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24, 2011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2)

에베소서 4:11-24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구원 경륜의 목표로서의 교회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의 어떠한 개체나 단체보다 존귀하고 신성한 것이며 또 그만큼 영광스러운 것임을 늘 깨달아야 하며, 우리는 그 사실을 찾아보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큰 경륜의 순서대로 보면, 우리 개인 개인을 구원 하셔서 개인 개인의 운명과 장래를 결정하신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큰 내용에는 항상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서 그 신령한 몸이 완전해져서 마침내 이 우주의 영광의 충만을 가져온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그 충만한 영광의 위치에서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그 영광과 권위를 나타내도록 하신다는 것이지, 한 개인에게 큰 복을 주어서 무엇을 해 보시겠다고 하신 것이 아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궁극적인 목적은 완전하고, 흠이 없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의 참자태를 완성해 나가는데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에 있어서 궁극적인 목표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주 안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 안에 충만하게 될 그리스도의 영광은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함께 영광 가운데 있게 되리라는 사실이 중요한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는 자기가 완전히 독립한 한 개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물론 개인이라고 할지라도 철저히 고립되어 있는 개인은 될 수 없고 인류 사회라는 큰 테두리안에 사는 한 분자로서의 개인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속한 사회가 고통하면 함께 고통을 받고 그 사회가 풍요로우면 개인도 그 속에서 그 풍요를 같이 누릴수 있다는 전체에 대한 개체의 관계를 이 세상 사람일지라도 다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철저한 개인주의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개인이 자기만 어떻게 잘하면 자기 혼자 부요롭게 되고 평안하게 되고, 자기가 잘못하면 자기 혼자 고통을 당한다는 식으로, 늘 개인을 최종적인 단위로만 생각하는 사상은 원래가 잘못된 것입니다.

성경은 누누이 그것을 지적해서 가르쳤습니다. 가정이라는 사회는 가장 잘 집약된 조직 사회입니다. 가정 안에서는 하나님 앞에 징벌조차 함께 받도록 하셨습니다. 가장이 하나님 앞에 범죄할 때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까지 같이 무서운 진노를 당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개인주의적인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담에게 모든 인류의 언약의 머리로서 의미를 갖게 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생각해 보면 우리의 개인주의적인 생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알수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 앞에서 언약의 머리로서 어긴 범죄로 아담이 대표하고 있는 모든 인류가  다같이 정죄 된 것입니다. 전 인류가 함께 같은 정죄 가운데서 고통하게 된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치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불공평한 것인가? 거기에는 인류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이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개인을 최종의 대상으로 하여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의만를 주장한다면 결국 이 현실 사회에서 매일 경험하고 있는 사실조차도 무시하는 제 마음대로의 사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사회가 번영하면 함께 번영하고 사회가 고통을 당하면 함께 고통을 당한다는 당연한 현실을 부정하는 제 마음대로의 생각이며, 비현실적인 부정당한 사상이라고 말 할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의미
이 세상에의 현상에서도, 즉 하나님의 일반 질서안에서 조차도 그렇게 사고를 하는 것인데 하물며 구원의 경륜에서는 이일에 대하여 더욱 철저하고 바르게 생각해야 합니다. 구원의 사실은 정죄 받아서 저주 가운데 있는 인류의 사회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으로 선택한 사람들을 새로운 한 사회에다 옮겨 놓으신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 사회의 분자로서의 의미와 지금 새로 들어온 교회라는 거대한 유기체 안에 들어온 지체의 의미를 비교할 때, 세상 사회의 분자와는 비교할 수 없이 아주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의 몸이라는 사상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보통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듯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냥 모여 있으면 교회이고, 안 모여 있으면 교회가 아니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부정당한 것입니다. 교회라 할 때는 보편의 교회 혹은 본질의 교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는데 그 보이지 않는 교회가 어떤 형식을 취해서 땅 위에 보이는 현상으로 나타날 때 볼 수 있는 교회” (Church Visible)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한 볼 수 있는 교회가 하나의 사회 형태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거기에 반드시 교회의 속성들과 본질들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개혁교회가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 형식적인 면에서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 보았습니다. 참된 말씀의 전파와 성례의 바른 집행과 권징의 실시라는 것인데, 그러나 교회가 이런 보이는 조건만 다 갖추고 있으면 언제나 참된 교회라고 확실히 단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을 구분하려고 할 때 겉으로 드러난 형식적인 조건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옷을 입었다는 형식만으로 구분하려고 한다면 마네킹도 옷을 입고 있는 것이고, 또 왔다갔다 걸어다니고 말하고 웃는다는 형식으로 구분하려고 한다면 로보트도 말도 하고 걷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구분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아닌 것을 구분 하려면 그 속에 있는 영혼의 기능의 작용이라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영혼의 기능이 어떻게 활동하느냐? 그런 활동이 있는가 없는가를 가지고 따지는 것입니다. 웃든지, 울든지, 말하든지 생각하든지, 움직이든지 가만히 앉았든지 그것들은 모두 영혼의 기능들(soul faculties) 이 역사해서 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를 형식적인 면, 외부로 나타나는 사회적인 조건하에서 구분하는 것이 최종적인 판단은 아닙니다. 참된 교회와 아닌 것을 바르게 판단하려면 사람에게 있어서 영혼의 기능과 같은, 참된 교회의 속성이나 본질을 가지고 어떻게 다른지를 가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성경은 어떤 표상적인 용어들로 교회를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 둘째는 하나님의 집혹은 성전이라는 말, 셋째는 새 예루살렘또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말, 그 다음 넷째로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말로 교회를 표상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표상을 먼저 생각해 나가는 중입니다.

에베소서 1 :22-23을 보겠습니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결국 하나님의 경영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사 만물 안에서 그 영광이 충만한 데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고런도전서 12: 12-13절에도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지유자나 다 한 성신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신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그리고 27절에는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교회로서 그리스도의 몸이다 하는 말씀이 있는데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성립하는 것인가? 이것은 신자 개인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 안 되었다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를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속죄의 은혜를 주시고 새로운 생명을 주셨으면 그 새로운 생명의 연결 때문에 자연히 그리스도에게서 흐르는 그 생명으로 하나가 되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나무와 가지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은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의 몸 가운데 들어가고 싶다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사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의 한 부분이 되도록 생명으로 연결시켜 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에는 접붙임을 받았다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접붙임을 얻을 때 원래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그 성격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몸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덮어놓고 우리 교회는 한 단체가 되어서 한 몸이 되었습니다”라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있는 개체 하나 하나가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 부분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협동하고 단결을 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성신님으로 그 사람에게 새 생명을 내려주셔서 그리스도의 생명과 신으로 온전히 매도록 하시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도 가르치기를 “우리가 유대 사람이나 헬라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동일한 성신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신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성신을 마신다는 말은 상징적인 용어입니다. 성신이라는 말은 실체적인 용어로 쓰이기도 하고 상징적인 용어로 쓰이기도 합니다. “프뉴마라는 헬라어나, “루아흐라는 히브리 말이나 다 같이 바람이란 말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신으로 (혹은 바람으로)난 자 이와같다”  ( 3:8) 고 했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활동을 하시는 성신을 생각할 때는 그냥 바람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여기 보면 한 성신으로 즉 동일한 성신을 마시고, 또 한 성신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됐다고 했습니다. 그 성신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효를 입히셔서 이제 그리스도의 것으로 인치시고 새로운 생명을 그 속에 넣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성신의 세례라는 말의 뜻입니다.

지체의 역할은 새사람의 활동
어떤 사람들은 컵에다 물을 부어서 넘치는 것과 같이 성신이 충만하게 되어서 넘치는 것이 성신의 세례라고 했는데, 지금도 그와 같은 말을 그대로 따라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교리적으로 명확하게 볼 때 “우리가 다 한 성신으로 세례를 받았다” 하면 그것은 어떤 사람이 성신의 충만한 은사와 은혜를 받아서 가지고 있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신 충만은 모든 믿는 사람에게 다 같이 임해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물론 성신께서 그리스도의 신자 안에 늘 내주하시지만, 또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신의 충만함을 받으라” (에베소서 5:18) 하고 이야기해서 성신 충만이란 어떠한 특별한 시기, 일정한 어떤 경우에 발생하는 것으로서 모든 신자에게 항상 있는 상태는 아닙니다. 이렇게 성신의 세례성신 충만은 다른 의미로서 모든 신자가 다 성신 충만한 상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면 한 성신으로 벌써 역사함을 받아서 세례 주심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세례를 주었다는 말 즉 물로 부었다고 할 때에는 대체로 더러운 것을 씻어서 새로운 일을 하기에 적당하다는 상징으로 쓰는 것이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무엇보다도 이제부터는 무엇이다하는 것을 특별히 표시하고 있습니다. 즉 한 성신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 속한 자임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성신으로 말미암아서 새로운 생명이 그에게 있다, 그의 죄는 씻기었다, 속죄의 공효를 입었다 해서 그렇게 한 성신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성신께서 우리 속에 계속해서 역사 하시고 은혜를 주시기를 마치 공기를 마시고 사는 것과 같이 늘 성신과 접촉해서 살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성신으로 세례를 받고, 또 한 성신을 마시게 하셨다고 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의 지체의 각 부분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지체가 된다는 점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에 참여하고, 새사람으로 걸어가게 하시는 성화의 역사에 참여하는데 있습니다. 즉 속죄와 중생, 그리고 성화의 역사에 참여함으로 성신의 세례를 받고, 성신을 마시고 사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화(sanctification)의 길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완성할 수 없을지라도 일생 동안 자꾸 성화의 경지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공기를 늘 마시고 신선한 공기로 신진대사를 시키는 것 같이 늘 성신을 마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란 그런 사람들을 하나하나 그리스도에게 온전히 접붙여 주심으로 성립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성립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그리스도의 신령한 거룩한 몸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몸이라는 말이 그것을 표시하기에 적응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의 각 부분, 지체의 각 부분을 보면 우선 동일한 생명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별다른 생명이 따로따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내가 움직이고 있고 만일 내 몸속에서 다른 동물 하나가 움직인다면 그것은 별다른 생명이 서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손이 움직이고 내 발이 움직이고 내 머리가 움직이는 것은 동일한 생명, 하나의 생명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지체의 각 부분이라 할 때는 결국 그 머리가 존재한다는 사실, 또 한 생명이 손에도 발에도 다른 지체에도 함께 작용하고 지배하므로 움직인다는 것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표상을 사용해서 동일한 생명아래에서 움직인다는 것을 중요하게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요한일서 5:12에 기록되었습니다. 또 요한복음 10:28을 보면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것이요 또한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거기 있는 것을 가르쳤는데 영원한 생명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육신에 속하면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은 새사람으로 움직이지를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하던 아담적인 생명의 계승자로서의 자기, 즉 옛사람으로 그냥 행동한다면 의미 없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22-24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한 것에서도 보듯이 새사람으로 사는 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자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는 지위를 주셨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능력이 우리에게 계속적으로 공급되어서 지어 놓으신 내 속에 있는 새사람이 역사할 때에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작용을 제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참 교회를 나타내려고 한다면 새사람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이 완전히 일치해서 자연스럽게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가 명령하시고 주장하시는 대로 따라 다니면서 움직이는 것이 새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새사람이 나를 지배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 나 자신이라는 옛사람이 계속 살아 남아서 이 세상을 쫓고 자기가 무엇을 한번 해 보겠다고 자기 이상을 쫓아 나가면 절대로 새사람은 역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의 하는 것을 보니 썩어져 가는 구습, 부패한 이 세상과 그런 옛날의 습관 그대로 하는구나. 그 유혹의 욕심을 따라서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것이 옛사람이다. 이제는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서 성신의 그 성화하시는 큰 능력 가운데서 새로 주신 새사람이 너에게 역사 하도록 하라.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이 활동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서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이것이 새사람입니다. 새사람이라는 말이 골로새서 3:10에도 있습니다.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라. 너희가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쫓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창조하신 자의 형상이 곧 너에게 있는 새사람이다,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양은 바로 네게 있는 새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내 속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역사한다는 것은 내 속에 있는 새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신, 성신님이 늘 충만히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은 그 몸의
지체로서의 본분을 나타내는 것이고 지체로서의 그리스도의 생명을 또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생명의 연결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여있다는 형식만 가지고 저절로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회적인 형식에서 볼 때에도 말씀의 전파와 성례의 집행과 권징의 요소가 거기에 꼭 있어야 하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자격과 영광과 능력을 발휘해야 거기에서 지체로서의 존재를 인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고 유혹의 욕심을 쫓아다니는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종교의 욕심도 또한 유혹의 욕심인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종교욕이라는 것도 적지않게 큰 욕심으로 작용합니다. 자기가 아는 종교를 열심히 신봉하면서 왕성하게 해 보려고 하는 열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적인 열정에 의해서 기독교를 이룩해 나가려고 하는 것은 옛사람적인 욕망에 의해서 하는 것입니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어 주를 섬기라” ( 12:11) 했지만, 거기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하라는 것은 새사람의 중요한 덕으로서 이야기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하기만 하면 그것이 곧 새사람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른 세상의 종교도 어떤 규율을 엄격하게 잘 지켜기려면 게을러 가지고는 못합니다. 모하메드 교도들 보세요. 그들은 시간이 되면 장소를 불구하고 땅에 엎드려서 절하는데 그것이 보통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만큼 거기에 열정적으로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연결 되어있다는 것은 이론만이 아니고 그의 존재의 위치의 기본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로부터 새로 난 사람입니다. 혈기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생각으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 아들을 믿는 사람이고 따라서 새로운 생명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존재의 위치가 그렇다는 것 뿐입니다. 그 생명이 땅위에서 정상적으로 활동을 해서 열매를 거두려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고는 절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일체적으로 연결돼 있어야만 합니다.

