 처소 안에서(에덴 동산)
·         하나님의 다스림하에서(하나님의 말씀)

우리는 앞으로 이 하나님 나라의 패턴이 하나님의 활동 목표로서 거듭거듭 나타나게 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 때에도 그러했듯이, 새 창조로 나아가는 구원의 모든 과정에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따라서, 반역한 아담에게 주어지지 아니한 그 생명나무가, 요한계시록 22장에 나타난 새 예루살렘에 대한 묘사 가운데와(창세기 3:22 이하와 요한계시록 22:2 을 비교해 보십시오), 요한계시록 2:7 에서 성도의 승리를 말하고 있는 요한의 예언, 즉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리라”는 말씀 속에서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은 우연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

창조에 대해 그러하듯이, 타락에 대해서도 그 의미와 효과를 과소평가해 버리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창조주되심이 충분히 인식된다면, 인간의 일방적인 독립 선언의 결과로서 생긴 타락은 매우 심각한 문제임이 드러날 것입니다. 그 뱀의 유혹은 다음과 같은 목표를 향해 움직여 나갔읍니다. 그래서, 뱀은 “하나님이 참으로 먹지 말라 하시더냐라고 질문함으로써 하나님의 권위의 말씀에 교묘하게 의문을 제시하는 것으로 시작하더니 마침내는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데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창세기 3:1-4).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배척하고 심지어 사고 속의 행동에 있어서까지도 자아 충족적이고 독립적임을 선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에게 진실되시면서, 동시에 피조물에게 왕권을 찬탈당함을 허용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은 불가피하고, 동시에 근본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말씀하셨고, 따라서 인간은 정녕 죽었읍니다. 비록 사망의 궁극적인 표시인 육체의 죽음은 즉시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것이 인간에게 사망이 임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이는 죽은 사람이란 곧 죄인, 즉 하나님의 나라를 거절한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이란 생명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그 동산 밖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하나님 나라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별할 필요가 있읍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대적한다고 할지라도, 사람이든 마귀든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주권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권능의 왕국) 그리고, 마침내 창조주에게 반역하는 모든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인되신다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란, 그 분의 피조물들이 기꺼이 그 공의로우신 다스림에 순복하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입니다 (은혜의 왕국). 따라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은 전()우주적인 것이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천국도 있고, 지옥도 있고, 빛의 왕국도 있고, 어두움의 세상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타락 안에 나타난 서로 상반되는 듯이 보이는 두 가지 요소, 즉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그 분의 믿을 수 없이 크나큰 은혜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심 판
첫째로, 심판은 하나님과 인간간의 관계가 깨어진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은 사람이 에덴 동산으로부터 축출된 데서 잘 나타납니다. 둘째로, 심판은 남자와 여자간의 관계가 깨어짐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남녀간의 완전한 조화는 경쟁과 상호 비판으로 바뀌었읍니다(창세기 3: 12, 16). 세째로, 심판은 인간과 자연 환경간의 깨어짐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피조물은 더이상 인간의 다스림하에 놓이지 않게 됩니다 (창세기 3: 17-19). 그러나, “깨어짐”이라는 이 용어를 사용한 것은 사형 선고의 심각성을 약화시키기 위함이 아닙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 바깥의 인간이란 단지 사형 선고를 받은 것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는 죽은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의 실제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와 갖는 그 즐거운 관계로부터 분리되는 것입니다. 자율적인 인간이란 하나님을 부인하며, 따라서 생명을 부인합니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그리고, 에덴 동산 밖에서는 회복이란 있을 수 없읍니다.

