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December 14, 2011

Living in Christ's Church (2)

2. 하나님의 집인 교회

하늘에 거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하늘에 거하신다는 것은 그분의 초월성을 상징하는 말이다. ,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 세계보다 무한히 높이 계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몸을 입으신 예수님의 승천이 보여 주듯이, 하늘은 상징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영광의 시간과 공간이 지구라는 별의 물리적 위치와 어떻게 연관되어지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하늘이 한 장소, 곧 영광의 구주께서 계시고 천군 천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곳이라는 것은 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에 있음과 그 하늘에서 "그 눈이 인생을 통찰하시고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심"을 잘 알고 있었다(11:4). 그러나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높은 하늘에서 인생을 관찰하시는 것 이상의 일을 행하시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인간의 타락에 관한 창세기의 기사에서 우리는 날이 서늘할 때에 에덴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3:8). 에스겔 선지자는 에덴을 "하나님의 동산"이라고 부른다 (28:13; 31:8).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디든지, 언제든지 계신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피조물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는 공간적인 의미에서도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여호와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과 기쁘게 교제를 나누었다. 아담과 하와가 부끄러움으로 숨었다는 것은 여호와의 이러한 공간적 나타나심을 전제한 이야기이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1:16)
For by him were all things created, that are in heaven, and that are in earth, visible and invisible, whether [they be] thrones, or dominions, or principalities, or powers: all things were created by him, and for him:

땅 위에 계시는 하나님

우리의 최초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생명나무의 길은 그룹들이 지켰다(3:24). 그룹들의 존재는 에덴동산의 동쪽 문이 하나님의 거하심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에덴의 문에서 동쪽으로 추방된 살인자 가인은 하나님의 앞에서 쫓겨났다(4:16). 후에 우리는 그룹의 형상들이 성막에 거하시는 하나님과 관련해서 나타나는 것을 본다(25:18-22).

홍수로 심판하신 후에 하나님은 족장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셨던 곳에 하나님을 경배할 제단을 쌓았다. 꿈에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님이 거기 계신다는 실제성을 강조한다. (28:10-12). 하나님께서 야곱의 꿈에 돌계단으로 내려오셔서 도망하는 야곱에게 그분의 언약의 약속을 갱신하셨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라고 야곱은 말했다(28:16). 이런 이유로 야곱도 역시 그곳을 하늘의 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집”, 곧 “벧엘”이라고 불렀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워 떠는 야곱에게 여기가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이곳에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약속의 후손들과 함께 있을 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성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신 일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자신에게로 이끄시기 위해서 애굽에서 구출하셨다(19:4-6). 그 특별한 관계는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심으로써 성립되었다. 이스라엘의 거룩함, 곧 그들의 제사장적인 성격은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로 오셔서 거하시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성막이 상징하는 중요한 점이다.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거룩한 삶을 살도록 그분의 언약의 율법을 그들에게 내려주셨다. 또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함께 거하시겠다는 표시로서 성막을 세우게 하셨다.

출애굽기 한가운데에는 한 드라마가 전개된다(33, 34). 모세가 하나님의 법이 새겨진 증거판을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왔을 때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론에게 강요해서 만든 금송아지 우상을 둘러싸고 춤추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께서는 그 우상 숭배자들을 심판 하셔서 많은 사람들이 살육 당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또 하나의 제안을 하셨다 (32:34-33:3).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반역과 죄로 목이 곧은 백성이어서 그들 가운데 자신이 있으면 그들이 위험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대신에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자기 사자를 보내셔서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의 원수를 쫓아내고 그 땅을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가시는 대신에 자신의 사자를 보내실지라도 하등의 차이가 없다. 여기에 나타난 천사는 바로 하나님처럼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나타내는 사자이다 (23:20-21). 문제는 여호와께서 백성들을 앞서 가시든지 아니면 그들 가운데 거하시든지 이었다. 이 새로운 제안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장막을 짓도록 일러 주시되, 성막을 두기로 예정 했던 진 가운데가 아니라 진 바깥에 치게 하셨다 (33:7-11).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 기둥이 그 회막에 내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말씀하실 것이었다. 또한 여호와를 앙모하는 자는 진 바깥 회막으로 나갈 수 있었다.
 .
모세의 반응을 살펴보자(33:12-16). 그는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에서 친히 가시지 않으신다면, 이스라엘이 간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출애굽한 목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어 하나님께서 제사장 나라로서의 그들 가운데 거하시겠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그들의 기업으로 주시겠다는 것도 이 약속 때문이었다. 가나안은 농경민족 에게 적당한 농경지만은 아니었다. 그곳은 성소, 곧 하나님께서 그 거룩한 성산에서, 각 지파에게 할당된 토지에 따라 그분을 중심으로 하여 모인 이스라엘 족속과 함께 거하실 곳이었다.

