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9, 2011

은혜의 수단으로서의 성경


말씀의 독특한 쓰임새

시편 119:1-16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지가 복이 있도다 실로 저희는 불의를 행치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주께서 주의 법도로 명하사 우리로 근실히 지키게 하셨나이다 내 길을 굳이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미옵소서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밀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입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교회의 본질이 나타나야 함

개혁교회가 교회의 표징으로 성경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세 가지는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파하고 가르치는 것과 둘째 선포된 말씀에 반응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교회의 member로 세우는 세례와 말씀을 보이는 현상으로 상징을 통해서 공급하는 성찬과 세째 교회의 순결과 사랑을 드러내는 권징을 진실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성립되는 요체는 교회의 주인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정상적으로 세워질 수 있는 조건들을 구체적으로 갗추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한 보이는 교회의 요소만 있으면 교회로 성립 되는 것이 아나라 본질의 교회, 보편의 교회(Church Catholic)의 참된 교회의 속성이 거기에서 드러날 때 비로서 정상적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교회 본질의 참된 속성은 사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만 갗추어 주시는 거룩한 조건들인 것입니다. 결국 보이는 교회의 sign들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교회의 참자태와 본질이 나타나는 형태를 참으로 교회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장을 보면 “지상에서 가장 순수한 교회라 할지라도 거기에 불순한 요소가 섞이기도 하고 또 잘못도 저지를 수 있다. 어떤 교회는 도저히 그리스도의 교회라 부를 수 없고 오히려 사탄의 회라고 불릴 정도로 타락하기도 한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9 절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는 말씀을 통해서 볼 때 교회가 모든 형식을 구비하고도 사탄의 회가 되기도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말씀이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은 경우

성경은 예술적인 요소, 역사적인 자료, 종교학적인 근거, 도덕적인 것이나 사상적인 것에도 많은 영향을 끼치지만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로서의 성경 본래의 의미로서 사용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는 상실하는 것이다.

성경이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되려면, 성신님이 그 말씀과 함께(cum verbo) 역사해야 한다. 그리고 성신님의 역사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한마디로 죽음이라는 상태에서 생명으로 태어나는 현저한 역사이며, 그 새로 태어난 새로운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을 수 있도록 조명해 주시며 가르쳐 주시는 역사이다.

성경이 은혜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고도 얼마든지 기독교라는 종교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으며 이런 현사은 배교라는 위험한 사실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첫째 결과, 새로운 생명

성경이 은혜의 방도로 시용되었을 경우에 첫째의 큰 결과는 그것이 사역된 사람에게 반드시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의 상태로 옮겨 놓았다는 현저한 사실이 있어야 합니다. 즉 모든 사람이 죄와 허물로 하나님 앞에 죽어 있는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가 그에게 효과있게 사역한 사람, 즉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정한 사람들은 때가 이르러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불러내시는데, 그의 속에 성경이 경전의 말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사역하여 성신님이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므로 첫째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상태에서 새로운 생명의 자리에다 갖다 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은 결국 영원한 생명, 영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2) 하는 말씀대로, 참으로 그에게 성경의 말씀이 들어가서 은혜의 방도로 사용될 때 첫째의 결과는 생명이라는 것을 참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복음적 사실이 먼저 들어가야만 죽음에서 생명을 얻는 것이지 간단한 몇 마디로 구원 받는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므로 이 복음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복음 사실 자체가 어떤 마술적인 효과가 있어서 곧 생명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자체는 살리시는 그 분이 주시는 것으로서 사람이 어떻게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신님으로 그에게 생명을 주시는 동시에 일반적으로는 그의 정신이 각성되어서 복음 사실을 바로 인식하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음 사실에 대한 정당한 각성은 예수님을 위대한 인격으로 믿는다든지 세상의 어려움을 벗어날 수 있다는 정도로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이 아닌 것이며, 이 문으로 들어 가지 않으면 절도요 강도가 되는 것이다. (요한 복음 10)

죄책과 죄의 권세에서 벗겨 주심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첫째로 나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고 다시 살아 나셨다는 복음 사실을 믿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대한 선지자로, 무한한 사랑을 가지신 분으로, 무한한 능력과 신성을 가지신 분으로 믿는다 할지라도 이 복음 사실을 바르게 믿지 않으면 구원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첫째는 나는 죄인이다라는 전제와 이 죄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영원한 형벌에 해당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 죄책을 다 담당하실뿐 아니라 예수님의 완전하신 의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속죄의 사실은 죄의 무서은 권세에서도 나를 건져 주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죄를 지은 자는 죄의 노예 상태에 놓이게 되는데, 사람으로서는 그 무서운 세력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즉 탐욕이나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남을 미워하는 마음, 늘 자기를 인정하는 마음, 이런 끊을 수 없는 죄의 세력으로부터도 우리를 건져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므로 내 죄의 값, 죄책만을 면제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의 무서운 주권, 나를 지배히는 지배력 (dominion), 권세에서도 벗겨 주신 사실을 믿어야 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런가 하고 그냥 바라보는게 아니라 믿어야 효과가 나는 것입니다. 물론 속죄한 것도 믿어야 효과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할 때 십자가 즉 속죄는 전하면서 죄의 무서운 권세에서 나를 벗겨 주신 사실이 거의 은폐되고 있는 것이 불행한 현실입니다. 자기를 노예 시장에서 사내어 자유를 주셨다는 위대한 사실이 충분히 가르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구원의 신앙을 형성하기에는 불완전한 요소로 작용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구원의 신앙에서 지적인 요소가 불완전하면 증거자로서도 불완전한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교회라는 것을 바로 증거하지 못하면 과연 교회인가 아닌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이야기할 때에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지체 하나 하나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교회가 살아 있다면 지체도 살아 있는 것입니다. 지체는 다 죽었는데 교회만 살아 있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신앙의 지적 요소가 그에게 족하게 있어야 비로소 증거자로서 자기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증거자로서 자기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서 사랑의 띠로 매어지고 거룩한 교회의 형식을 갖추는 데서 비로소 교회로서의 내실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결과, 성화
말씀이 들어가서 첫째로 이렇게 그가 죽음에서 나와서 생명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증명히는 이 사실이 바로, 성경 말씀이 그냥 경전의 말씀으로 종교를 형성한 것인지 그렇지 아니하면 참된 교회를 형성하여 생명을 증명하는지를 갈라놓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 속에 들어가되 말씀과 함께하시는 성신님의 역사가 그에게 명백하게 있을 때에는 생명이라는 사실이 먼저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문제로서 늘 기억해야 할 것은 말씀이 나에게 은혜의 방도로 역사한다면 성화의 역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말하면 Sanctification의 역사라고 합니다. 불완전에서 완전을 향하여 더욱 이끌고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이 성화의 첫째 아이디어는 물론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것을 깨끗하게 하시는 사실입니다. 즉 죄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하신 그 거룩한 성신님의 역사를 현실상 적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죄를 씻는다고 할 때는 죄책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죄가 나를 지배하는 상태에서 나를 자꾸 벗겨 주시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죄가 나를 지배한 상태를 통틀어서 대표적인 말로 하면 나라는 것, “아상이 지배할 때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이상적인 주장이 나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나, 아상이 나에게서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상태라면 그것을 씻어내야 합니다.