단순히 생명이 그에게로 왔다 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의 거룩한 명령과 정신이 결국 그를 지배해서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자기의 손발이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자꾸 움직이면 그것은 이상한 현상입니다. 무슨 의미가 있게 움직이려고 한다면 머리에서 명령하는 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손과 발이 다 합쳐서 머리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만일 손이 동쪽으로 가기를 원하고 그렇게 명령을 받아서 가는데 발은 도무지 동쪽으로 가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면 비정상적인 상태입니다.

교회란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명령과 지시와 인도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러려면 새사람적인 성격이 거기에 명확하게 또 충분히 나타나야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사역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거룩한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오는 새사람으로서의 생각이나 사상도 없이 그냥 교회에 와서 예배드린다고 모여 있다면 그것이 절대로 바른 자세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의 임무를 제대로 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를 드리려고 모인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임무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런 형식을 취하는 것만 가지고 지체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옛사람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도 예배를 형식으로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체로서 교회를 증명할 수 있는 최초의 행동이면서 그 구성원의 최초의 의무라고 할 만한 것은 결국 교회의 모임입니다. 그 모임에 오면 기독교이니까 기독교적인 의식을 집행하는데 그것이 예배입니다. 어떤 사회 단체든지 단체로 조직되어서 모이면 그 단체를 스스로 증명하는 행동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종교가 규정한 대로 하는 것입니다. 모하메드교도, 힌두교도, 불교도들이 모이면 다 자기네의 필요에 따라서 제정한 대로 자기네 종교 의식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교회에 모여서 예배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교회가 각 지체로서 자기 임무를 충실히 다 감당한 것인가? 그렇게 간단하게 결론을 못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러 규정된 날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이 새사람으로서 자의식을 가지고 움직일 때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새사람만이 모이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으로도 모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형식만 가지고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다는 증명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옛사람, 새사람, 심지어 그 중에는 가라지도 있습니다. 옛사람인가 새사람인가? 가라지인가 진짜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라 할 때에 그 지체의 참된 열매와 증명이 무엇이겠는가를 더 찾아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연결이라는 것은 아주 기본적으로 중요한 사실입니다.

지체에는 그에 따른 은사가 있음
새사람으로 활동을 하려고 할 때 생명의 연결이라는 기본적인 사실과 더불어 또 하나 지체로서 각각 은사가 있다는 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로마서 12:4-8 에 볼 것 같으면, 지체 각각에게 은사를 주셔서 그 은사에 의해서 각자는 교회 안에서 자기가 맡은 부분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각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한 다음,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이면 가르치는 일로 권위하는 자이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지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또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이렇게 각각 은사에 있어서 교회 안에서 그 은사가 조화 있게 봉사해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사람들을 세우셔서 각각 그 받은 바 은사대로 하나님 앞에 진실히 활동하게 하신 것인데, 이런 것들을 하려면 사랑 안에서 기본적인 덕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에베소서 4:11-12에도 교회 안에 사람을 세우되 혹은 사도로 세우시고, 혹은 선지자로 세우고, 혹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고, 혹은 목사로도 세우고, 교사로도 세웠는데, 이렇게 한 것은 성도의 생활을 결핍됨이 없이 온전케 하려고 그런 것이고, 봉사의 일을 하게 하려는 것이고, 또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말한 것은 주로 교회의 직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도, 예언자 즉 선지자 혹은 복음 전하는 사람, 목사나 교사가 다 특별히 교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로마서 12장의 말씀은 교직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각각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였습니다. 각 지체는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다른데, 예언하는 사람 즉 하나님 말씀을 맡아서 가르치는 사람도 있지만 섬기는 사람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섬기는 일이야 저마다 하는 일입니다. 섬기는 자는 섬기는 일을 각각 자기가 받은 은사대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남을 권고하기도 하고 위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권위한는 일은 반드시 교사라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구제하는 일은 성실함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성실한 마음으로 할 사람이 구제를 하는 것이지, 구제하는 사람 따로 있고 다른 사람은 하지 않는다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또 긍휼을 베푸는 자는 기쁨으로 할 것인데 이런 것들은 다 교인들이 저마다 받은 바 은사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하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에 거짓이 없는 사랑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저마다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고 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겨라교회에서 가져야 할 이와 같은 원덕을 성신의 충만함을 받아서 바로 드러내야 비로소 지체로서의 자격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말로만 지체라 하고 실제로는 가라지인지 진짜 지체인지 알 수가 없는 위치에만 있다면,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는 증거자로서의 의미는 못 가지는 것입니다. 땅 위에서 교회로서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항상 성신의 충만함을 받아서 신령한 생활을 해야만 새사람이 늘 나타나는 것이고, 그렇게 새사람이 나타나야만 자연스럽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호흡하고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있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주의해야 합니다. 그런 구체적인 조건들이 드러날 때 비로소 교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Friday, December 23, 2011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1)


