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17, 2011

등과 빛이 되는 말씀

등이요 빛인 말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전달된다 할 때에는 그 말씀이 구원의 사실을 명확하게 제시하는 것과 구원받은 자가 정상적으로 성장해서 영화의 정점을 향해서 전진해 나가는데 필요한 생명의 양식으로 공급되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생활하고 성장해 나가는 실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중요하게 역사하는 큰 사실의 하나는 그 말씀이 우리의 발에 등이 되고 우리의 길에 빛이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105을 보면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킴캄한 밤 어느 길을 가려고 한다면 빛이 필요합니다. 길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할 때 환히 비치는 빛이 있어서 길을 비춰 주면, 아 이것이 길이구나 하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멀리는 길이 보인다 해도 당장 내 발 앞이 어두우면 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발 앞에 등이 있어서 길을 비춰 주면 그 등과 함께 한 걸음씩 전진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한걸음의 전진에서 무엇이 어디 있으며 어디를 밟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사역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나에게 있어서 내 인생의 길이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환히 비추어 주고 또한 그 길을 걸어갈 때 내 발걸음 하나 하나를 비추어서 가게 한다는 것이 이 시편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귀하고 훌륭한 소식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어디든지 인생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세월은 가고, 세월이 가면 역사가 흘러가면서 자취는 남게 됩니다. 인생의 길은 그렇게 하나의 역사의 자취로 남겨집니다. 나는 집에 가만히 앉아 있을지라도 인생의 시간은 흘러가는데, 인생 길의 목표가 어딘지 자기는 알 수 없기에 그냥 간다는 사람도 많고, 그런가 하면 내일은 모르는 것이니 자기는 현실에서만 그냥 향락하고 살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이 내일을 알 수 있게 피조되지는 않았을지라도 내일을 향해서 가도록 만들어진 것이 피조물인 사람에게 적용되는 중요한 원칙입니다. 내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알지 못하는 내일을 향해서 걸어야 하는가? 할 때, 그런 기능이 없는 네 스스로의 안목을 의지하지 말고, 네 길을 정하시고 네 길을 인도하시고 네 길을 비추어 주시는 주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여 그의 붙드심을 받고 인도하심을 받고 가야 한다는 것이 대원칙입니다.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인도할 수 없게 피조되었다는 사실을 늘 명확하게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럴지라도 나는 내일을 향해서 늘 걸어야만 할 신성한 의무가 있는 인생이라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처음부터 정하시고, 저기에 목표가 있다 그리고 저리로 가는 것이 네 길이다 하고 비춰 주시고, 또 한 걸음 한 걸음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은혜입니다. 사람은 거기에 의지해서 살아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아담도 그렇게 살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원시의 의(Original Righteous)라는 것을 가졌던 아담도 그렇게 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자기 생각대로 길을 걸으려고 하였고 그것이 곧 최초의 범죄입니다. 인류를 대표한 언약의 머리로서 전 인류를 대표해서 자기 마음대로 자기 길을 걷겠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인생의 길을 자기가 주장하고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최초 아담의 죄로서 전 인류가 같이 죄책을 젊어지게 된 큰 죄악인 원죄인 것입니다. 그런 아담의 품성이 모든 사람에게 이어져서 사람의 마음 가운데 정욕, 탐욕의 형태로 강하게 늘 나타납니다. 자기의 길을 자기가 정하고 자기의 행복은 자기가 취하겠다는 생각, 자기가 주인이 되어서 인생의 길을 끌고 나가는 사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사람이 정당한 생활을 하려고 할 때는 반드시 자기 생활 전체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주장해 나오던 과거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완전히 다 내어 놓고 그렇지 못한 과거의 태도를 아프게 느끼고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의 중요한 내용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잘못을 회개해야 한다고 할 때 보통 세상에서 말하는 법률적인, 그렇지 않으면 사회 일반 도덕상의 죄악만을 생각하고 회개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인생을 항상 자기가 주장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프게 회개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들었습니까? 처음부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자기의 행복을 스스로 건설하겠다고 추구하며 나갑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잘못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는 반역의 죄악이다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런 반역의 죄악에서 돌이켜 이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고 인도하시는대로 살겠다 하는 정신으로 바로 서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의식인 것입니다. 