성신님의 성화의 역사는 점진적이어서 신자의 일생 동안 끊임이 없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희미한 상태에서 점점 새롭고 능력있는 상태로 올라가는 것이고 따라서 예수를 믿는 시간이 오래되면 될수록 성화의 사실은 그에게서 현저하게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달리 표현한다면 신자가 병이 없이 정상적으로 장성해야 한다는 의미로 말할 수가 있습니다. 병이 없이 정상적으로 장성해 가는 사실이 신자에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은혜의 방도가 그에게 역사한 증거이고 보람입니다. 이런 것 없이 자꾸 종교를 형성하거나 혹은 몇 가지 윤리적인 인간상을 형성해 나가는 것 가지고는 절대로 말씀이 은혜의 방도로서 정상적인 역사를 한 것으로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은혜의 방도로서의 정상적인 역사가 없다면 그것은 교회에서 공급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자태가 아닙니다. 교회에 가면 어디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나 은혜의 방도로보다도 과학적인 사실로, 역사의 사실로, 어떤 사상적인 내용을 진술하는 종교 철학으로 전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거룩한 은혜의 방도로서 사역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의 독특한 쓰임

말씀이 은혜의 방도로 사람의 속에서 역사할 때의 독특한 상태를 성경에서는 몇 가지의 중요한 말씀으로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첫째는 복음이라고 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 사람에게요 또한 헬라 사람에게로다” ( 1 :16). 은혜의 방도로서 역사하는 사실의 별다른 표현을 또 하나 인용하면 베드로후서 1:5-9 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이것은 성화의 한 자태일 것입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가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만일)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하게 하심을 잊었느니라장성하는데 갖춰야 할 것들은 이런 것들인데, 믿음에는 덕이 있어야 하겠고, 덕에는 지식이 있어야겠다, 지식이 있은 디음에는 절제가 있고, 절제에다 인내를 붙이고, 인내에다가는 경건을 붙여야 하고, 경건에다가는 형제 우애를 붙여야 하고, 거기다 사랑을 또한 공급해라 하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은 이처럼 차츰차츰 필요한 것들을 그에게 공급해서 장성하게 해 줍니다. 첫째는 구원하시는 복음, 새로운 생명과 속죄를 내게주시는 바 복음의 내용이 기본적으로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 다음에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가치를 바르게 판단하는데 이르도록 필요한 분석과 분해를 하게도 해 줍니다. 즉 정체를 바로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먼저는 사실의 판단을 정확하게 해야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표준하에서 정당한 가치 판단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초적으로 중요한 그런 분해와 분석, 모든 것을 잘 드러내어서 정체를 파악하게 하는 작용을 또한 성경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양쪽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양쪽에 날이 서 있는 칼과 같이 어느 쪽으로 쳐도 참 무섭게 작용합니다. 가령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사람에게 전달되면 그 사람에게 말씀이 기대하는 거룩한 적극적인 효과를 나타내기도 하고, 그 사람이 그 말씀으로 인해 쇠해 버리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적극적인 효과를 나타내지 아니할 때 말씀은 그냥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냐 하면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경우든지 능력이 있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 말씀을 또 한 군데 보겠습니다.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첫째 망하는)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쫓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구원 얻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허리요” (고후 2: 15-16). 어떤 한 사람이 하나님 말씀으로 구원받을 사람인가 망할 사람인가 우리는 모르지만, 말씀이 전해지면 망할 사람과 구원받을 사람이 분명해진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이르러서 구원받을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로 나타나지만 망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 말씀이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정죄의 조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멸망으로, 사망에서 사망으로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전도한 말을 안 듣는 그것이 죄하고 상관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실은 그것 자체가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런까닭에 더욱 복음의 내용은 정당하게 공급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공급된 이상 받고 안 받는 문제는 명확히 갈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으면 구원을 받지만, 받지 않았을 때는 그것 때문에 무서운 멸망과 흑암이라는 것이 그에게 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많이 준 자에게 많이 달라고 하고, 또 알고서 잘못을 할 것 같으면 모르고 잘못을 한 사람보다 더 맞는다는 큰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에게 들어갔든지 그 사람에게 들어갔으면 안 들어간 사람과는 달리 그가 말씀에 대해서 바로 대접하는가 푸대접하는가에 따라 큰 은혜를 누리든지 문책을 받든지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은 예리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보통의 경우 말씀을 듣고서 구원 이외의 것에 더 관심을 두는 일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이 생활에서 도덕적인 교훈으로만 그 사람에게 작용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어떤 도덕적인 교훈으로 이것 하지 말아라, 저것 하지 말아라 하고 지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도덕적인 교훈으로 작용하는 일은 안 믿는 사람에게도 하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에게는 말씀이 그렇게 단순히 도덕적인 교훈으로만, 혹은 지켜야 할 율법의 조항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님을 주의해야 합니다. 마치 율법의 말씀 곧 하라, 하지 말라 히는 명령이 그냥 실정법적인 효과만을 내고 마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산다고 하면서 특정한 법적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는 것만이 그대로 곧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인 줄로 아는 것은 큰 오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양용의

예수님 당시의 하나님 나라 개념 이해

1:15절“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의 처음 시작이 세례요한이 어떻게 사역을 시작했는지에 대해서 소개한 다음에 곧바로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 받는 장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곧바로 광야에서 시험받는 사건을 12-13절에서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후에 예수님이 공생애의 첫 일설로 15절 말씀이 사용되고 있다. 14절에 보면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냐면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이었다. 마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분으로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포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였다는 사실을 이 마가복음 1:15절을 통해서 확실하게 전제하고 그 복음서를 시작하는 것이다.