로마서 12:1-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교회관의 난맥상
우리가 참 교회의 자태를 바로 보존하고 늘 증시하며 살아 가려면 구원의 도리가 정당해야 할 뿐 아니라, 그 구원하신 내용의 여러가지 은혜와 하나님의 경영을 잘 깨달아서 주께서 오늘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고 살아나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맹목적으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에서 살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볼 때에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교회라고 칭하는 많은 종교 단체의 활동이 있고, 또 거기서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 분명히 알고 느끼듯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고 사는 많은 사람이 실제로는 기독교인으로 볼 수 없는 경우가 흔합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정당한 표준으로 판단해 볼 때 확실히 구원과는 상관이 없으면서, 다만 기독교의 문화나 종교적인 색채와 관계되어 있다고 해서 스스로 기독교인으로 자처하고 기독교적인 활동을 추구하면서 대외적으로 발표하고 나가려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정당한 교회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로 잘 깨닫지 아니하고서 어떤 전통이나 습관에 의해서 교회관을 형성하고, 이런 것이 교회라고 생각하고 그런것에 어울리는 생활 행동을 할 때에는 참으로 그릇된 데로 빠져 들어가기가 심히 쉬운 것입니다. 잘못된 일을 하고도 잘못된 것인 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을 우리가 실례로 지금 많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참된 도리는 무엇이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의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무엇이며, 무엇이 참된 구원이고, 무엇이 중생이며, 무엇이 새사람이고, 또 무엇이 그리스도의 속죄이며, 영광의 내용인가를 정당하게 알아서 비슷하나 절대로 아닌, 소위 사이비라는 것을 분간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그런 분별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교회이고, 무엇이 교회 아닌가를 모르고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아주 거친 의견,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비판을 거치지 않은 제멋대로의 전통이나 특수한 환경에 의해서 형성된 그런 생각을 가지고 교회라고 하면서 그렇게 모여서 조직하고 활동을 한다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릇된 신학이 참된 신학이 되지 아니하고, 그릇된 교리가 구원의 도리가 되지 못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비슷하고 그럴듯하게 하나의 종교 철학으로서의 교회관을 말할지라도 그런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가 아닌 것을 이 세대에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속죄, 십자가, 부활, 그로 말미암은 새로운 생명, 성화와 같은 구원관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경영하신 가장 영광스러운 실체인 참 교회는 어떤 것이고, 그렇지 아니한 것은 어떠한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오늘날 시대와 같이 배교의 세력이 큰 성격으로 역사속에서 드러날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거센 물결에 끌려 들어가기가 쉽습니다. 본인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지만 배교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됩니다. 더구나 그런 아무런 훈련이 없는 사람들이 교사가 없고 정당하게 가르치는 도리가 없는 세계에 들어가면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참으로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참된 교회관이 바로 정립되지 않아서 여러가지로 교회가 무엇이 바르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해 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사 시대에 사람들이 바른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 제각기 자기 좋은 대로 했다는 말씀처럼 다만 어떤 종교적인 형식을 가지면 교회가 되는 것으로 자기 좋은 대로 생각하는 까닭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몇 사람이 모여서 예배라는 형식을 취하면 그것이 교회다 하는 생각을 가지는 까닭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라는 대로 차례차례 교회의 확실한 모습를 드러내야 하겠지만 그것도 하나하나 다 근거 있게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근거 없이 남이 그러니까 나도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이 세대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형식이나 우리의 활동하는 것이나 우리의 방향이나 우리의 노선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증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배교의 도도한 물결이 창수와 같이 휩쓰는 때에 튼튼히 서 있는 반석 위에 세운 교회가 되려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형식상 조건들
개혁교회가 형식상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을 구분 할때에 신학상 적어도 세 가지 요소를 생각해 왔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설교(Preach)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강단(Pulpit)이 있어야 하고,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단에서는 말씀이 정당하게 가르쳐지고 해명되어 나가야 합니다. The true preaching of the Word of God , 이것을 첫째 요건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 말씀이 말씀대로 바르게 설교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 해도 형식상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말씀을 보이는 형식으로 제공하는 성례(세례와 성찬)를 바르게 집행하는 일입니다. 보이는 형식으로 제공하려면 받는 사람이 있고, 주는 사람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서 교회에 전달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개혁교회는 이 일을 집행할때 반드시 그 일을 위하여 준비하고 훈련된 사람이 하도록 하였습니다. 일반 교우 아무라도 할 수 있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의 요소라는 것을 형식상으로도 확립해 놓은 것입니다. 성례를 집행할 때 교회적인 행사로, 교회적인 권위로, 또 교회적인 권위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례를 집행할 때에는 사석에서 몇 사람이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회적인 의미를 가진 집회를 열어서 성례를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세번째는 권징(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을 신실히 행한다는 것을 개혁교회는 중요한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권징이라는 것을 희미하게 생각했지만, 개혁교회의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절대로 그것을 소홀히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순결을 위해서 그랬습니다. 불순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점점 혼탁하게 하는 악한 요소를 그냥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예를들어 사람의 몸에 병이 났다고 해서 매번 대수술을 하여 어떤 부분을 잘라 내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번 회개를 요구하는 것이고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잘못이 있을 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자기 개인뿐 아니라 교회 앞에서, 교회의 지체로서 하나님 앞에 거룩한 교통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끝까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할 수 없이 최악의 경우에는 자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순결을 늘 보존하기 위해서 그렇게 엄격하게 행정적인 조치, 법적인 조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권징을 할 수 있는 권위를 공동으로 승인하고, 그런 권위하에 있어야만 교회가 된다는 것을 개혁교회는 과거에 늘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런 점이 아주 느슨해져서 어떤 경우에는 아예 시행 되지 않을 뿐더러 현실적으로 시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결국 교회의 권위가 없어져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린다는 표징이 사라진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표상적인 가르침
이제 좀더 본질적인 문제로 들어가서 교회란 무엇인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성경이 가르친 교회란 무엇인가를 형식적인 면에서가 아니고 그 본질, 지니고 있는 속성들을 가지고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교회라는 것이 신비하고 심오한 거룩한 실체임을 사람들로 하여금 바로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문학적인 여러 가지 수사학적 양식 (Rhetoric Style)을 써서 교회에 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비유를 베풀 때에 표상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표상들(Figures)을 사용해 가지고 교회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를 말할 때 그리스도 이전에 있던 교회를 가리킬 때 구약의 교회란 말로도 쓰고 구약의 오이코노미아라고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충만한 계시로서 임하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교회의 내용이 물론 과거에 있던 교회와는 다른 전연 새로운 실체는 아닙니다.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교회를 계승하는 것이지만 계시 발전의 역사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신약 교회에서는 좀더 충만한 계시로 본질적인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과거의 많은 표상, 그리고 손으로 잡을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물질적인 사실로써 보이시던 여러 가지 현상을 이제 신약 교회에서는 좀더 심오하고 좀더 본질적이며 신령한 내용으로 보이십니다. 그러나 그 신령한 내용을 파악 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므로 다시 어떤 표상을 써서 깨달으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런 것을 과거의 개혁교회가 신학상 네 가지로 나누어서 가르쳤습니다. 여러 가지가 성경에 나오지만 가장 종합적으로 중요하게 쓰는 표상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라는 말로 표시하였습니다. 둘째는 교회는 성전이다, 또는 하나님의 집이다 하는 표상이고 셋째는 하늘의 예루살렘’ 또는 새 예루살렘이라고 했고 넷째로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것을 이러한 표상들로 바로 깨달아 알도록 가르치셨다면, 우리는 사전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교회는 이것이다 하고 정의하지 않고, 왜 하필 그 표상을 사용하신 것에 대하여 하나하나 주의해서 배우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수사적인 표현을 쓸 때는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수사학적으로 어떤 표상을 쓰는 것은 실체의 어떤 부분을 구체적으로 표시하는데 유리하고 편리하니까 쓰는데 특별히 그것을 바로 파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말씀을 씨라는 것으로 비교하는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 누가복음에서는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면 왜 하필 하나님의 말씀을 씨라는 말로 표시 했는가? 씨의 어떠한 속성이 거기에 해당하느냐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씨라고 했으니 덮어놓고 씨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작용이 꼭 하나님 말씀의 작용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 큰 잘못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표상에 대하여 너무나 지나친 해석을 해서 잘못되기가 쉬운데 그런 일이 적지않게 발생합니다. 우리가 그런 점을 소홀히 생각지 말고 주의해야 합니다. 반면에 참으로 성신의 거룩한 조명과 지혜와 많은 경험과 풍성한 지식을 가지고 표상을 바로 해석하는 사람이 또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수사학적인 표현를 해석하든지 어떤 표상을 해석하든지 그것을 해석할 때는 그 자체가 의미하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서 다른 것를 거기다 붙이면 안 됩니다. 즉 그 표상이 가지고 있는 다른 속성까지 다 갖다 붙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만일 어떤 하나의 표상이 비유적으로 쓰였으면 그 한계 안에서만 해석을 해야지 비유를 풍유처럼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표상적인 표현을 해석할 때 주의 할 점
풍유라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쓸 때 다소간 자연성이 떨어지고 무리가 되는 보조 관념을 써서라도 그 실체의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풍유를 보면 짐승이 사람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추상적인 관념, 가령 진리, 사랑, 은혜의 구원, 나태함 등 선덕이든 악덕이든 그런 추상적인 덕을 하나의 인격체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풍유 곧 Allegory입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비유를 비유로 생각하지 않고 풍유로 해석하면, 그 표상이 나타내려고 하는 진리는 파악하지 못하고 표상이 의도하지 않고, 그 표상에서 의미 하지도 않는 다른 속성들을 말하기가 쉽습니다.