어쨌든 과연 성막을 세워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미해결로 남아있다. 성막 (tabernacle)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는 상징이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께서 진 바깥에 계셨다면 이것은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회막(tent of meeting)이 대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지 않으신다면 성전(temple)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모세의 탄식의 기도는 문제의 핵심을 지적한다. 그는 “주의 길을 보이사 그에게 주를 알려 주십사”하고 기도했다(33:13).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의 핵심이다. 만일 하나님의 임재가 없다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출 받은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서 떠나시는 심판을 피하기 위해 모세는 어떻게 간구할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스라엘이 두 번 다시 불평하거나 반역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보이면서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결코 아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미덕을 들어 호소할 수가 없다. 오직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지해서 간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은총 가운데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실 것을 간구했다. 자신의 영광을 보여 주시고 자신을 알려 주시는 것이 하나님이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목적임은 물론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간구에 응답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시고 그 이름을 선포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뒷모습만 보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지나가실 때 모세를 바위틈에 두시고 덮으셨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이 선포되는 것을 들었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다! (34:6).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라고 묘사하고 있는 요한복음에 인용되었다(1:14). 사도 요한이 출애굽기에서 모세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계시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주목해 보자. 그는 모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율법이 주어졌다는 사실과, 그 율법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선포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런데 그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 (1:17).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왔는가? 요한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요한이 묘사한, 그리스도가 우리 가운데 “거한다”는 말은 장막(tabernacle)과 관련된 말이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으나(18) 요한은 "독생하신 하나님"을 보았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은혜와 진리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 가운데 거하셨다. 그리고 성막은 세워졌다. 그러나 그 성막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심을 상징할 뿐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때에는, 심지어 영광의 구름 기둥조차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비밀을 가진 상징이었다. 그러나 빌립이 모세처럼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14:8) 라고 예수님께 구했을 때, 예수께서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셨다. 성막은 상징이었고, 그리스도는 실체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하시는 참된 성전이시다.

참된 성전

예수님 자신은 이런 완전한 성취를 주장하셨다. 법정에서 제사장들 예수를 고소했던 내용도 그분이 성전을 헐겠다고 한 말이었다(26:61). 그들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 즉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는 말씀을 왜곡해서 말하는 두 거짓 증인을 소환했다. 예수께서는 성전을 혈 것이라고 예언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그분 자신이 참된 성전이심을 주장하고 계신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수가성 우물가에서 있었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도 이런 주장을 하셨다. 이 여인은 예수께서 이미 자기의 더러운 생활을 간파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는 이 분이 선지자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발견은 그녀로서는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에게서는 참 선지자가 나올 것으로 믿지 않았는데, 예수님은 분명히 유대인이시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예수님께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하더이다." (4:2) 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대답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 모두 다 옳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사람들을 찾으시고, 누가 어디에서 예배드려도 기뻐하신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시고, 그 이유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22). 그리고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를 것이다.” 라고 말씀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심산에 있는 사마리아인의 산당에서는 예배를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셨다. 제사는 오직 거기에서만 드려야 했다 (12:5-14). 선지자들은 이스라엘과 유다가 하나님이 정하신 제단이 아닌 “산당”에서 제사 드리는 것을 끊임없이 책망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깨끗케 하시지 않았던가? (2:3-22) “하나님의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는 선지자의 말을 인용하시지 않았던가? (11:17). 그런 예수님께서 어떻게 예루살렘도 그리심산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곳이 못 된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리로 (in spirit and in truth)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 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하나님께서는 영(spirit) 이시므로 예배가 어떤 한 장소에 제한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참된 예배는 영적이어서 제단이나 성소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라면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 라는 그분의 말씀의 뜻을 이해하는 데는 모호한 점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영이시므로 신령한 예배는 항상 그분이 바라시는 바가 틀림없다. 오고 있는 어떤 시간이 예배를 영적으로 바꿀 것이라는 말인가? 요한복음에서 이야기되는 “오고 있는 때” 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때이다 (2:4; 5:25-29; 12:23; 16:2,32; 17:1). 신령한 예배를 알리는 그 때는 성전 예배의 상징적 의미가 성취되고, 예수님의 죽음으로 성전의 휘장이 찢어진 때이다 (27:51).