4복음서 전체에서 하나님 나라 하늘 나라라는 말은 124회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만약에 공관복음에서 동일한 말씀이 공관복음에서 두세 번에 겹쳐서 나타난 결과들을 한번으로 계산을 한다면 겹친 경우를 제외했을 때 61번에 걸쳐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반해서 복음서를 제외한 나머지 신약성경을 통해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36회밖에 사용되고 있지 않다. 그런가하면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 그 이전과 그 이후에 쓰여졌던 유대교 문학들에도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그리 흔하게 사용되지 않는 표현이다.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특징적으로 사용한 표현이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의 핵심적인 내용으로서 바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그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 보이셨는데 그렇다면 이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단어 혹은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복음에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통계적으로 보아도 복음서들의 구조적으로 보아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도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개념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그려보고 계십니까?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하나님 나라입니까? 그 하나님 나라를 20세기 한국인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될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던 1세기 당시 유대인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될지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 저희들은 고민을 해 보아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복음서들에 나타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러가지 가르침들을 그저 우리의 생각으로 예수님의 원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저 우리의 선입견과 우리의 전통과 우리의 아집으로 그 내용을 잘못 이해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 어떻게 사용되었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와 예수님이 사신 팔레스틴과는 지리적 거리가 있고 시대적으로는 2000년에 가까운 기간이 있고 그리고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언어와 우리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예수님이 사용하신 그 하나님 나라 개념과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다른 간격이 있는 부분들을 우리가 과거로 돌아감으로 좁혀 보자는 것이다. 완전한 일치를 우리가 이룬다는 보장이 없을 지라도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헌들과 구약에 나타난 그 개념들의 가능성들을 점검해 보므로 하나님 나라의 폭을 예수님 자신이 사용하였던 개념으로 되돌려 가는 작업들을 우리가 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그런 작업에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서 예수님 당시에 일반적인 유대인들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있었는가? 라는 점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라고 했을 때 하나님과 나라라는 두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알 것이다 문제는 나라의 개념이다.

이 나라라고 하는 개념은 히브리어로는 말쿰, 헬라어로는 바실레이아라고 하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의 말쿰이란 헬라어의 바실레이아는 두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중 드물게 사용되는 의미가 영역 영토라고 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헬라어의 대부분의 문헌들은 사용된 의미가 통치 왕권의 행사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레미아스의 신약신학97페이지 이하를 살펴보라. 아마도 우리 한국인은 “나라”라 했을 때 모두 영역이나 영토로 생각한다. 과연 이런 개념이 유대인들에게도 일반적인 개념 이였는가? 전혀 그러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대개의 경우는 그렇치 않았다. 모든 유대인들에게 물어보아도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헌들에서 살펴볼때는 이 말쿰과 바실레이아는 주로 통치한다 왕권을 행사한다는 역동적인 개념과 관련되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사용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이해할 때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단2:28절에 보면 한글개역에 “다리오왕의 시대에”라는 표현이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본역하면 다리오왕의 치세 때에, 다리오가 왕권을 행사하고 행사하고 있을 때에 라고 번역하는 것이 바르다. 그러나 말쿰의 히브리어 단어는 결코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성취 되어가는 과정으로서 이해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하심은 공간적이거나 정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역동적인 개념인 것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말에도 하늘이 두 가지 의미 공중과 하늘(하나님의 거처)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우리는 하늘 하면 하나님 거처보다도 공중을 생각한다. 저 파란 하늘 저게 아마 천국과 관련된 무엇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나 싶다. 실제 한국 교회도 이런 부분에 많이 젖어있었다. 이 천당이라는 개념은 천국보다도 더 공중의 어떤 영역으로 거기에 지어진 우리의 집으로 생각하게 하는 그러한 문제들을 야기해 왔다.