또 하나의 예로 은유 (Metaphor)라는 것이 있는데, 실체적인 선언과 상징적인 선언을 합쳐 놓은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어떤 사람이 발명을 잘할 때, 그를 위대한 발명을 잘한 대표적인 인물이 에디슨 (Thomas Alva Edison) 이라고 해서 “이 사람은 한국의 에디슨이다’ 하는 말로 표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실제의 에디슨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것을 가리켜 은유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에디슨이라는 것은 어떤 점에서 그런가 할때 에디슨이 가지고 있는 뚜렷한 특색, 발명을 많이 했다는 것 하나를 표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에디슨이 발명하다가 곤하면 자기가 앉아서 일하는 실험실 책상 위에다 큰 사전 하나를 놓고 책상 위에 그냥 누워서 잤다. 저 사람도 그렇게 누워서 잘 자니까 그도 한국의 에디슨이다 한다면 영뚱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또 “에디슨은 자기 생일이 되면 헨리 포드(Henry Ford)하고 둘이서 자동차를 타고 하루 종일 둘이 드라이브하면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사람도 생일날이 되면 자동차 타고 하루 종일 드라이브하면서 이야기하니까 그도 한국의 에디슨이다 한다면 그런 이야기는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론 에디슨이 한 일이고 에디슨을 표시할 수 있는 특색이겠지만 그런 것을 들어서 에디슨이라고 한다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씨가 무엇을 표상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만일 씨를 생각 할때 씨는 자체 안에 생명력이 있어서 땅에 심으면 그 생명이 발휘되어 나간다. 그처럼 하나님 말씀은 자체 안에 생명력이 있어서 그것이 사람의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생명의 작동을 한다고 해석하면 그것은 절대로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관이 아닙니다.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는 말씀 자체에 생명력이 있어서 그것이 어디에 들어가든지 반드시 그 속에서 역사해서 무슨 작용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복음의 말씀이 누구한테든 들어가기만 하면 반드시 다 예수 믿는다고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신님이 말씀과 함께”(Cum Verbo) 역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나타냅니다. 이런 말씀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이 비유를 들어서 말씀이 씨라면, 어떻게 씨가 무슨 특별한 외부의 작용이 있어야만 씨로서 생명력을 발휘하는가? 라고 반문한다면 그것은 바르게 비유를 생각하지 못한 결과인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많은 표상적인 표현을 해석할 때 그 표상 안에서 의미하지 않는 것들을 자꾸 갖다가 붙이고 또 붙이면 그것이 풍유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해석 할때 몸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 때때로 감기도 걸리고 가렵기도 한 것을 가지고 이렇게 가려운 것은 무엇이다 하는 식으로 해석하기로 한다면 그것은 엉뚱한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는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가를 바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표현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늘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에 우리 마음대로 상상해서 짐작하면 안 됩니다. 성경의 보증(Biblical Warrant)이 해 주는 사실이 없다면 그것은 곧 자기 마음대로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표현을 쓰기 전후에 항상  몸이라는 말을  이해 할 수 있도록 지시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문맥을 따라서 읽으면 왜 몸이라는고 했는지를 느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한 표상에 들어 있는 어떤 현저한 속성이라도 어느 때는 성경의 보증이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을 알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소금의 속성만을 생각한다면 짠 맛을 낸다는 것과 냉장고가 없었던 옛날에는 생선을 소금에 절여서 썩지 않도록하는 방부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소금의 속성을 화학적으로 분석을 한다면 여러가지 속성이 더 있겠지요. 그러면 여기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할때 너희는 세상에 맛을 내는 존재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너희는 세상에 들어가서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을 해라소금이 방부제 역할을 하려면 녹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에서 희생을 해야한다.  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게 됩니다. 두가지 해석이 다 맞는 것일까? 아니면 그 중 하나일까? 아니면 둘 다 틀린 해석인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 본문을 자세히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단히 설명한다면, 정당한 해석은 소금의 짠맛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맛 즉 팔복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생명의 품성을 드러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문맥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이라 할 때 춧불을 켜 놓으면 초가 자꾸 타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냐? 그처럼 자기 희생이 계속 되어야만 빛이 더 밝아지는 것이다”라고 해석해서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 많습니다. 만일 이런식 해석을 한다면 아무것이라도 다 갖다가 붙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이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져서 귀에 걸면 귀거리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주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몸과 많은 지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에 그 앞뒤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왜 썼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 로마서 12:4을 보더라도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해서 몸과 지체의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이 구절에서 당장 몸이라는 말을 무엇으로 먼저 해석을 해야 하고 생각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여기에 나타납니다. 한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으니까 지체와 몸의 관계에서 몸이라는 말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는 것처럼 교회도 많은 지체가 있으나 한 몸이다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그리고 나서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은 아니니” 했는데 이것이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한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다 그 많은 부분들이 모두 동일한 직분으로 같은 일을 하고있다”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지만 지체는 다 같은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 각각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점에서 우리가 주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있고, 그 다음에 서로가 지체라는 것이며, 그 지체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을 설명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지체는 각각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이렇다. 예언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예언하는 일을 해야 하고, 섬기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섬기는 일로써, 한 몸의 지체로서 자기 직분을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가르치는 자라면 그 사람은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한다. 권위하는 자이면 권고하고 위로하는 일을 할 것이고, 구제하는 자는 성실하게 또 그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또 교회의 치리자로 임명을 받아서 교회 일을 돌아볼 때는 그냥 게을러 가지고 자기가 시간이 있고 여유가 있으면 조금씩 가외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해야 할 것이다. 지체들 각각은 자기가 받은 은사의 부분을 행하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할 것이고, 긍홀을 베푸는 자, 특히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마지못해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결과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사랑의 일인데, 이런 사랑을 행할 때 거짓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부드러운 체하고 속으로는 항상 다른 마음을 품는 짓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중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악한 일이니 너희들은 항상 성품상으로도 악을 미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지체로서 자기 직분을 하려면 이런 되덕인 위치, 그의 차원과 성품이 바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을 할 때 성품은 어떻든지 덮어놓고 지체의 일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각각 지체로서 자기 본분을 다한다는 것은 일을 많이 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성격을 구성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지체이면 먼저 도덕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것 없이 큰 일을 하면 무엇이 되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사랑이란 말을 사용해서 단번에 종합적인 도덕으로서의 사랑을 하되 거짓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 품성은 선인데 악을 미워하고 그 선에 속하라 하였습니다. 또 형제를 사랑하되 사랑을 할 때에는 개인 개인 그 인격을 사랑하리는 것입니다. 지체의 일만 하면 저절로 사랑이 다 되는 줄로 알지 말고, 네가 한 교회 안에서 서로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에 대하여 내가 구체적으로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고 그냥 겉으로만 위장하고 살아가는가를 마음 가운데 깊이 반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도덕적인 품성이 성장해야 교회의 본질도 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종교 단체의 하나로 모여서, 무슨 종교적인 일을 한다고 왔다갔다 해 보아도 교회로서의 성격을 제대로 나타내거나 발전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덩치만 큰 사람, 몸이 굉장히 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렇게 아주 큰 거인이면 그가 위대한 사람입니까? 그럴 턱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는 먹어서 한 스무 살 먹은 만큼 키는 큰데 속은 열 살 먹은 아이 정도라면 그를 가리켜 충분한 사람,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형식을 꾸미고 종교 단체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크게 꾸며 놓았으나 그 속에 본질이 아주 빈곤하면 교회로서 무슨 의미를 가지겠는가? 그런데에서 어떻게 교회의 샘플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몸만 큰 사람에게서 정상한 사람의 샘플을 못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를 크게 만들면 그것을 모두 교회의 샘플인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런 발상법이 정당한가?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관인가? 이런 생각이 너무 보편적이어서 오늘날 교회의 타락이 심하게 드러나는 현실을 주의하자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라고 해서 아주 좀더 구체적인 말로 자꾸 들어갑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막연하게 지내지 말고 서로 만나면 우애를 표시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우애하고 또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그러려면 마음 기운데 존경이 있어야지 남을 무시하고, 미워하고 자기 자랑을 하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을 형성하는 요소들입니다. 교회를 형성하는 지체로서의 능력을 나타낼 때에 그 저변에 있어야 할 개인 개인의 도덕적인 성격을 먼저 규정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길 때 부지런하게 섬기라 하였습니다. 자기 일에만 몰두해 가지고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대와 같은 고도 사회의 산업 구조 안에서는 자기 생활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회사에서 근무한다고 할 때 회사가 요구하는 대로 다 일해 주고 나면 실제로 돌아와서 쓸 수 있는 자기 시간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이런 산업 구조 안에서 살면서 부지런히 주를 섬기겠다고 하면, 자기에게 있는 나머지 모든 시간을 다 사용해도 부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게을리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서 주를 섬겨라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주를 섬기는 도리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없을 때는 omission 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은 commit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Do not commit robbery”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그것은 큰 죄인 줄 알면서, 사랑하라 했고, 우애하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그래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크게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때에, 첫째 이 몸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고, 그 지체는 각각 다 다른 일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을 통해서 필연적으로 당연한 공리(axiom)로서 알아들어야 할 것은, 그 한 몸이 동일한 명령 계통 안에서 같은 힘을 공급 받아서 일을 한다는 사실입니다명령하는 본위가 없이 제멋대로 움직여 나간다면 어떻게 지체들이 조화 있는 임무를 이루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체란 말을 썼을 때에는 거기에 충분한 harmony를 생각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손은 손대로 제 할 일을 하려 하고 발은 발대로 제 길을 가겠다고 제각기 고집한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목적 의식과 동일한 생명 안에서 늘 조화롭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Wednesday, December 21, 2011

다윗 언약


톨레미는 지구를 온 우주의 중심으로 보았고,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을 중심으로 보았고, 아인슈타인은 어디나 중심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우주의 중심을 어디에 두고 볼 것인가 하는 것은 한 사람과 문화의 세계관에 있어서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우주에 중심이 있듯이, 성경에도 중심이 있다. 학자들은 다양한 주제들을 각각 중심으로 세워 성경의 세계를 재구성해 보고자 하였다. 그것들 가운데 언약은 전통적으로 신구약 성경의 중심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우리는 ‘옛 언약’ 으로서의 구약과 ‘새 언약’ 으로서의 신약을 말하게 되었다.

언약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 개념중 하나이다. 언약이 성경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것은, 언약을 중심으로 구약과 신약이 통일성을 이루며, 두 시대에 있어서 구원의 방법이 동일함을 의미한다. 언약이 성경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놓치면, 우리는 성경의 중심을 잃고 한 쪽으로 치우쳐, 자칫 율법주의나 반율법주의, 신비주의나 이성주의, 사제주의나 은사주의 등 온갖 종류의 불건전한 신학사상에 빠지게 될 우려가 있다. 언약을 성경의 중심에 둔다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경을 문화인류학적으로나 종교사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모범적으로나 철학적-사색적-조직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역사의 관점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1. 구약성경 속에서 사무엘하 7장의 위치
언약을 성경의 중심에 두고 구속사적 관점에서 성경을 볼 때, 사무엘하 7장은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언약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다윗 왕조의 언약’은 ‘모든 질서의 시작에 관한 언약을 담고 있는 창조 언약’( 1~2), ‘창조 질서의 보존을 약속한 노아 언약’( 8:20~17), ‘후손과 땅을 약속한 아브라함언약’( 15:1~21), ‘계명의 언약인 시내산 언약’( 19~24)과 밀접하게 이어지며, 나아가 구약에서 마지막으로 구원사의 완성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여 주신 ‘새 언약’( 31:31~34)으로 나아가는 주요 발판이 되기 때문이다.

다윗 언약이 창조 언약과 이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돌보고 다스리는 권세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아담에게 주셨으나,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통치자들이 하나님의 왕권을 올바로 행사하지 못했기 때문에, 새 아담인 다윗에게 하나님은 자신의 왕권을 이제 위임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어 다스리게 하셨기 때문이다( 8, 72).

다윗 언약이 보존언약인 노아 언약과 이어지는 것은, 인간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총이 계속되는 ‘무조건성’이 다윗 언약에서 ‘징계에도 불구하고 언약이 지속되는 무조건성’으로 이어질 뿐 아니라(삼하 7:14),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전하시는 방편이 장차 오는 다윗 왕권을 통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사야가 바라본 다윗의 후손 메시아 왕은 온 우주에 참된 평화와 질서를 가져오는 분으로 그려지고 있다( 11:1~9).

다윗 언약이 약속의 언약인 아브라함 언약과 이어진 것은, 두 언약이 모두 ‘은혜 언약’으로서 중심 성격을 띨 뿐 아니라, 두 언약이 항상 언약의 당사자에게 ‘믿음’을 요청하고 있으며( 15:6; 7:9), 아브라함 언약의 중심 약속을 이루는 ‘후손’과 ‘땅’이 다윗 언약에서 ‘후손’과 ‘보좌’와 ‘땅’( 2:8)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모세의 시내산 언약을 ‘계명 언약’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이 언약에서 하나님의 계명이 두드러지게 강조되기 때문이며, “계명을 지켜야 구원을 얻는다”는 뜻으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이것을 ‘율법 언약’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은 것은 ‘율법’이 ‘계명’보다 더 큰 범주를 이루지만, 신약성경이 강도 높게 비판하는 ‘율법주의’라는 암시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로 시작되었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은 후, 하나님의 백성의 도리를 따라 살도록 율법과 계명을 선물로 주신 언약이었으므로 기본적으로 ‘은혜 언약’의 틀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시내산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의 큰 틀 속에서, 이제 아브라함의 후손이 나라와 백성을 이룬 후,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내용에 관한 법도와 계명들이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시내산 언약에서 그들은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왕권을 받아들였으며, 하나님을 섬기기로 헌신하였다( 19:8).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왕과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공식적이고, 자발적인 관계가 세워진 것이다


이제 시내산 언약의 큰 틀 속에서 다윗 언약이 주어진다. 즉 다윗 언약은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의 틀 속에서 다윗의 왕권을 중심으로 움직여지는 언약의 체계이다. 달리 말하자면, 다윗 언약은 이전 언약을 폐기하지 않으며, 강화시키고 있다. 특히 이 언약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왕권을 다윗에게 위임하셔서, 다윗 왕을 통한 통치를 시작하셨다. 이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다윗에게 순종하는 것이며, 다윗을 거스르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 되었다. 다윗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율법 아래에 있었으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모범을 보여야 했다.

불행하게도 다윗 언약은 다윗 후손들의 범죄와 연약함으로 하나님께서 원래 목적하신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윗 왕조는 파산하며, 성전은 무너지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우리의 마음을 말씀과 성령으로 새롭게 하시는 새 언약의 은총을 바라보게 되었다.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주된 언약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루는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통일성을 이루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사의 완성을 이루어 가는 주된 과정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무엘하 7장은 단지 이스라엘 왕국사에서 역사의 한 단면만을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 전체의 맥을 이루는 중요한 장으로 자리잡고 있다.