그것이 회개한 사람의 의식으로서 거기서부터 비로소 인생의 길을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은 잠시도 우리에게서 떠날 수 없는 기본적인 의식이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회개의 의식이 흐려져 자신을 설득해 가면서 자기 뜻대로 행복을 추구하고 생활을 경영해 보려고 하는 탐욕이 나오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을 인도하시고 빛을 비춰 주시기를 바라는 기본적인 요구가 참으로 부족한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시고 빛을 비춰 주신다 할지라도, 지금 내가 경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중지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조건을 붙이는 일이 또한 우리에게는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주장하시기를 바라기는 합니다. 또 인생을 살아보니 참으로 사람이 약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럴지라도 지금 내가 경영해서 얻어 놓은 이 행복만은 하나님이 기정 사실로 인정하시고 그 위에서 이제부터 인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는식 생각을 흔히 하기 쉽운 것입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9:16-17과 누가복음 5:36-37에 나오는 새 포도주와 새 옷감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헌 옷감으로 옷을 이상하게 만들어 놓고, 이제 여기부터는 하나님이 맡아서 새 옷감으로 마무리 해 주십시오, 하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전체를 포기하고 인생을 다시 시작할지라도, 마땅히 그렇게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다 맡아서 인도해 주시고 이제부터 새로 건설 해 주십시오 해야 하는 것입니다. 중간에 예수를 믿는 경우라고 해서 지금까지 내가 건설해 놓은 그 인생 위에다 하나님이 계승해서 맡아서 좀 해 주십시오 하는 것은 절대로 성경이 가르치는 생각이 아닌 것입니다.

전체를 맡기는 문제

사람은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새로 난 어린아이로 태어나는 것이지 장성한 사람으로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있던 과거를 그냥 인정해 달라고 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합니다. 많은 경우 예수를 믿은 후에도 안 믿는 사람과 같은 자기라는 것, 옛 사람이라는 것이 자기를 지배해서 인생을 건설하고 나가는 사실 위에다, 하나님이 이것을 좀 맡아서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인계를 하려고 하는데, 그런 것은 옳지 않음을 늘 주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상태를 가장 잘 아시고 내게 있어야 할 것들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혹시 지금 나의 이 행복이 없어지면 어쩌나 하고 걱정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는 여러 가지 선의는 우리로서는 다 측량할 수 없이 크고 높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내가 무엇을 스스로 경영해서 그것이 좀 행복스럽다고 생각하면 그것을 안 놓치려고 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어서, 하나님의 선의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믿을 수가 없어서 그와 같이 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완전히 단념을 하는 것이 정당한 신앙입니다. 그것이 비록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약속하셔서 내리신 은혜라고 할지라도, 즉 지금까지 하나님이 은혜를 내려주셔서 쭉 계속해 나오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어느덧 거기에 대한 자신의 애착이 너무 강해서, 이것만은 하나님이 그냥 잘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것은 결코 옳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런것에 대한 사례는 창세기 22장의 아브라함의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아들입니다. 이삭은 특별히 하나님의 크신 계획과 경륜 가운데 나온 자식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에 대한 아브라함의 애착 혹은 소유욕이라고 할 것이 강해지니까 그것을 포기시키기 위해서, 안 되겠으니 도로 내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내가 경영한 계획이지만 이제 취소한다, 하는 말씀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거기서 큰 교훈을 받았습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생각, 내가 경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아니해야 할 것이라는 큰 교훈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온 소중한 것이 자기에게 있을 때, 하나님이 그것을 지켜 주신다고 말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다 맡기고 의지하고 나가는 것이 빈곤하고, 자기의 생활 감정이 어느덧 그것이 혹시 없어지면 어쩌나, 이러면 실패할까 저러면 안 될까 하면서 점점 자기라는 세계가 커지고 자기 주장이 강하게 들어가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해서 경고를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니까 어느덧 유혹을 받아서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 할 때 그 길에 대해 잠언 3:6 에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는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또 잠언 16:3을 보면 “너의 하는 일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야고보서 1:5-8에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먼저는 