과연 하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천국은 동일한 개념인가? 다른 개념인가? 하늘 나라라는 개념은 마태복음에만 나타난다. 그럼 왜 이 하늘 나라라는 표현이 마태복음에만 사용되고 있을까? 과연 마태복음의 하늘 나라와 누가, 마가 복음에 사용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가? 구별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가? 마태복음에 나타난 하늘 나라의 구조가 두 공관 복음에서 사용되고 있는지를 대조를 해볼 경우에 우리의 결론은 분명하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하늘 나라로 사용한 구절에서 하나님 나라로 대치한 구절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마태복음에서는 마가, 누가 복음에서 사용한 모든 구절에서 하늘 나라로 대치해서 사용하고 있고 단4경우에 있어서만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고수하고 있다. 즉 마가복음과 누가 복음에서 하나님 나라는 마태복음에서 하늘 나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두 가지 경우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마태는 이 하나님 나라를 하늘 나라로 대치해서 사용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 마가복음의 하나님 나라와 마태복음의 하나님 나라를 대조해 볼 수 있는 경우들을 몇 가지 소개하겠다. (5:3.과 눅6:20,8:11,13:28.4:17과 막1:14-15) 세 복음서에 다 나타난 경우는 마19:14,과 막10:14, 18:16.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마13:11과 막4:11) 그럼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사용했을까 하나님 나라를 사용했을까 하는 문제다. 여기서는 에레미야스의 신약신학 97페이지에 보라 예레미아스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원래 사용했을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본다. 그 반대로 보는 분은 게르할더보스의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책27-31페이지까지를 비교해서 살펴보기를 바란다. 보스는 예수님이 하늘 나라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예레미야스의 의견을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라고 사용했는데 마태가 그것을 하늘 나라라고 바꾸어 사용했다. 라는 입장을 따를 경우에 과연 왜 이런 변형을 마태는 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 마가복음과 눅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해서 쓰여졌다.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해서 주로 쓰여졌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여졌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를 하늘 나라로 바꾸어야만 했을까 하는 질문을 또 한가지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으로서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쉽게 사용할 수 없는 호칭 이였다. 우리 나라 사람도 아버지의 이름을 이름자 그대로 부르지 않는다. 함자를 붙여서 부른다. 그런데 유대인도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꺼려서 대신할 수 있는 어떤 호칭을 필요했는데 그 호칭이 하늘이라는 호칭이다. 왜냐하면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그의 성전을 지어 놓고 하나님이 이 우주 공간에 들어올 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하늘은 이 우주 공간을 두고 한말이 아니다. 이 피조물의 세계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차원의 세계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하늘과 공중은 분명히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처로서의 하늘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늘 하면 하나님과 가장 긴밀하게 연관되는 개념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로 누가복음 15: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누가는 여러 복음서의 자료들을 활용하여 그대로 보존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다. 누가는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이 탕자의 비유와 관련해서는 그 호칭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여기서의 하늘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 아들은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이 하늘은 하나님을 대신 부르는 통상적인 호칭으로 추정될 수 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  보다는 하늘 나라에 더 평안한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그들은 하늘 나라 하면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했다.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하늘 하면 공중으로, 나라 하면 영토로 생각했을 때 여기에 하나님의 개념은 쏙빠져 버린다. 그러면 우리가 갈 어디로 가서 살영역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퍼시콜레의 말이 먹혀 들어간다. 이것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공간적인 차원의 어떤 영역으로 오해하게 되는 그런 문제점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하늘은 어떤 우주적인 공간적인 어떤 차원이 아닙니다. 이 하늘은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과 연관된 것이다. 이 두개를 잘 정리하지 않으면 잘못된 곳으로 빠진다. 이 하늘은 공중을 말하지 않는다. 분명히 하나님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나라라는 말인데 유대인들이 별로 사용치 않았던 영토적인 개념으로만 우리가 이해한다면 보다 일반적이고 보다 적절한 개념인 통치의 개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저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천국을 읽을 때마다 그것을 천국이라고 지나치지 말고 우리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라도 이 하늘을 하나님으로 대체시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나라를 영토적인 것보다 통치적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작업을 하는 것만이 마태복음에 나타난 천국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질문의 답,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개념 설명아까 제가 하늘의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공중의 의미 우주적이고 공간적인 의미가 있고 하나는 그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거처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아주 적절한 의미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있는데 그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공간적인 제한을 받지 않는 하나님의 차원의 거처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우주 공간에 들어가 계시는 하나님으로 우리가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피조물보다도 작고 피조물보다 제한된 모습으로 이해해야 한다. 저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는 곧은 이 우주 공간적인 그러한 거처가 아니고 그 우주 공간의 차원을 뛰어넘은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상상력과 이해력으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그러한 차원의 하나님의 거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했으니 우리가 부인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 하늘의 개념이 우주 공간의 어떤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처의 개념으로서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하고, 그 하늘이라고 하는 개념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과 연관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개념으로 유대인들에게 이해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늘은 분명히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그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하늘을 유대인들은 완곡 어법으로 불렀다. 애인들이 남편을 오빠, 선생님, 자기라고 부르지만 서로 알아듣듯이 말이다. 유대인들은 십계명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했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과 연관된 하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불렀다. 따라서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하늘에 계신 이라는 말 자체는 아주 적절하고 당연히 우리가 이해해야 할 그런 표현이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우주 공간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질문2. 우리가 나라라고 말할 때 영토 국민 주권이라고 생각하는데 대해? – 이 개념은 17세기 만해도 존재할 수 없는 그럼 개념이다. 왜냐하면 옛날에 나라의 개념 속에 제일 중요한 것은 왕이다. 그리고 왕밑에 신민이 있을 뿐이다. 주권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왕권만이 있을 수 있었다. 왕이 다스리는 것이지 국민들 스스로가 다스린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 국가의 3요서는 제가 이해하기로는 민주주의가 형성된 이래로 국민에게 왕의 권한을 돌려주는 그러한 차원에서 국민이 주권을 갖는다 해서 왕권을 대체하는 것이 주권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지금 20세기의 국가관을 가지고 이 나라의 개념을 이해해서는 안된다. 영어에서 나라라는 자체가 kingdom인데 이것은 왕이 다스리는 개념이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하는 나라라는 개념은 옛날에는 나라 하면 임금에게 있었다 그래서 나라님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조 시대의 개념이라면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오늘날 민주국가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늘날은 통치자의 개념이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 바실레이아라는 개념이 통치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문헌상으로 보아도 거의 찾을 수 없다.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토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기에 설명한 것이기에 유대인에게 이런 강의한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약적 배경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오셔서 하신 일이 구약을 성취하러 오셨다. 구약의 모든 것들을 성취하러 오셨다. 예수님은 구약의 어떤 것을 바꾸어서 자기 스스로 하신 것이 없으셨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이룬다고 한 것은 이미 구약 시대에 구약의 백성들을 향해서 선언되었던 그리고 예언되었던 그러한 내용 들이였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할 때 구약에 대한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이해가 정상적으로 보기에는 참 어려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도 이 구약에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배경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를 이해를 함으로서만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나라라는 말은 통치의 개념이 주된 개념이지만 영토의 개념이 배제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영토가 그렇게 중요한 개념이 아니였다는 것을 더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구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 당시의 문헌들이 그렇게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통치 개념이 두 가지 표현 방식이 있었다, 시대에 있어서 현재와 미래 두 가지 개념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이 시대에 지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 그것을 하나의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했고 또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대에 있게 될 미래의 하나님의 통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이야기할 때는 이 현재적인 의미와 혹은 진행적인 의미와 미래적인 의미로 생각했다.