2. 사무엘서에서 사무엘하 7장의 위치
뿐만 아니라, 사무엘하 7장은 사무엘상하에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다. 사무엘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사시대가 끝나고, 왕정시대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시작되어, 다윗 왕조가 완전히 자리를 잡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특히 본서는 “한나의 기도”로 시작하고(삼상 2), “다윗의 기도”로 마치는(삼하 23) 수미일치의 형식으로 짜여져 있다.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이 세우신 왕’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를 바라보고 있는데(삼상 2:10), 다윗은 그의 유언에서 자신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이며(삼하 23:1),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웠다고 고백한다


사무엘상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바라보며, 사무엘하는 그 사람이 바로 다윗임을 증거해 준다. 이 중앙에 고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이다. 물론 다윗 언약은 사무엘서로 끝나지 않고 열왕기서로 이어진다. 다윗은 임종 직전에,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그가 여전히 ‘모세 언약’ 아래에 있음과(왕하 2:3), 그가 다윗 언약의 당사자로서 ‘왕조’와 ‘후손’의 약속을 갖고 있음을 말해준다(왕하 2:4). 열왕기서에서 다윗의 후손은 계속 하나님 앞에 실패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위하여 등불을 끄지 아니하시고 있음’을 열왕기서 저자는 언급함으로써, 다윗 언약이 계속 효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증거해 간다. 그는 끝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의 석방’을 다룸으로써, 다윗 언약의 약속이 새롭게 이루어질 것을 희망하고 있다(왕하 25:27~30).

3. 사무엘하 7장의 내용
사무엘하 7장의 인접 문맥을 살펴보면, 다윗은 이제 통일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삼하5). 왕으로서 다윗은 무엇보다도 먼저 아비나답의 집에 수십 년 동안 방치된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와,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신앙의 구심점으로 만들며, 장차 시온신학의 발판을 만들었다(삼하 6). 이런 배경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안치할 수 있는 ‘성전’을 짓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며, 자신의 뜻을 선지자 나단에게 전한다(삼하 7:1-2). 고대 근동아시아의 여러 왕들이 왕권을 확립한 후에 성전을 세우는 관습을 생각해 본다면, 다윗의 뜻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하나님의 법궤를 안치할 성전을 지을 것에 대해 꿈에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다윗의 소원은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는 특히 자신이 ‘백향목 궁’에 살지만,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다’는 점에 대해 부담감을 가진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에 대해 특별한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점에 대해 시편 132 1~5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근심한 것을 기억하소서
그가 여호와께 맹세하며 야곱의 전능자에게 서원하기를
내가 실로 나의 거하는 장막에 들어가지 아니하며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하며 
내 눈으로 잠들게 아니하며 
내 눈꺼풀로 졸게 아니하기를
여호와의 처소 곧 야곱의 전능자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 하였나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집’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집’을 짓고자 하는 소원을 나단에게 말한다. 그때 나단은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라며, 크게 기뻐하였다(삼하 7:3).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의 종 선지자 나단과 달랐다. 하나님께서는 나단을 통하여 “너가 나를 위하여 나의 집을 세우겠느냐 아니라 내가 너를 위하여 너의 집을 세우리라”는 왕조 창건의 신탁을 주셨다. 이리하여 다윗 언약은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주신 신탁의 형식으로 제시되고 있다. 여기의 말씀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5). 대답은 “아니다”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인 다윗뿐 아니라,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사실 집을 건축할 수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다. 이후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성전 봉헌을 드리면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라며, 자신이 지은 성전이 하나님께 보잘 것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왕하 8:27).

(2) 하나님은 출애굽으로부터 지금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으며”(6), 나아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그 어느 사사에게도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7). 즉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사를 성막 중심으로 그동안 이끌어 오셨으며, 이방 나라들과는 달리 성전이 없어서 한번도 섭섭하신 적이 없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위하여 성전을 짓고자 한 다윗을 하나님은 기뻐하셨으며, 그에게 ‘임마누엘’의 약속과(9절상반절), “너의 이름을 위대하게 해주겠다”는 약속과(9절하반절), “평화의 통치를 이룰 수 있도록 도우시겠다”는 약속을 주신다(10~11). 즉 다윗은 하나님의 집을 지으려고 하였지만, 오히려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지어주실 것이다”(11절하반절). 여기에서 ‘집’은 ‘왕조’를 의미한다. 이리하여 나단의 신탁은 ‘왕조창건의 신탁’이 된다.

(4) 이리하여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주신 모든 약속은 다윗의 당대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에게까지 넘어가는 ‘영원한’ 약속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후손’과 ‘보좌’를 약속하셨다(12, 13). 여기에서 ‘후손’은 구체적으로 ‘솔로몬’을 가리킨다. 솔로몬은 “네 몸에서 날 네 씨”로 언급되며(12),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고 한다(13). 사실 ‘후손’과 ‘보좌’는 왕권을 구성하는 두 개의 중심 요소이다. ‘왕의 후손’에게는 ‘보좌’가 있어야 하며, ‘후손’이 있어도 ‘보좌’가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왕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 따라서 하나님은 다윗에게 ‘후손’과 ‘보좌’를 동시에 약속하신다.

(5) 다윗 언약에서 하나님과 다윗 후손의 관계는 ‘부자관계’로 수립된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14절상반절). 이리하여 다윗의 후손은 하나님의 아들로 입양되며, 언약관계를 맺게 된다.

(6) 하나님께서는 이제 다윗의 후손들과 무조건적인 언약을 맺으실 것이다. 이 언약은 “그가 만일 죄를 범 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로 소개되고 있다(14절하반절~15). 즉 다윗의 후손이 범죄할 때 징계는 있겠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완전히 거두시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신다. 무조건적인 언약이란 언약 속에 조건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 조건이 인간 당사자에 의해 파기되어도, 그 후손을 통하여 계속 관계를 유지해 간다는 점에서 무조건적이다.

(7) 다윗의 집은 영원할 것이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16). 이 하나님의 불변하는 약속은 역사적인 가변성과 근본적으로 갈등을 갖고 있다. 다윗의 후손들은 다윗만큼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이 없었다. 만약 그들이 계속해서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될 것인가? 따라서 이 약속은 수많은 역사적 가변성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있다.

4. 사무엘하 7장 이후의 이야기들
사무엘하 7장에 있는 왕조의 약속은 이후 선지서와 신약성경에서 메시아 왕의 도래를 기다리는 메시아 사상의 모판이 되고 있다. 나단의 신탁은 궁극적으로 장차 오실 다윗 왕과 그의 왕국에 대한 소망을 담고 있다. 그 완성은 장차 올 다윗의 후손들뿐 아니라, 한 명의 이상적인 후손 왕에게서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사무엘하 7장에 담긴 메시자적 기대는 이후 시편과 선지서와 신약성경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확장되고 강화되며, 그 왕과 왕국의 정체는 구속 역사의 발전 속에서 점차 명료해질 것이었다.

이후 사무엘 7장에 나타난 다윗 언약은 먼저 다윗의 유언(삼하 23:1~7)에서 새로운 강조점과 함께 발전되며 심화되고 있다. 여기에서 다윗은 이제 선지자적인 은사를 받은 자로서(2~3), 왕조 약속의 신적 기원과 영원한 정당성을 천명하고 있다. 특히 다윗은 (1) ‘높이 들린 자’이며, (2) 하나님께 ‘기름 부음 받은 자’이며, (3) 이스라엘을 지키는 자의 ‘사랑을 받은 자’로 소개된다. 나아가 그의 왕국은 (1) 하나님을 경외함과 (2)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것을 중심 특징으로 갖고 있다(3~4). 요약하자면, 다윗의 후손만이 정당한 통치권을 가지며, 그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축복과 풍년과 평화와 안녕을 가져온다고 말함으로써, 다윗 왕국의 영속성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영원한 언약’에 근거함을 밝히고 있다.

사무엘하 7장의 나단 신탁은 이후 시편 2편에서 이상적인 왕권을 가진 왕으로 새롭게 그려진다. 여기에서 다윗 왕은 (1) 하나님께서 시온 산에 세운 왕이시며(6), (2) 하나님의 아들이며(7), (3) 열방을 유업으로 물려받은 자이며(8), (4) 그의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를 것(8절하반절)을 약속 받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과장법이나 환상적 그림이 아니라, 참된 메시아 왕권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지고 있다.

나단 신탁에 나타난 메시아 사상과 다윗 언약은 시편 89편에서 만개되어 나타난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단지 ‘왕’이나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택한 자’, ‘주의 종’, ‘경건한 자’, ‘용사’, ‘기름부음 받은 자’, ‘주의 아들’, ‘주의 장자’, ‘세계 열왕의 으뜸’ 으로 나타나고 있다. 시편 89편에서는 다윗 왕뿐 아니라, 그의 왕조도 이상적으로 묘사된다. 그의 나라는 ‘태양과 달’의 은유로 비교된다(36~37). 오직 다윗의 후손에게만 하나님께서 왕권의 정당성을 부여하셨다. 다윗의 왕권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셨으며, 하나님의 왕권의 기초가 되는 ‘의, 공평, 인자함, 성실함’ 위에 서 있다(14, 30~33). 무엇보다도 다윗 왕은 여기에서 수난 받는 메시아 왕이다. 그는 하나님께 버림받았으며(38), “그의 왕관은 땅에 던져져 더러워졌으며”(39), “그의 보좌는 땅에 엎어지고”(44), 그의 원수들은 그를 포위하고 노략하고 능욕한다(31~42). 그의 영광은 사라졌고(44), 그는 수치로 몸둘 바를 모른다(44). 수난 받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다윗 왕의 모습은 이후 수난 당하는 메시아 사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5. 신약의 빛 속에서 본 사무엘하 7
신약성경에서 사무엘하 7장의 나단 신탁은 히브리서 1 5절에만 단 한 번 인용되고 있다. 이렇게 중요한 본문이 신약에서 단 한 번만 인용되었다는 사실은 상당히 이외로 느껴진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정경적 해석’이 필요하다. 달리 말하자면, 신약의 빛으로 구약을 볼 때, 우리는 단지 신약에 인용되고 있는 본문만으로 구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신약 전체의 빛 속에서 구약 전체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무엘하 7장은 사무엘하 23장의 다윗의 유언과 시편 2, 72, 89편뿐 아니라 선지서의 수많은 예언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본문을 전체적으로 기독론적 관점에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즉 나단의 신탁에 담긴 모든 약속들은 궁극적으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궁극적으로 성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사무엘하 7장이 바라본 다윗의 후손으로서, 하나님의 선택된 자요(삼하 7:8), 임마누엘이시며(9), 위대한 이름을 얻으신이시요(9; 2:9~11), 모든 원수를 물리치고 평화의 나라를 가져오시며(10~11), 하나님의 아들이시며(14), 성전인 교회를 짓는 이시요(13), 새 왕조인 하나님나라를 세우신 분이시다(11, 16). 그의 보좌는 영원히 세워질 것이다(13). 나아가 사무엘하 7장을 역사적인 위기 속에서 심화시킨 시편 89편에 나타난 다윗의 모든 칭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며, 나아가 수난 당하는 종으로서의 다윗의 모습 역시 수난 당하는 종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된다.