예수께서는 참된 예배가 성전이 없는 예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자신이 참된 성전이라고 말씀하신다. 예루살렘 성전의 정교한 상징물들은 대리석과 황금으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것을 묘사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예배는 모형에서 실체로 옮겨졌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때가 오고있다’ 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이미 왔다’고도 말씀 하신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나 그분은 이미 와 계신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 4:26).

신령한 영적 예배는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이 성령은 곧 예수께서 만일 자기에게 구하면 주시겠다고 여인에게 약속하신 것이며, 영원한 생명을 솟아나게 하는 생수의 샘이다.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한다.” 할 때의 그 진리는 예수님 안에 있는 진리이다. 그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 성막에서 묘사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예수님 안에서 이제 열려졌다.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 독생자를 보내셔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기 영광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그분이 자기의 속죄제를 완전히 드렸을 때 어떤 제단도 필요 없게 되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단번에 우리 죄의 대가를 다 치렀을 때 어떤 희생의 피도 뿌릴 필요가 없어졌다. 성막의 놋 물두멍이 솔로몬 성전의 크나큰 놋대야로 넓혀진다 하더라도 죄를 씻어 없애지는 못한다. 그러나 이제 죄와 부정을 씻을 수 있는 터진 샘, 즉 십자가에 달린 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로 된 샘이 있다. 예수님은 성전의 등불이 아닌 세상의 빛이시다(1:9; 8:12). 그리고 하나님 앞의 참된 양식은 진설병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이시다( 6:35).

참 성전인 예수께서는 또한 하늘의 대제사장이시다. 길이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그 길을 열어 놓으신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찾으시는 성령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도록 하신다. 그분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으로 불탔다( 2:17). 그분은 하늘에 들어가셔서 모든 사람을 위해 단번에 속죄의 피를 뿌리셨다 (9:6-26; 10:1-25; 12:24).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령의 전들

하늘로 가신 그 예수님께서는 또한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거하러 오시게 된다. 그분은 아버지 집, 즉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거할 처소를 마련하기 위해 가셨다 (14:1-3; 21:3). 그러나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오시기 전 즉 재림하시기 전에 그분은 성령으로 오신다 ( 14:16-18). 그러한 오심은 오순절 날에 일어났다. 성령의 급한 바람과 함께 아버지의 약속은 이루어졌고 신약의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이 되었다.

고전 6:14-20
(14)하나님이 주를 다시 살리셨고 또한 그의 권능으로 우리를 다시 살리시리라  (15)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6)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17)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18)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  (19)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0)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개개의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제 둘 다 거룩한 성령의 전들이 되었다. 음욕으로 시험받는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 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19) 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 몸을 사용할 권한이 없다. 그들은 성령에 의해 사로 잡혔고, 하나님께 속해 있다 (고전6:20).

고전 3:9-17
(9)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10)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지니라.  (11)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2)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13)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14)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15)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기는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 같으리라  (16)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이라고 쓰고 있다(고전3:9). 바울은 하나님의 집을 세울 때 부실 건축 자재를 사용하는 선생들에 대해 경고한다(10-15). 그는 하나님의 집을 더럽히거나 파괴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훨씬 더 준엄한 경고를 하고 있다(고전3;16,17).

고후 6:14-7:1
(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7)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1)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개인의 몸이라는 성전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라는 전 사이에는 아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바울은 교회의 각 지체들의 거룩한 생활을 통해 교회의 생활이 거룩해질 것을 요구한다 (고후6:14-7:1). 의식적인 성결로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성전을 구별한 것처럼, 하나님의 영적인 신령한 집 또한 우상과 불의와 불신으로부터 아주 엄격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우리는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내가 저희 기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16) 라고 하시는 말에 귀를 기울이자 .

베드로전서 2:1-10
(1)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5)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6)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7)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8)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9)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베드로는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져가는 모습을 아름답게 묘사하여 이르기를, “너희도 산 돌(living stones)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 지고…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벧전2:5) 라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의 산 모퉁이 돌(living Cornerstone)인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 역시 산돌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연합되었기 때문에 성도 서로 간에 연합되었다.

계시록 21:1-7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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