하나님의 현재적인 통치
47:2절이하, 99:1절이하 단 4:34이하 이런 곳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 구약 시대에도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시편 기자들이 선지자가 예언하고 찬송하고 있다. 99:1절 이하“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도다…(3)” 여호와께서 만민을 통치하고 있는 것을 시편 기자는 찬송하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완전하고 우주적으로 인정될 하나님의 통치
24:21-23,52:7-10.14:9-20,2:44 이런 곳들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때에 이르면 범우주적인 통치를 이루게 될 것을 이야기하는데 사52:7-10. 이 문맥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 시온을 구속하실 것인데 그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 날것이라는 말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말한다.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 이말은 현재 일어난  말이 아니고 시온이 구속을 받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치게 될 환호의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때에는 여러 가지 우주적인 사건들이 일어 날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말라기서에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로 말하는데 이날은 하나님이 통치를 시작하실 때를 두고 한말이다. 참고적으로 유대인의 매일 기도문 중의 하나인 카드쉬는 “그가 그의 말쿰을 그의 생전에 아주 가까운 시기에 이룩하시기를” 하는 기도문이 있다.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통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모든 민족의 창조주이시다. 그러나 민족들이 그를 멀리 떠나 버렸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그의 왕국을 다시 제공해 주었을 때 이스라엘만이 그에게 복종하였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셨다. 이것은 유대인의 문학에 나타난 하나님이 통치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준 것이다. 이 왕국은 율법에 나타난 왕의 뜻을 실현함으로 성립되었고 그 율법에 순종할 때만 하나님의 통치는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중요하였던 이유는 그 율법을 시행하므로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구체적인 그 모습이 나타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율법을 지킴으로 실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열심당원 바리새인 중에는 자기들이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  하나님의 통치의 기반이 닦여질 것으로 확신하는 자들이 있었다. 유대인들이 쉐마(공중에서 드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셨다. 그러나 현시대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제한되어 있고 감추어져 있다. 여기 현시대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에 그들의 기대 속에 있었던 그들이 처한 시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이방민족들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는 이방인의 통치는 공존할 수 없는 완전히 상치되는 개념으로 현실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때가 되면 이러한 구조가 사라지게 될 것을 내다보았다. 이스라엘은 해방되고 하나님의 통치는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라고 기대하였다. 그리고 온 세상은 하나님을 볼 것이고 그를 왕으로 인정하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유대인들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와 로마의 압제 하에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기대였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권에 대해서 행사하심의 의미였다. 어떤 때에는 현재악의 와중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종말론적인 통치 개념이였다. 예수님이 오시기전에 유대교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였다. 이 시대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에게만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면 그 하나님은 모든 나라들에 의해서 인식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나라가 그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유대교의 종말론적인 이원론

주의 날
구약의 여러 곳에 주의 날이라는 개념이 있다. 주의 날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런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 세상의 악과 죄악을 완전히 몰아내고 지상에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이룩하시기 위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방문하시는 날이다. 그 방문목적은 이 세상의 악과 죄악을 몰아내고 지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이룩하시기 위한 것이다. 요엘2:31, 2:12-17, 7:1-27. 이런 구절들을 살펴볼때 이 주의 날에는 심판과 구속의 두개의 측면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방문하시는 목적은 먼저 이 세상에 악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악의 압제하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구출하기 위한 이중적인 목적이 있다. 그날이 바로 주의 날이다. 그들은 태어나서 한번도 자기나라의 왕의 통치를 받아본 적이 없는 굳이 받았다면 해롯 같이 로마의 앞잡이에게 착취와 압제를 받았다. 그래서 이날을 소망했다. 주의 날이 옴으로 이 세상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을 것에 대해서 그들은 기대를 하였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9:13-15, 이 세상과 새로운 세상사이에 연속적인 측면이 있을 것이다 라고 묘사하는 반면에 사65:17절에 보면 옛세상과 새로 도래할 세상사이에 완전한 단절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철저한 단절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데 이런 이야기를 성경상에서 이야기할 때 어떤 것이 맞는가? 그런데 어떤 것이 맞느냐 하는 그 질문을  하나님의 계시에 어떤 신비함을 무시하는 질문이 아닐까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그 다양성속에 통일성이 있기에 그 다양성을 깊이 인지하면서도 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시대적 구분에 어떤 성격을 보다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아모스서는 하나님의 나라, ”주의 날이 임했을 때 그 이후와 그 이전의 상태가 어느정도 연결성이 있는 성경에 대해 이야기한 반면에 이사야서는 거기에 철저한 단절의 성격이 있다. 그래서 옛시대와 세시대는 불연속성과 연속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이 옛세상과 새세상에 대해 구약은 이시대와 장차올 시대로 표현을 한다.

이 시대와 장차올 시대
한글 개역에서는 금세와 내세로 번역을 한다. 여기서 시대 세상이라고 하는 단어는 아이온이라고 하는 단어로서 세상자체보다는 시대적인 흐름 시대와 세상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적인 의미로 이해하겠다. 금세하면 이시대, 내세하면 장차올시대, 이 금세와 내세가 언제 사용되어졌는지는 잘알 수 없다. 이 용어가 온전한 형태를 가지고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주후1세기경의 작품인 에스라4, 바룩의 묵시서 이런 책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용어가 기원이 어떠하던지 이시대와 내세의 사상은 현재의 세상과 미래의 구속받을 세상을 대조시키고 있는 구약의 시대 구분으로 거스려 올라가는 것을 볼수 있다. 따라서 이시대는 장차올 시대의 상반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멧세지와 전반에 대해 뼈대를 제공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을때 그는 히브리 유대적 사상의 배경가운데서 그의 멧세지를 전달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멧세지가 유대적 사상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해야한다. 예수님은 그 배경을 이해하면서도 그배경의 한계와 그리고 그 배경의 오류들을 지적하시고 시정하시고 그것을 초월하시는 그하나님 나라 비밀들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설명하시고 또 실행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먼저 깊이 인지를 해야 될것이다.