왕이신 하나님

1. 사사기의 메세지
사사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대로 알려져 있다. 사사기 저자는 그 이유를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21:25) 설명하고 있다. 견고한 왕권은 나라의 번영과 안정을 상정했고, 그 반대는 당연히 흔란과 파탄의 상황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구약에 기록된 언약의 주요 내용은 후사와 땅과 민족으로 대표된 영원한 이스라엘의 왕국 설립이라고 말할 수 있다( 15). 그러나 구약은 죄로 인한 이스라엘의 패망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언약의 실제 왕국은 열방의 왕 여호와가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였음을 암시하기도 하나, 죄와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언약의 은혜를 분명히 부각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진적 계시과정에서 사사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예표로서 가나안 정복 이후 이스라엘의 왕권 설립과정에 나타난 죄-심판-은혜의 3부적 신학구조를 가장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 사사기 신학을 논하기에 앞서 신명기부터 전면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하는 가나안 정복의 신학적 의미와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순종으로 얻어지는 땅
여호수아서는 아브라함의 언약 중 땅의 약속이 성취됨을 기록하고 있다. 땅이 왕국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필연적인 자산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땅을 정복함으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 신명기와 여호수아서는 초기에는 그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땅의 정복이 순조롭게 이루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순종의 모습은 사사기에 이르러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먼저 땅의 정복을 둘러싸고 이스라엘이 어떻게 순종했는지를 신명기와 여호수아서 에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신명기는 정복해야 할 땅과 정복하지 말아야 할 땅에 대해 이스라엘이 어떠한 자세를 취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신명기라는 책명은 헬라판 구약성 경인 70인역 (LXX) 의 번역으로서 신명기 17:18 의 “이 율법서" (δεθτεονομιον τευτο, 두 번째 율법서)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새로운 율법이 아니라 요단동편 모압 땅에 이르러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둔 광야 2세들에게 갱신된 시내 산 언약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명기는 그 문학적 유형상 크게 세 개의 설교 양식(1-4, 5-26, 27-30)으로 구성되어 있고 두 편의 시 (32-33)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신명기가 단순히 정적인 법률 조약 보다는 생명력 있는 설교를 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3편의 설교는 “쉐마 이스라엘" ( 6:4-5; 10:12-13), 즉 “들으라 이스라엘아”라는 주제 아래 묶을 수 있는데, 이는 “모세가 요단 저편(에서) ....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1:1)인 것이다. 그리고 배경은 “제사십 년 십일 월 그 달 초일일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을다 고하였으니(1:3)라고 함과 같이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40년 중 마지막 달의 사건들이 중심이 된다.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이 과거-현재-미래의 3부적 구조로 구성해 볼 수 있다.

주제: “쉐마 이스라엘" (신명기 6:4-5; 10:12-13)

1. 과거: 역사적 교훈 (1-4, 9-10)
1) 호랩과 벤브올사이에서 일어난 일(1-3)
2) 율법 순종과 우상숭배 금지 (4)

2. 현재: 모압에서의 시내 산 언약의 갱신
1) 율법갱신(5, 11)
2) 광야 2세들을 위한 율볍 확장(12-26)

3. 미래: 약속의 땅에서의 삶
1) 이스라엘의 미래 (27-30)
2) 모세의 고별설교(31-34)

이 설교 세 편 중 첫 번째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선명기 1:5-4:43은 주로 과거를 통한 역사적 교훈을 담고 있다. 특별히 이제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요단 동편 헤스본의 왕 시혼과 바산의 왕 옥의 패배를 언급함으로써 과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 (15:18-21; 1:7-8)의 정복을 확신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의 경험을 통해 자신들의 의지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에스골 골짜기(포도송이의 골짜기)의 풍요로움을 보고도 하나님을 불신하는 결과를 낳았고( 1:25-28), 그들의 속셈으로는 산지의 아모리인들을 전격 습격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1:41-44). 그리고 그들이 끝내 가데스와 시내 산 사이 에서 40년을 방황하게 되었던 것이다( 1:46). 그러므로 모세는 2장과 3장에서 역사적 서언을 통해 가나안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이제는 모든 불신을 버리고 절대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 행하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가나안을 향한 그들의 행진이 하나님이 정하선 피할 곳과 정복할 곳에 따라 말씀대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쉐마 이스라엘, 6:4-5).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경외하고, 행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지켜야 한다( 10:12-13). 그들의 의향대로 피하고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입증해 준 역사적 사건( 1:1-46)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순종해야한다. 순종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왕권을 상징하는것이며 오직 순종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길이다. 이스라엘은 호랩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의 실패( 1:19-46)를 통해 언약의 성취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매킨토시 (C. H. Mackintosh)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그들의 타락한 의지가 무너짐으로 순종(subjection)을 배우게 되었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함으로써 묵종 (acquiescence)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깨달으면서 기쁨(rejoicing)을 얻게 되었다고 진술한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피하라 하실 때 피하며 정복하라 하실 때 정복하는 순종과 묵종과 기쁨을 얻게 되기를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2) 정복하지 말아야 할 땅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간 방황을 마치고 이제 가나안 정복을 위하여 가데스 바네아에서 요단 동편으로 북진하기까지 에돔(세일)과 모압과 암몬의 땅을 지나가야 한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과 대결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그곳은 정복의 땅이 아니라 피할 땅인 것이다.

(1 ) 에돔( 2:1-8; 20:14-21)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여러 날 동안 세일(에돔의 초기 명칭) 지방을 두루 행하였다(2:1). 이제 광야에서 죽은 출애굽 세대들에 이어 광야 2세들이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었다. 물론 그들도 전 세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반역한 자들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지켜져야 한다. 또한 이는 아담( 3:21)과 요나(요나 1:1; 3:1)와 베드로( 21:16)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기도 한다.

세일(에돔) 땅을 지나야 하는 이스라엘은 그들과 다투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다( 2:5). 그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이 아니다. 더구나 에돔( 25:21-26)은 이스라엘의 동족인 에서의 자손( 2:4; 1:11; 10:12; 1:2) 이며 세일 땅은 하나님이 에서에게 기업으로 준 땅(2:5) 이기 때문에 그들과 다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만 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에돔에게도 주셨다. 케언스(Ian Cairns)가 지적한 것과 같이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God of Israel) 이신 동시에 열방의 하나님 (God of Nations)이시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1:1)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로서( 17:24) 모든 땅과 모든 백성을 다스리시는 통치권을 가지고 계신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 온땅에 거하게 하시며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신” ( 17:26)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한 국경과 문화와 인종을 서로 존중할 수 있어야 하며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 땅끝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증인이 되고 복음을 나누는 것은 분명 제국주의 개념과 구별 되어야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열방의 왕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메마른 광야에서도 이스라엘에게 에돔 땅을 피해갈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미리 충족시켜 주셨다. 이스라엘은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과 물을 사서 먹고 마실 수 있을 정도로( 2:6) 풍족하였다. 신명기 기자는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에게 복을 주셨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한 것 같으나 그 모든 행함을 아시고 그 곳에서도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2:7). 하나님 이 그들을 아셨다"는 히브리어 어법은 구약에서 종종 문맥상 “보살피다“함께하다“예비하다“보호하다”로 번역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그들의 생각을 통촉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인도하시며 붙드선다( 139:1-10). 하나님이 피하라고 하실 때, 그가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실 때, 그가 양보하고 용납하라고 하실 때 그는 벨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선하고 영원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139:24). 그러므로 모세는순종하여 세일 산에 거하는그들의 동족 에서의 지손을 떠나서 아라바를 지나 엘닷과 에시온게벨 곁으로 지나 행하고 돌이켜 모압 광야 길로 진행하게 되었다( 2:8).

(2) 모압( 2:9-15; 21 :12-15; 22:1-25:5)
이스라엘은 모압과도 싸워서는 안 되었다. 본문은 에돔과 ‘다투지 말라” ( 2:5), 모압과 ‘다투지 말라" ( 2:9), 암몬과다투지 말라" ( 2:19)는 단편적 술어들과 대구를 이루고 있다. 모압 땅 (요단 동남편에 있는아르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혈통인 롯( 19:37; 21: 15 , 28)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선 땅이다( 2:9). 그러므로 모압을 피해야 하는 이유도 에돔을 피해야 하는 이유와 다름이 없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God of Israel)은 열방의 하나님 (God of Nations) 이심이 다시 한 번 부각된다. 세계의 지정학적인 모든 경계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있다. 이 모압단편 속에 삽입된 신명기 2:10-12은 천지의 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우주적 속성을 강화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열방의 왕이신 것이다. 원래 모압에는 아낙 족속과 같이 거인족인 엠 사람들(무서운 자들)이 살고 있었고(2:10-11) 에돔 땅 세일에도 호리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땅은 하나님이 에돔과 모압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 이므로 그들이 정복하였고, 이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주신 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일반인 것이다" ( 2:12). 즉 이스라엘이 에돔과 모압을 피해 가야 하는 이유와, 반대로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는 이유가 근본적으로는 동일하며 하나님의 “일반된"(just as) 행위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절대주권 아래 있다.

신명기 2:8-15에서 모압단편은 거기서 일어난 여러 가지 중요한 사건들을 생략하고 있다. 그 예로 발람 선지자와의 대립을 들 수 있다( 22:1-24:25). 이는 본문이 사건의 기술보다는 사건에 대한 신학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세는 이 말씀을 통해 언약을 갱신하며 가나안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이 율법을 준수해서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모압단편은 이제 하나의 중요한 암시로 마무리된다. 언약을 준수하지 못하여 광야에서 다 멸절된 출애굽 1세들에 대한 비극이다(2:13-15)-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중에서 멸하신 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 ( 2:15).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반역했다. 이는 케언스가 역설한 것과 같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멸하심 (destructiveness of God) 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멸절(self-destruction)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한 채 의미대로 무엇을 피하며 무엇을 정복할지를 결정하는 인류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방황하며 죄로 인해 스스로 멸절해 가고 있는 것이다. 왜 모압을 피해야 하고, 왜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는가, 인간은 왜 도덕적이어야 하나? 그 궁극적 해답은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해답은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있는 것이다.