자기가 경영하던 것을 포기하고,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맡아서 경영하십시오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다 내가 어두움에 있을때에 자기 욕심에 의해서 한것으로 주님 앞에서 이런것들은 다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저를 붙드셔서 갓난 아이같이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이 세상에 보내신 보람을 만들어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는 것이 정당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과거의 어떤 것들에 대해서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그 섭리대로 인도하신 사실들을 활용하시는 것은 다만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도를 받음에 있어서 도덕상의 문제

예수를 믿고 난 후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 할 때에 전체를 맡긴다는 문제 다음으로는 선과 악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또한 해결해야 합니다. 도덕상 가치의 문제가 사람에게 오는 것인데,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도덕상의 문제와 자기의 인생이 어떠한 가치를 결실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믿고 난 다음에는 이런 두 가지의 큰 사실이 늘 필요합니다. 안 믿는 사람에게도 이것은 있습니다. 즉 사람은 어떻게 바르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와 사람은 어떻게 효과 있게 의미있게 살아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문제는 도덕상의 문제 즉 선악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의 의와 불의, 즉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문제입니다. 둘째의 것은 단순한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의미 있는 가치를 산출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대할 때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성경 말씀이 가르치는 여러 가지 도덕적인 교훈을 따라 살려고 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도덕적인 교훈이 명령의 형식으로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라, 무엇을 하지 말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흔히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자기가 깨달음을 받아서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문제는 그런 것을 현재 자기의 차원에서 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아니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사소한 실천 사항이라고 할지라도 지금의 내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먼저 그것을 할 수 있는 차원에 확호하게 서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성신님을 의지해서만이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는 말씀이 있을 때 자기가 마음 가운데 열심히 해 보려고 시도는 할지언정 바로 그대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바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타락한 사람의 자연스런 심정이나 위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직 유치한 위치에 머물러 있어서는 도덕적인 명령도 정당하게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도덕상 문제는 새로 나면서 바로 행해여야 할 것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나면서부터 바로 행하여야 할 것들, 비록 그것이 굉장히 크고 높은 것이 아닐지라도 기본적인 도덕의 요구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살아라, 마음을 착하게 가져라, 겸손히 살아라, 말을 조심해라, 네 성격상 약점이 있다는 것을 늘 알아라, 자기는 잘못이 없는 것같이 스스로를 반성하지 않고 사는 생활을 하지 말아라, 이런 아주 기본적인 요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본적인 요구와 함께 고도의 도덕 생활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것이라도 성신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로 새로 났으면 우선 생명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어떻게 성경이 내게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더라도 그것이 그냥 평범한 도덕적 교훈에 그치지 않고 내게 생명의 양식이 되려면 성신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갓난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도의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2:1-2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홀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하려 함이라먼저 궤흘이 없이 도의 젖을 사모해야 합니다. 