도표로본 유대교의 종말론적 이원론

          엘리야의 출현                                        여호와의 날
  시간------------------------------------------------------------------------->           
        현재의 악한시대(이시대)                           장차올 영광스러운 시대  
        사단의 통치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으로부터 소외()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사람들로부터 소외()                             새로운 사회()
        패역과 죽음                                          영생
        옛창조: 연약한 몸                                   새창조: 부활의 몸

이 연속되는 줄을 시간의 흐름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한 단절의 시점이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날을 여호와의 날, 주의 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날 등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수식구들을 사용하며 이 날을 강조하고 있다. 이게 여호와의 날이다. 그런데 이 주의 날이 나타나기 전에 반드시 엘이야 선지자가 출현하게 되어있다. 엘리야 선지자가 먼저 와야 그 이후에 주의 날이 올 것이다 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 시대는 아주 악한 시대요,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백성의 통치를 받는 시대다. 사탄이 그이 세력을 발휘하는 사탄의 시대다. 사탄의 통치가 여호와의 날이 옴으로 종결되고 그때로부터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야기를 한다. 이 사탄의 통치하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인간이 소외되어 있고 사람들로부터 서로간에도 믿지 못하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그러한 소외 관게속에 들어가는 그래서 그 세상 가운데는 패역과 죽음이 성행하는 그러한 시대의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이시대는 옛창조요 연약한 몸을 입는 자들이 살아남은 때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장차올 영광스러운 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권을 회복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가 회복되고 거기에 인간과 인간사이의 신뢰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서 새로운 사회가 이룩되게 되고 그리고 모든 하나님을 믿느 백성들에게 영생이 주어지게 된다. 더이상 패역과 죽음의 노예가 되지 않고 영생의 자리로 옮기게 된다. 새창조와 부활의 몸을 입는 세대로 유대인들은 기대했다. 이것은 신약의 가르침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이런한 종말론적인 이원론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수님이 오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기전에 누가 먼저 온다고 하였는가?

말라기 4:5-6절에 “...선지 엘리야를 보내리니...” 그날이 이르기전에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겠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날을 그처럼 기다렸다고 했는데 그보다 앞서 선지 엘리야를 대단히 많이 기다렸다. 이 엘리야가 옴으로서만이 선지 엘리야가 올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엘리야가 오기를 무척 기다렸다. 그런데 이 엘리야가 어떤 모습으로 언제 올 것인지를 여러 사람들이 다양하게 추측하고 있을 때에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세례요한에 대해서 복음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복음서에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의 모습으로 요한을 표현하고 있다. 누가복음 3:1-2절을 보라. 대개 구약에서 어떤 선지자을 소개할 때 호세아1:1절의 패턴을 따른다. 거기보면 누구의 시대에 누구의 아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다. 그러나 눅3:1절에는 누구누구의 시대에 분봉왕으로 있고 분봉왕으로 있는 그런 시대에 또 누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누구의 아들 누구에게 임하였다. 분명히 여기서 요한이 선지자적인 역활을 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요한의 멧세지를 들으려고 나타났던 반응들을 살펴보자. 먼저 요한의 모습이 막1:6절에 나타나는데, 예수님이 무엇을 먹고 입으셨는지 여러 정보가 있지만 단적으로 무엇을 입고 먹었는지에 대해서는 없다. 그런데 마가는 요한을 설명하는데 굳이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구약의 배경을 보면 의미심장하다. 왕하1:8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 아하시야가 병이 들어서 그가 죽을 병인지 살병인지 점쟁이에게 자기 신하를 보내어서 점을 쳐오라고 했다. 그런데 그 신하들이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죽을병에 걸렸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 신하들이 왕에게 와서 보고를 한다. 그러니 왕이 묻기를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더냐 했더냐 했더니 그 사람은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만났습이다. 하니까 아 그는 디셉사람 보기도 싢은 엘리야 이구나 라는 사실을 금방 알았다. 이 엘리야의 특징이 털이 많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는 사람이였다.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어떤 모습으로 올지 익히 잘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의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털이 없는것 같다. 그래서 요한은 약대털옷을 입었다 왜요? 유대인들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성경적으로 들어내어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엘리야와 세례요한은 털이 많은 것과 허리띠를 띠었다. 요한이 얼마나 친절한 삶인가를 생각해 볼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람들을 사용하실때 얼마나 친절하게 사용하시는가? 그래도 모를 사람은 모른다.

이 요한이 나타나자 막1:5 예루살렘 사람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다른 지방에 갈 필요가 없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오도록 되어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와야지 예루살렘 사람이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광야로 나갑니까? 그러나 그들의 기대에 정말 부응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자기들이 어떤 자존심이나 권위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그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선지자의 축복을 제하여 버렸다고 믿고 있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선지자와 같은 요한의 출현 그리고 엘리야의 모습으로 나타난 요한의 출현에 대해서 그들은 대단한 열광과 기대를 가지고 광야로 나가서 세레를 받았다. 더군다나 요한이 엘리야와 같은 외모를 가지고 광야에서 나타 났을때 엘리야 처럼 그리고 그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전파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사40:3절 말씀에 나타난 그 선지자의 역활에 대해서 요한의 멧세지가 설명되고 있는 것을 볼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한의 모습은 말라기 3:1절의 말씀 그 예언에 대한 성취로 이야기할 수 있다. 요한 자신도 스스로를 엘리야의 모습으로 연관지어서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한이 엘리야의 모습으로 나타난 모습에 대해서 눅1:15-17에서 요한이 잉태 되었을때 사가랴에게 말씀이 임했다. 그 말씀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요한은 모태로 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고 그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앞에 돌아오게 한다. 이것은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임했다. 이 요한은 나타나서 임박한 이 세상의 마지막 때로서의 선지자의 역활을 감당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하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하는 말4:5-6절의 예언을 엘리야는 예수님앞서 그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므로서 그는 종말론적인 선지자의 역활을 감당했던 것이다. 요한을 통한 주의 말씀은 요한이 기대했던 대로 성취되지는 않했을지도 모른다. 7:19절을 보라. 그러나 요한이 한 약속은 지극히 중요한 의미에 있어서 즉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하는 예언의 말은 이미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성취되어가고 있음을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것이다.