(3) 암몬( 2:16-25; 21:24)
본문은 다투지 말아야 할 마지막 대상으로 암몬을 기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에돔과 모압단편에서 기록된 것과 동일하다. 암몬 땅도 하나님이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다( 2:19). 이 짧은 이야기에 삽입된 신명기 2:20-23은 계속 일관되게 부각되고 있는 하나님의 열방에 대한 주권적 통치를 다시 한 번 암시해 준다. 암몬 땅도 원래는 르바임의 땅이었다( 2:20) “그 백성은 강하고 많고 아낙 족속과 같이 키가 크나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 앞에서 그들을 멸하셨으므로 암몬 족속이 대신하여 그 땅에 거하고 있다" (2:21), 이는 세일에 거한 에서 자손 앞에 호리 사람을 멸한 것과도 일반이고 ( 2:22), 더 나아가 가사 촌까지 이르러 살았던 아위 사람을 멸하고 그 땅을 갑돌(크레타 섬)에서 나온 자들에게 준 것과도 일관된다. 이러한 삽입은 이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는 이유와 정당성을 강화시킨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맺어진 언약의 성취인 것이다.

에돔과 모압과 암몬의 단편들은 이제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하게 해준다. 이제 하나님이 르바임과 호리를 에돔과 모압과 암몬에게 붙이신 것과같이 헤스본 왕 시혼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심으로써(2:24-25) 가나안 정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피하게 하시는 이도 여호와이시고 정복하게 하시는 이도 여호와이시다.

3) 정복해야 하는 땅
가나안의 정복은 요단 동편을 따라 남에서 북으로 헤스본( 2:26-37; 21:21-30)과 바산( 3:1-11; 21:33-35)을 정복함으로써 시작된다 이 두곳의 정복은 앞으로의 가나안 정복을 마지막으로 명백히 확신시켜 주는 사건이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점진적인 훈련과 경험을 통해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게 하신다. 이스라엘은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의 타협 , 그리고 헤스본과 바산의 정복 경험으로 이제 가나안 정복에 대한 준비를 마무리한다.

그러므로 폰 라드(G. von Rad)는 신명기 2:24-39이 약속된 땅의 정복 (The Conquest of the Promised land)의 주제를 본격적으로 열고 있다고 주장한다. 가나안의 정복은 하루 아침에 시작되어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긴 세월에 걸쳐 크고 작은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파란만장한 에피소드가 선행된 사건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즉각성과  수동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이제 이스라엘은 말씀에 순종하여 에돔과 모압과 암몬을 피했듯이 또한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의 약속을 선뢰하여 헤스본과 바산을 점령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는 과정에는 잘 취해야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잘 버려야 하는 것도 있다.

(1 )헤스본 ( 2:26-37; 21 :21-3)
모세는 헤스본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평화적으로 그 땅을 통과하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2:26-29), 그러나 시혼은 이를 거절해서 이스라엘에게 전쟁의 동기를 부여해 준다. 그 땅은 싸워서 얻어야 한다( 2:24), 신명기 기자는 이러한 상황을 여호와 하나님이 시혼 왕을 이스라엘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팍케 하셨다" ( 2:30)고 표현하고 있다. 구약에서 그 누구의 마음을 강팍케 하셨다”는 히브리어 어법을 문자 그대로 결정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해석학적 오류라 할 수 있다. 크레이그(Peter C, Craigie)가 시사한 바와 같이 이러한 술어는 역사에 대한 고대 히브리인들의 신학적 표현이자 하나님의 섭리를 반영하는 표현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출애굽 과정에서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진 것과 유사하다. 출애굽기 기자는 바로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완강케 했다고( 8:15) 기록할 뿐만 아니라 상황적으로 강팍케 되었고( 8:19) 더 나아가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강케 하셨다 (10:1)고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논리를 초월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긴장을 포착하게 된다. 하나님은 시혼을 이스라엘 손에 붙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시혼의 마음을 강팍케 하신다. 더 나아가 이제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나아가 그들과 싸워야 한다 (2:33) , 이스라엘은 자발적인 의지와 순종과 책임감으로 실제 전쟁에 임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경험한다. 믿음은 순종과 행위를 통하여 역사한다. 믿음 앞에서 모든 장애물들은 궁극적인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헤스본 단편에서 제일 어려운 주해는 전반적인 가나안 정복에서도 반복되는 남녀유아의 진멸 문제이다( 2:34) , 여기서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윤리적 의문으로 갈등하게 된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유아까지 진멸하시며 비윤리적인 전쟁의 정당성을 말할 수 있는가?

메릴(Eugene H, Merrill)은 성전에서의 남녀유아 진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그들에 대한 심판은 죄로 인해 정당하다( 9:4-5), 둘째,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일을 마지막까지 고집했다 ( 7:10), 셋째, 진멸하지 않고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우상숭배와 부도덕적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20:17-18)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 보자. 먼저 하나님은 에돔과 모압과 암몬에게도 땅을 기업으로 주셨듯이 온 인류를 사랑하심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오히려 4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 노릇하게 하시며 아모리 족속의 회개를 기다리셨다 ( 15:16),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신 것처럼 아모리 족속도 회개 했다면 심판을 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간의 윤리적 잣대가 과연 하나님의 도덕성을 심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할 것이다. 모든 인류는 이미 아담의 타락으로 심판의 대상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점을 우선 전제하고 나머지를 생각하였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18:25). 바울 사도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판단이 절대적이며 궁극적일 수가 없음을 천명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 9:20). 구속사를 통한 계시의 초기 과정에서 가나안 정복은 인간의 윤리적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가 공존한 불가결한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 진멸을 통하여 죄와 종말론적인 심판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구약은 신정(Theocracy)의 형식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 5:17; 24:44). 율법의 원리인 사랑( 6:4-5)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완성 되었으므로 ( 22:37-40; 13:8)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 사역은 겸손과 섬김과 떨림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정복하는 것이다( 1:8).

(2) 바산( 3:1-11; 21:33-35)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피할 곳과 정복할 곳으로 진군하며 약속의 땅을 정복하게 된다. 이제 그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진행한다. 헤스본 정복에서도 승리의 열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금하신 압복 강가와 산지에 있는 성읍에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2:37). 순종이 승리의 주요 열쇠가 된 것이다. 이제 그들이 정복할 두 번째 지역은 요단 동편 북쪽 지방인 바산이다( 3:1).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헤스본의 경험을 상기시키시며 그들의 믿음을 세워 주신다( 3:2). 우리는 여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도우심을 너무 쉽게 잃어버릴 때가 많다. 광야에서 불신앙으로 멸절된 백성들은 홍해의 기적을 잊어버린 자들이었다. 하나님은 헤스본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이제 바산 왕 옥에게도 행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 3:2). 바산에서도 헤스본의 진멸은 반복되었다( 3:3-7), 여호와 하나님은 르바임과 호리를 멸하시고 그 땅을 에돔과 모압과 암몬에게 주셨듯이 이제 르바임 족속의 마지막으로 남은 바산 왕 옥을 멸절하고( 3:11)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주셨다. 이제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널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는 그들의 의지와 계획과 열성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이 선행하는 적극적 행위로 성취된 사건이다.

4) 가나안을 바라보며
요단 강 동편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이제 가나안으로 진군하기에 앞서 땅을 분배하기 시작한다( 3:12-22; 32:1-42), 이 분배는 필요에 따라 집행 되었고 공평하게 한 지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 세밀히 계획되었다. 육축이 많은 르우벤 자손, 갓 자손, 므낫세 반지파는 땅을 먼저 기업으로 받아 처자와 육축을 요단 동편 성읍에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군인들은 무장하여 그들의 형제들도 가나안에서 하나님 여호와가 주시는 땅을 얻어 기업을 삼고 안식하도록 무장하고 선봉으로 요단 강을 건너가기로 한것이다 ( 3:18-20). 하나님의 축복과 안식은 나누어져야 한다. 개인의 정착은 타인의 정착을 위한 것이다.

모세는 요단강 동편에서 40년 간의 광야 생활을 정리하며 이스라엘의 정착 시초를 증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는 요단 저편을 건너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 보기를 간구하였으나 (3:25) 하나님은 이를 금하신다 “너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 3:27). 모세는 이에 순종하여 그의 지도권을 여호수아에게 넘겨 준다( 3:28), 이제 모세의 사역은 벤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마무리된다( 3:29), 하나님은 그에게 벤브올까지만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다. 모세는 분명히 가나안을 바라보며 더 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하나님의 때에 남은 일들을 여호수아와 하나님께 맡기는 지혜와 덕이 필요했다. 또한 모세는그렇게 함으혹써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남게 된 것이다. 참된 리더십, 거기에는 순종과 절제와 나눔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과정에는이러한 순종과 절제를 갖춘 리더들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나안을 바라보며 사는 신앙인들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피하라 하실 때 피하며, 정복하라 하실 때 정복하며, 그만두라 하실 때 그만둬야 한다. 그리고 공정하게 분배하고, 일에 대한 욕심을 절제하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덕망을 갖춰야 신앙의 땅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이다.

5) 약속의성취
신명기에 나오는, 땅에 대한 정복은 여호수아서에서 완성된다.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라는 구속적 의미를 지녔다. 여호수아서의 주요 내용을 분석해 보면 오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이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순종을통해 성취됨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런 언약(약속)을 맺으셨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햇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브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 15:18-21) , 땅에 대한 이러한 약속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된, 후사와 민족과 땅에 대한 3대 약속 중 하나이다. 이제 여호수아는 민족을 이루어 약속된 땅을 말씀대로 정복하고 취함으로써 언약의 이행을 증명하게 된다. 애굽에서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은 땅을 얻게 되고 끝내 후사인 다윗 왕조를 통해 나라를 건설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여호수아는 그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땅의 약속을 성취하게 된다. 그는 가나안 땅 정탐으로 시작한 가나안 정복을 성공리에 마치게 된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 11:2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 21:43) , 이러한 땅의 정복은 아브라함에 이어 모세에게 약속하신, 즉 이스라엘의 열조와 맺으신 언약의 성취를 일관적으로 보여 주는 것인 동시에 남은 약속의 미래적 성취를 보증하논 것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게 항상 진행형 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인 셈이다. 언약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미”와 “아직”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여호와 하나님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열방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서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언약 백성들은 거룩하게 구별된 자답게 세상과 싸워 여호와를 더욱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분을 섬겨야 한다는 경고를 듣게 된다( 23:11-24:28) , 이스라엘은 그 이웃 나라들과 같이 민족을 이루어 땅을 차지하고 한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다스리게 될 다윗의 왕조는 “후사인 메시아의 그림자가 되고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의 나라의 예표가 되는 것이다.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 민족과 땅은 하나님의 나라의 유형이며 그들의 참된 왕은 여호와 하나님 이심을 암시하고 있다. 오늘날도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긴다면 우리의 모든 삶과 지경이 작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성경의 구속사는 왕이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삼고 있다. 백성, , 후사, 이 모든 개념과 실제가 구속(Redemption)이라는 통일된 하나의 신학적 유기체를 이루고 있다. 그 예로 오경의 출애굽이야기에서 구속의 예표를 볼 수 있고 여호수아의 약속의 땅 이야기에서 구속의 성취 과정을 볼 수 있으며, 마침내 신약의 복음서를 통하여 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와 구속의 완성을 볼 수 있다. 신약은 이스라엘 왕국의 설립이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조명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가나안 정복( 21:43-45)은 “하늘의 속한 모든 신령한 복" ( 1:3)을 기업으로 얻게 될 미래의 왕국을 예고한다. 기적을 동반한 애굽에서의 구속과 가나안 정복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기적적인 구속사의 씨앗을 보게 된다( 3:7-4:11). 요단을 건너며( 3; 114:3, 5)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여리고 성을 향한 예언의 후기 성취( 6:26; 왕상 16:34)와 같이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서는 땅에 대한 과거의 약속의 성취를 기록하는 동시에 그러한 가나안 정복이 이제 앞으로 도래할 열방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주권을 예고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가나안에 이스라엘 왕국을 세운 것이 가나안 정복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과정이자 매체였다고 할 수 있다. 여호수아는 이를 세겜의 언약갱신 (24:1-28) 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가장 중심적인 동기는 이제 그들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버리고” 오직 여호와만 섬기기 위함이었다( 24:14-15).