인간적인 여러 가지 꾀를 부리지 않고, 타협하지 않고, 잘못된 해석을 거기에 붙이지 않고, 너에게 명령하는 대로 순결하게 받아들여서 그것을 네 생활로 체현하도록 해라 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성신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자연적인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새로 태어난 새 생명에서 나오는 능력으로 하려면 성신님의 역사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함을 받았으면 벌써 믿음이 있는 것인데, 그렇다면 다음에는 그리스도인다운 덕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덕이 공급되어야 하고 덕에는 지식이 공급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덕이 있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하나님의 밀씀의 깊은 도리 가운데로 자꾸 더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생활에 있어서는 절제가 있어야 한다, 아무렇게라도 헤프게 살아서는 안 된다, 말도 헤프게 하면 안 되고 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은사와 은혜를 헤프게 써도 안 된다, 이런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절제 다음에는 인내가 있어야 하고, 인내 다음에는 경건, 경건에 형제 우애, 형제 우애에는 사랑을 공급하라고 했습니다. 이것들을 차례대로 가지라는게 아니라 다 함께 자꾸 공급하라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5-7에 있는 말씀들인데 정상적인 장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정상적으로 장성하기 위해서는 말씀이 도의 젖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젖이라는 말을 쓸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언제까지나 계속 젖만 먹고 단단한 음식을 못 먹으면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거룩한 도리의 초보에서만 머물러서 깊은 것을 모르는 사람을 육신에 속한 사람의 한 징표로 이야기하였습니다 (고전 3: 1). 물론 순수한 도의 젖을 사모하여 먹으라는 것은 막 새로 태어나서 장성해야 할 사람이 마땅히 먹어야 할 것을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어린아이같이 사욕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이 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기본적으로 그에게 주는 것들을 먼저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성신님을 의지하고 사는 도리를 알고 처음부터 의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반성하되 자기에게 잘못된 것이 있음을 모르고 어둠 속에서 사는 현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잘못된 것이 분명히 있는데 없는 것같이 여기고 사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잘못에 대해서 항상 반성하는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처음에 “비판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판을 하지 말라. 너희가 남을 비판하는 그 판단으로 하나님께 판단을 받을 것이다. 또 남을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도 헤아림을 받을 것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에 있는 들보는 못 보느냐”고 하셨습니다. 엄밀히 평가할 때 자기에게 아주 기초적인 중대한 결함들이 분명히 있는데도 그것은 도무지 볼줄 모르고 다른 사람의 티를 자꾸 헐뜯는다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여기서부터 고쳐 나가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사람의 기본적인 도리라고 하는 것을 원덕이라고 말하는데 과거에 위대한 스승들은 그것을 겸손이라고 하였습니다. 겸손이리는 것은 자기를 바로 볼 줄 아는 데서 시작합니다. 자기에게 잘못된 것, 비웃음 받을 만한 큰 결핍들이 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든지 오히려 자랑한다면 그것이 겸손과는 반대의 패덕입니다. 겸손은 그런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의 기본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렸다 하는 데 있습니다. 옛사람이 십자가에 달렸으면 그 다음에는 자기부인의 심정으로 들어 가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높다고 평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폄하해서 생각하는 것도 큰 잘못이지만, 자기를 자기 이상으로 높게 평가해서 생각하는 것도 큰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 생각은 이 세상에서도 도덕상 유치한 사람에게서 흔히 나타납니다. 도덕상 유치한 사람만 그런 것이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들도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성자라도 그것이 어느 때든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자기라는 것이 나오기 쉬운 것입니다.

먼저 인도를 받기에 합당한 자리에 서야 함

세상의 도덕에서도 인간관계를 할떼 항상 겸손히 자기를 낮추고 남을 높이서 말을 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비록 형식이지만 형식이라도 그렇게 해서 자기를 단속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런 단속조차 없느냐 하면 물론 있습니다. 자기를 자기 이상으로 생각지 말라는 말씀도 있고, 기본적인 원덕을 강조하여 말씀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덕을 가지고 자기를 정당하게 볼 때에 비로소 자기는 어디로 가야 하느냐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즉 “나는 어느 길로 가야 합니까?" 할 때 하나님께서 “너는 너를 어떻게 생각면서 어디로 가는지를 지금 생각하는가?" 하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은 것입니다. “너는 지금 너 자신을 너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느냐, 무엇을 해야 하느냐 하고 있는데, 너에게는 그렇게 할 능력도 없고 그럴 만한 위치에 서 있지도 않다.” 기본적으로 어떤 정당한 자리에 서야 비로소 인도를 받는 것인데 자기가 정당히 서야 할 곳에 서지 않고 높은 산꼭대기에 올라 앉아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것을 해야 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옳지 않은 것입니다.