Thursday, December 8, 2011

창조, 아담 언약

① 문화명령으로서 창조언약(1:28)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에 따라서 세상을 지으시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좇아서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친히 지으셔서 에덴에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모든 창조물의 통치권을 하나님을 대신해서 위임해 주십니다(1:28). 이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그야말로 창조의 절정과 극치와 면류관으로서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대리적 통치자 (representative ruler)인 우주의 왕(vassal King)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이런 사실에 근거해 아담 부부가 타락하기 전, 에덴은 처음부터 하나님 나라를 예표적이며 성례전적(sacramental)으로 계시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보다 온전하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로 발전시켜 나가야 할 책임과 사명이 저들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1:28의 창조언약을 통해 주신 소위 '하나님의 문화명령'(cultural mandate, creation mandate, Christian stewardship) 속에 담긴 계시의 비밀의 본의(original purpose)가 그랬습니다. 이는 인간의 문화 활동으로서 창조적이고 창의적인 생명적 활동의 궁극적 목표가 하나님 나라 사상에 집중돼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자손),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통치권, 1:28)고 하신 하나님의 문화명령으로서 창조언약의 중심사상은 본질에서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지향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② 선악과 금령법(선악과 언약)으로서 아담언약(2:17)

그렇다면 창1:28에 담긴 이런 원대한 하나님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이 어떤 방식을 통해 실현 가능할까요. 이는 창조의 원리상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가운데 이를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통해 비로소 가능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통치적 성격은 하나님의 말씀이 권세 있게 시행될 뿐 아니라,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으로서 자원하는 순종의 삶을 특징으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12:13, 14:21). 바로 이런 사실의 당위성을 극명하게 계시하고 있는 표상(表象)적 사건이 다름 아닌 선악과 금령법(禁令法)에 담긴 선악과 언약(행위언약)의 비밀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2:17).

이런 이유로 이후부터 아담과 하와에게 있어서 선악과 금령법(언약)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순종을 관장하는 제도적 장치로서의 효력을 발생하게 됩니다. 이는 아담부부의 생명의 근원이 말씀에 기인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생명의 지속적인 존속여부 또한 철저하게 말씀의 순종에 의존돼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작정 속에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좇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이들에게 이후 문화명령을 적극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선악과 행위언약(2:17)이란 자체 속에 조건부적인 단서조항을 포함함으로 일종의 선의적인 시험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2:16을 통해 이미 저들에게 허락된 자유의지(self-will)는 엄밀한 의미에서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성격의 자유의지가 아닙니다.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본질적 관계상, 하나님의 뜻을 적극 이루어 드리는 일에 의존적이며 종속적으로 선용되어야 하는 제한된 자유의지입니다. 17절의 선악과 금령법에 의해 아담의 행동이 철저히 통제되고 있음이 이를 반증합니다. 이런 사실은 아담이 각종 생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는 데서도 극명하게 확인됩니다(2:19-20). 다시 말해 아담은 각양의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줄 때 임의대로 명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부합되게 지어준 것입니다(의존적 자유의지). 이는 또 다른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사실이 보다 구체적으로 표출된 경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만일의 경우 아담부부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제한된 자유의지를 오남용함으로 월권을 하게 된다면, 선악과 금령법에 담긴 하나님의 요구는 경우에 따라서 무시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선악과 사건이 시험적 성격을 담고 있다는 관점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인간의 존재이유와 가치성과 본분은 철저히 ‘하나님과의 관계성' 안에서 그 분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복하는 데서 비로소 찾아짐을 확인하게 됩니다. 12:13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따라서 아담부부는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16절의 범주 안에서 만끽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17절과의 관계 속에서는 철저히 제한적으로 사용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야만 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 안에서 한정적으로 사용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면 주님께서 이 일을 기뻐하실까, 주님이시라면 이 일을 행하실까, 이 일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이 일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이루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될까 등등의 질문을 던져보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상의 질문에 ’예와 아멘‘으로 답변할 수 있다면 이는 적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자유의지를 선용하는 셈이 될 줄 압니다.

③ 원시복음으로서 여자의 후손언약(3:15)

한편 하나님의 보좌를 찬탈하려다 실패한 사단과 그의 졸개들에게 세상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시적으로 저들에게 허락된 통치의 영역입니다(12:31, 16:11, 4:8, 6:12).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아담 부부와 그들의 후손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자 하는 계획을 감지한 사단은 천상의 영계에서 이루지 못한 사욕을 채우고자(6, 벧후2:4, 14:12-15) 이번에는 뱀을 하수인으로 삼아 창조의 면류관인 아담과 하와에게 접근합니다. 이번에는 직접 공세를 포기하고 우회전술을 시도합니다. 이 시험에 아담과 하와가 빠지고 맙니다(3:1-6). 이로 인해 에덴에 죄가 유입됩니다. 이제 에덴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하나님 나라로서의 천상적 모습과 성격을 잃게 됩니다. 인류에게는 실낙원이 돼버린 셈입니다.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가 한 순간에 깨져버립니다. 비록 이들에게 선악과 행위언약 속에 조건부로 주어진 죽음이 즉각적으로 찾아오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3:8-10)은 본질에서 죽음과 방불한 형벌로 기능하기에 충분합니다. 사단이 승리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듯 보입니다. 따라서 창1:28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나라로서 신정왕국의 건설을 위한 문화명령적 언약은 파기된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사단은 영계에서 못 다한 한을 여기 지상에서 보상받는 듯 합니다.

이 과정에서 소위 ‘하나님의 딜레마’(God's dilemma)가 제기됩니다. 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에 근거하면 이 언약이 성격상 은혜성을 띠고 있기에 어떤 경우라도 중도에서 파기될 수 가 없는 상황입니다 (창조언약의 기원은 사실상 엡1:3-6에서 찾아집니다). 하나님은 기어코 아담과 하와 부부 및 그의 자손들을 통해 문화명령의 결국인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야만 하십니다. 그러나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은 조건적인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있는 바, 이를 어기면 불순종의 대가로 형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부부(3:6)는 죄인으로 정죄돼 죽음의 선고는 필연적입니다. 그렇게 되면 창1:28의 문화명령적 창조언약은 더 이상 진전될 수 없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상기 두 언약 사이의 상호 반목과 대립 및 충돌과정에서 ‘하나님의 딜레마’란 문제가 제기됩니다 (하나님의 의인화 곧 신인동성동형의 원리에 근거해서).