인간은 스스로 반역의 길을 택했고, 따라서 자신의 결정에 얽매이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아담의 후손에게도 역시 다른 어떤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읍니다. 따라서, 에덴의 하나님 나라로부터의 아담의 타락은 전인류의 타락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언약의 머리이므로) 모든 사람은 에덴 동산 밖에서 출생되며, 따라서 모든 사람은 생명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율과 독립을 주장하는 적극적인 반역자로서 태어납니다. 인간의 역사와 성경은, 인간의 죽은 상태란 곧 인간이 어김없이 하나님을 증오하려는 결정들만 내린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까닭은 인간의 “에덴 바깥”의 본질 때문임을 알려 주고 있읍니다. 선과 악을 선택할 자유라는 것은 이제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의 본질대로 행하는데 자유로울 뿐입니다. , 하나님을 증오하는 죄인으로서 자유롭게 행할 뿐입니다 (로마서 3:9-18, 8:6-8). 결국 인간은 죄의 노예, 즉 죽음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은혜
은혜란, 반역하는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도저히 자격이 없을 뿐더러 자격은커녕 오히려 주어진 것마저 빼앗겨야 마땅할 그들에게 자비로움을 베푸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태도는 이론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을 통하여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의 놀라운 이야기는 바로 심판과 은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이 죄를 짓자 공의로 하자면 당연히 인간을 말살해야만 했지만, 과연 그렇게 하시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보존되어 있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사실은 바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또한 그 뱀을 심판하는 데서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따라서 거짓말의 아비는 그의 궁극적인 보응을 받도록 운명지워졌읍니다. 창세기 3:15 은 오랫 동안 은혜의 말씀, 즉 최초의 복음(Proto evangel, 즉 복음에 대한 첫 언급)이라고 인정되어 오고 있읍니다. 이 말씀은 “여인의 후손”이 악을 타도하는 일을 실제적으로 감당할 것임을 약속한 것입니다. 그 뱀은 인간을 타락으로 이끌었으므로 질책을 받을 만합니다. 인간 또한 이끄는 대로 가꺼이 따라갔으므로 질책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은혜는 바로 이러한 질책을 받아야 마땅한 상황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또한, 은혜는 사회의 모습을 유지시키는 데에서도 나타납니다. 인간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완전히 지워진 것은 아니었읍니다. 따라서, 인간은 다른 모든 피조물에 대해 어느 정도나마 권위를 유지하고 있읍니다. 남자와 여자는 비록 그 관계가 부패되었지만, 계속해서 그 관계를 유지하여 자녀를 생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전우주도 인간과 더불어 타락하는데, 이는 우주가 계속 인간의 다스림에 도전해 가겠지만, 그래도 인간의 다스림하에 놓여 있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처럼 그 에덴 동산 밖의 모든 세계는 타락했읍니다. 그 까닭은 타락되지 않은 세계 안에서는 인간이 도저히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
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로마서 8:20).

인류의 두계열

창세기 4-11 장에는 매우 장구한 세월에 걸친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한 이야기가 담겨 있읍니다. 거기에 담긴 전체적인 메시지를 발견하기 위해서, 우리는 각 장의 강조점을 성경신학적인 방법에 맞추어 살펴보도록 하겠읍니다. 타락한 세상에 사는 타락한 인간에 대한 이 첫번째 역사는 신학적인 입장에서 서술된 역사의 한 실예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아들인 가인과 아벨을 머리로 삼고 있는 두 계열이 도식적으로 배열되어 나타납니다. 이 족보, 또는 계보표(Family Tree)는 성경에 수없이 많이 사용되고 있읍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들을 흥미 없는 것이라고, 또는 영적으로 별 상관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쉽사리 무시해 버려서는 안 됩니다.


도표 6 은 창세기 4-11 장에 나타난 족보의 구조를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기사는 인류의 타락이 미친 한 가지 결과, 즉 적대 관계와 살인을 묘사해 줍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 기사는 가인의 불경건한 후손들의 족보로 넘어갑니다. 그 후손들은 도시와 산업을 발전시켰으며, 라멕의 사악함에서 그 절정에 이른 것으로 특징지워집니다 (창세기 4: 17~24). 그리고, 다시 창세기 6장에서 인류의 불경건함이 강조되고, 그러자 하나님께서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자신의 의도를 선언하십니다(7). 이렇게 해서 결국 이 불경건한 계열은 홍수로 인하여 사라지게 됩니다.

반면에, 경건한 계열은 살해당한 형을 대신한 셋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창세기 4:25). 이 계열의 귀감이 되는 인물들은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과 하나님께 은혜를 얻은 노아입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의 가족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행위이며, 이로써 또하나의 새로운 시작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인류의 분열이 있게 되는데, 이것은 불경건한 자들의 주요 대표자인 함으로 인하여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셈은 경건한 자들의 조상이 되었읍니다 (창세기 11:1O~26). 이제 우리는 아담에서부터 노아까지 열 세대, 그리고 노아에서 아브람까지 열 세대의 경건한 자들의 계열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계열의 기사는 우연한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이 이야기는 한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목표가 어디인지를 찾기 위하여 아브람의 의미를 조사해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제 마침내 우리는 구원의 토대들이 놓이고 있는 중이라고 말해도 좋겠읍니다. 자신의 죄와 사악함으로 인하여 죽은(에베소서 2:1) 반역자 인간이 하나님의 약속과 은혜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노아를 구원하심과 경건한 계열이 연속되어 가는 데서 드러납니다. 이로써 이미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류와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는 증거가 나타난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구원의 자비로움의 모습으로 타락한 세상 속으로 들어오게 될 징조들이 보인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처소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특정지워지는 하나님 나라를 또다시 볼 수 있으리라고 감히 소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6장 질문

1. 하나님의 나라가 에덴에서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2. 에덴의 이야기와 그 직후의 이야기는 은혜의 의미에 관하여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읍니까?

3. 비울이 아담의 역사를 로마서 5 장과 고린도전서 15: 20-26 에서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결시키고 있읍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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