주께서 내 길의 빛이 되고 내 발의 등불이 되려면 먼저 자기가 서있어야 할 자리에 이르러야 합니다. 자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지도 않은 사람에게라도 무조건 빛을 비추어 주시겠다고 하신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가치가 어떤지, 자기가 서 있는 위치의 잘잘못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에게 덮어놓고 등불이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겠는가? 할 때 먼저 나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를 제대로 바로 알라는 것입니다. “네가 대체 얼마만한 능력을 가진 자로 생각하느냐? 어느 정도의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냐? 얼마만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고 결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냐?" 능력이 없는데 능력 이상의 것을 항상 부허하게 바라고 있는 일이 많습니다. 그리고 능력 이상의 것을 하려고 하는 경향이 이 세상 사람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을 바라볼때 이런 능력이 자기에게 없다는 것을 알았을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러면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 1 :6-8).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의 능력이 아닌 새 사람의 능력으로 성신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구할 때 필요한 두 가지의 자격이 나타납니다. 첫째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 지혜를 하나님 앞에 구할 만한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구할 만한 믿음이란 구하면 반드시 주신다는 것을 믿고 안심하는 심정인 것입니다. 둘째는 나는 의지할 다른 것이 없이 완전히 배수진을 치고 서 있는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구해 보다 안 되면 요렇게라도 해야겠다 하는 것이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렇게라도를 가지고 있는것, 마지막 수단이라는 것을 어디다 가만히 숨겨 두고 그것이 별로 신통치 않으니까 여기서는 안 쓰고, 하나님 앞에 달리 구해 봤다가 아무리 구해도 주시지 않으면 요렇게라도 해야지 하는 그런 생각이 없어야 한다 말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상태로 지혜를 구하면 그것은 자격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무엇을 얻으려 생각하느냐? 이쪽으로 갔다 저쪽으로 갔다 하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인데, 그렇다면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구하면서 안 되면 자기 방법대로 가겠다는 식으로 어떤 것이 좀더 유리한가를 따진다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그런 조건을 명확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내 길의 빛이요 내 발의 등불로서 현실상 효과 있게 역사하려면 먼저 그러한 위치, 그런 자리에 내가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 높이 올라서 있거든 내려와서,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라는 것입니다. 기력이 없이 낮은 곳에 넘어져 있으면 거기서 올라와 서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혹시 자기를 자기 이상으로 생각했을 때에는, 나는 그것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 어떤 길을 보이시려고 할 때는, 그 길이 무엇이다, 왜 그렇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가 사람인 까닭에 , 하나님의 자녀인 까닭에 자녀답게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지, 눈 딱감고 있더라도 이리 가자 저리 가자 하고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본인의 이해라는 것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사람이 어떤 사실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기본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기본도 이해하지 못하고서 무엇을 하겠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직장에 다니는 어떤 사람이 만일 회사의 어떤 일를 맡아서 출장을 가려고 할 때는 먼저 출장 가는 그 일에 대해서 그가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해 오라는 것인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에 앞서 회사는 무엇 무엇이 있어서 이걸 하려고 하니까 어떤 것을 해 오라고 설명을 해 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이 하라고 그렇게 맹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계로 대접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기계의 부분품으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대접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라고 하면 당연히 하나님의 자녀다운 의식 활동이 있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자녀가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정당한 위치에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것들을 말씀에 의해서 깨닫고 알아야 합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약속과 말씀이 우리에게 알기를 원하시는 것들을 부지런히 알려고 않고 자꾸 무조건 자기의 길만 인도해 주십시오,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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