다시 말해 문화명령적 창조언약(1:28)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계속해서 앞으로 전진해 나갈 것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선악과 금령법의 행위언약(2:17)은 이를 어긴 아담 부부의 즉각적인 죽음을 요구하면서 더 이상의 진행을 불허합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입니다. ‘하나님의 딜레마’란 이런 양극단의 대립양상을 염두에 둔 데서 나온 수사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창조자의 절대 주권적인 특성상 어떤 이유로라도 파기되거나 변개 될 수 없습니다(23:19). 더욱이 선악과 금령법은 비록 그것이 행위언약의 성격을 띠고 조건부적으로 주어졌다 할지라도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입장에서 창1:28의 은혜언약에 부속돼 있음으로 죽음의 형벌이 언약적 징계와 심판의 성격을 띠고 주어질망정, 영원한 형벌로서 아주 사망에 처해지게 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된다면 이는 창1:28의 언약이 식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식언치 않는다고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은 그 출처가 본질에서 신적 기원 곧 주권성과 은혜성에 근거하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성취돼야만 하는 당위성을 이미 자체 안에 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비록 아담부부가 선악과 금령법(2:17)을 어김으로 사형선고가 불가피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언약(1:28)과의 관계상 언약적 심판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형벌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주 죽을 수는 없는 상황에 처해지게 됩니다. 이런 진퇴양난의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한편으로 창2:17의 선악과 금령법을 어긴 이들의 죄책(3:6)을 해결해 주시며, 다른 한편으로 창1:28의 문화명령적 언약의 궁극적인 목표인 하나님 나라를 지속적으로 성취해 나가시는 방식의 일환으로 창3:15의 여자의 후손 언약을 맺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언약은 이상의 양자 간의 불가피한 상호 충돌을 동시적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해결책으로서 이중적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일컬어 복음의 원형(prototype), '원시복음' 또는 '어머니 약속'(mother promise)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 안에 구속계시의 원리상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대속적 속죄사역의 의미가 암시적으로 내포돼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3:15). 이는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적 구속사역 안에서 절정을 이루는 가운데 마침내 성취되기에 이릅니다(4:4).

④ 구속의 원리를 방편으로 선용하셔서 창조원리를 지속시켜 나감

이제 당초 창조원리(1:28)에 근거해 타락 전 무죄자로서 아담과 하와와 이들의 후손으로 인해 이루고자 하셨던 하나님 나라의 건설 계획은 이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자연스럽게 죄를 구속해 주시는 속죄의 원리와 방식(3:15)을 통해 재정립 되기에 이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으로서 하나님 나라 건설이 당초 창조원리에서 구속의 원리로 변경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갱신될 뿐입니다. 다시 말해 구속의 원리를 방편삼아 처음 창조원리에 입각한 하나님 나라 건설 계획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죄로부터 당신의 백성을 찾으시려는 창세전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이 이런 방식으로 성취된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1:4, 2:23, 4:27-28).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이런 식으로 세상역사(표면적 사건)의 본질이 하나님의 구속사(이면적 사건)인 사실을 통해 인류의 유일한 구속자로서 성육신의 길이 예비 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창4장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세상역사는 표면적으로 보편적 인류의 역사라는 성격을 띠고 피조세계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만, 사실은 여자의 후손(3:15)을 세상 가운데 보내시는 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문화명령의 결국이며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인 하나님 나라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려는 구속사의 현장이요 무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게 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11:33).

이런 관점에서 창1-2-3장에 각기 기록된 언약에 관한 상호 연계성과 의존성 및 이에 대한 정당한 해석여부는 이후 전개되는 성경의 계시역사 전반에 걸친 언약적 구속사의 내용을 하나님의 본의를 좇아 바르게 해명하는 일에 있어서 결정적인 근간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⑤ 여자의 후손언약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역사

이상 창 1-2-3장에 각각 언급된 언약간의 상호 필연적인 연계성은 창4장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인류의 역사 속에서 여자의 후손언약을 구체적으로 성취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출발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를 일컬어 언약적 구속사라 부릅니다. 여자의 후손을 세상에 출현시키려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언약을 수단과 방편삼아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서 미래의 메시아는 계보적으로 당연히 아담과 하와의 혈통적 후손을 통해 세상에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세속사의 본질이 구속사인 사실이 이런 상호관계 속에서 도출됩니다.

이상의 사실들을 고려하건대, 4장에 소개된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사건은 단순히 시기질투에서 빚어진 충동적인 살인행위가 아닙니다. 표면적(세속사적 관점)으로는 아벨의 제사만 열납 된데 대한 가인의 감정적인 문제가 깊이 개입된 결과로 보여 집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 담긴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이미 언급된 인류의 두 후손, 곧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의 끊임없는 적대적인 대립과 충돌에 관한 예언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합니다. 가인은 뱀의 후손으로 아벨은 여자의 후손언약의 당사자로서 말입니다.

이런 이유로 아벨의 제사가 상대적으로 열납 된 사실은 제물의 차별성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는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11:4)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담긴 원시복음의 내용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온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의 당연한 결과일 뿐입니다(6:8-9, 11:8, 2:8-9, 고전15:10).

이후 성경의 계시역사는 철저히 여자의 후손언약을 성취시켜 나가는 언약적 구속사의 성격을 띠고 세상역사 속에서 진행돼 감을 봅니다. 창세기 저자는 이런 구속사의 진행을 특별히 족보의 기술을 통해 암시적으로 시사합니다. 5장에서 소개되는 아담의 족보는 여자의 후손언약이 아담으로부터 시작해 죽은 아벨 대신 주신 셋을 통해 에녹과 노아에게로 연결되는 것을 봅니다. 구속사 진행에 있어서 족보의 의미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증거, 새로운 계시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 여자의 후손계보를 위한 언약적 구속사 진행의 통로로서의 기능 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