존 그레이(John Gray)와 알베르토 소진(J. Alberto Soggin)도 바로 이 세겜의 언약갱신이 여호수아의 주요 기록 목적이라고 지적한다. 소진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면에서 갑자기 여호수아의 신앙고백적인 선포로 본문이 바뀌면서 가나안 정복 이야기의 초점은 땅이 아닌 땅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임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에는 새로운 땅으로 들어갈 때 그 땅의 신을 섬겨야 하는 풍속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땅이 목적이었다면 그 땅의 우상을 섬겨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야는 언약의 갱신을 통해 그 땅을 정복한 것은 그 땅의 모든 우상들을 정복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확립하는데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생존의 무한 경쟁 속에서 안식과 정착의 지경을 넓히기 위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발버둥침은 무엇을 향한 것인가? 우리가 정복하고 있는 것들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세상을 정복하기보다 이 세상에 정착하기 위해 세상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이 세상에서 우리의 정복이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바로 우리 삶의 현장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될것이다.

6) 사사시대의 죄-심판-은혜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죽음을 기록하며 여호수아서를 자연스럽게 이어 가는 역사서 이다( 2:6-9; 24:29-31).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며 남겨둔 가나안 족속들은 이제 사사시대에 다시 그 세력을 재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사기의 이야기 속에는 죄-심판-은혜라는 구약의 3부적 신학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착 후 원래 정복의 목적을 잃어 버린다. 그것은 우상숭배에서 나타나는데 그들의 그러한 죄는 그들을 가나안 사람들의 손에 붙이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애굽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들 주위의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 2:11-13) 그러나 사사기의 주요 신학적 메시지는 죄와 심판이 아니다. 그들에게 사사를 세워 구원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그것이다. 백성은 그를 포기해도 하나님의 주권은 계속 이어진다. 물론 사사기는 과거 여호수아의 승리를 회상하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왕정 설립을 미래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17:6; 21:25) , 주요 메시지는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었지만( 21:25), 내부적으로는 그들이 여호와를 그들의 왕으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2:13).

사사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야주 중요한 과도기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노예집단에서 광야 유목민으로, 이제 정착민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는 이미 정착하여 강한 도시국가를 이룬 다양한 민족들이 있었고 바알과 아스다롯과 가나안의 토착종교가 농업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세계관과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180) 이스라엘이 그러한 환경에서 여호와를 왕으로 삼고 신앙의 세계관을 정착시키는 일은 실제 땅을 정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였다. 그들은 애굽에서 그들을 기적적으로 구원하시고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의 현실 앞에서 하나님을 떠나 불신앙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을 체험했지만 우리는 이 시대의 블레셋 앞에서, 바알과 아스다롯과 자본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보시고 대조적인 두 가지 일을 반복하셨다. 첫째는 그들을 심판하시는 일이었고, 이어 사사들을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시는 일이었다. 사사란 재판관을 뜻하는 쇼프팀을 번역한 라틴어 Judicum에서 유래한 말이다. 사사는 정치적 리더가 아니었다. 사사는 하나님의 구속적 도구였다.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의 심판과, 사사들을 세우시는 은혜로 이어졌다. 도날드 캠벨 (Donald K. Campbell)은 사사기에 기록된 사건들 속에서 일관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우상숭배나 배교의 죄
2.    타민족의 손에 이스라엘을 붙이시는 하나님의 징벌
3.    이스라엘의 탄원 또는 회개
4.    성령의 감동을 입는구원자(사사)를 하나님이 보내심.
5.    전쟁이 없는 평화의 기간

이를 요약하면 오경의 3부적 주요 신학의 틀인 죄-심판-은혜의 구조와 유사하다. 죄와 심판 후에도 은혜가 가능한 것은 사사들이 위대해서거나 앞으로 세울 왕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왕권과 그의 사랑이 그의 절대주권 아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사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아야 하는 연약하고 타락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사사기는 삼손의 힘도 그의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서 주셨음을 밝히고 있고( 16:23-31), 소를 모는 막대기 하나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다는 삼갈의 이야기( 3:31)를 통해 하나님의 개입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삼갈의 이야기를 살펴보며 사사기의 메시지를 정리해 보자. 교회를 좀 다닌 사람들에게는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삼손 정도는 누구나 어색해 하지 않는 익숙한 성경 인물들이다. 그러나 ‘삼갈’ 이라는 이름은 대다수의 교인들에게 다소 생소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삼갈’ 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고 사사기 3:31은 기록하고 있다. 그 시대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던 시대 였다( 5:6). 즉 삼갈이 살던 시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보다 훨씬 더 강한 가나안 사람들에게 억압을 당해서 넓고 평탄한 큰 길로 다니지 못하고 굽고 좁은 산길로 숨어 다녔다는 것이다. 그때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배교를 통해 우여곡절의 시대를 살아갔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어려움 속에 있는 백성을 구원한 사람이 삼갈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 그러나 구약은 이 삼갈에 대해 오직 이 짧은 본문의 한 절만을 기록하고 있다. “에훗의 후예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3:31).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사사기의 주요 메시지를 포착할 수 있다. 삼갈이 철기와 강력한 병마를 이끈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은 오직 “소 모는 막대기”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다윗이나 솔로몬과 같이 천하의 영화를 누리는 권력이 없었다. 아브라함과 같이 기록될 만한 믿음의 업적이나 부를 소유한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저 그 시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그냥 길에서 주워서 만들 수 있는 “소 모는 막대기” 하나만이 주어졌다. 그가 소를 모는 막대기를 가지고 다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겠지만, 먼저 그가 많은 종을 부리는 큰 부자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소를 모는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그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웠으니 그에게는 마병이나 철로 만든 활이나 창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볼 만한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러니 얼마나 고난을 많이 받았겠는가! 그 얼마나 그의 인생이 힘들었겠는가! 소 모는 막대기 하나로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구원 하려니 그 얼마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겠는가! 그런데 바로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오늘날 우리는 삼갈의 시대와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참된 왕이 없어 극적인 개인주의가 팽창한 이 시대를 사는사람들은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다 스스로 멍들어 가고 있다. 가치관의 혼돈, 무한한 자본주의의 퇴폐적인 경쟁, 목적 상설, 정치적 부패, 인신매매와 청소년들의 방황, 가정파괴, 집단 이기주의, 윤리적 타락, 교육의 상업화, 세대간의 갈등과 같은 타락과 심판 앞에서 어떻게 보면 우리들이 가진 것은 소 모는 막대기 하나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삼갈과 같지 못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삼갈이라는 사람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나에게 건강을 주십시오. 그러면 이스라엘을 구원하겠습니다“ 하나님 나에게서 모든 고난을 면제해 주십시오. 그러면 이스라엘을 구원하겠습니다“하나님, 나에게 물질과 명예와 정치적 권력과 엄창난 부와 평탄한 길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면 어려움에 처한 이이스라엘을 내가 구원하겠습니다” “나에게 땅을 주십시오. 나의 지경을 넓히게 하옵소서. 그러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그래서 하나님이 건강과 물질과 명예를 주시면 우리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보다는 자신과 세상을 타락으로 몰고 간다.

우리는 사사기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읽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삶의 문제가 없고 강하기 때문에, 잘나고 많이 배웠고 부하고 똑똑하기 때문에 쓰임을 받은 것이 아니다. 소 모는 막대기 하나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쓰임 받는 자들이 된 것이다. 어두운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7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보배란 하나님의 의이고, 질그릇은 그 의를 감히 담을 수 없는 우리의 부족한 속성이다. 나의 의로움, 물질, 지혜, 힘과 경험, 온전한 삶, 기발한 아이디어, 그 어떠한 계획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내가 무언가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사역에 열심은 있으나 덕을 못 세울 때가 너무 많다. 그러나 질그릇과 같이 너무 약하고 소 모는 막대기 하나밖에 없는 우리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보배를 우리에게 은혜로 담으셨다. 그는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왕이기 때문이다.

2.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 왕의 기원에 대한 사무엘상의 내러티브는 표면적으로 신학자들의 논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사무엘상 8:6-7은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것이 잘못임을 분명히 암시하는(8:7; 10:19; 12:12-20) 동시에 하나님이 왕권을 허락하셨다고(8:7, 9, 22; 9:16-17; 10:24; 12:13)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최초 왕록이라 할 수 있는 1-7장은 왕의 어린시절이나 왕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수록하기 보다는 선지자인 사무엘의 어린시절과 언약궤에 대한사건을 말하고 있다. 비평학자들은 이러한 모순점을 문서비평이나 편집비평학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좀 더 상세한 분석은 본문의 모순이 실제로는 언약이라는 문맥 속에서 자연스럽게 통일성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언약의 왕권
먼저 이스라엘의 왕권 수립은 시무엘 시대에 최초로 확립된 것이 아니라 시내 산 언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명기 17: 14-20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4. 네가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그곳에 거하며 말하기를 나도 내 주위에 있는 모든 민족같이 내 위에 왕을 세우리라하거든

15. 너는 반드시 주 너의 하나님께서 선정하실 사람을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너는 네 형제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니 네 형제가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지니라

16. 그러나 왕은 스스로 말들을 많이 번식시키지 말 것이며 그가 말을 번식시킬 목적으로 그 백성을 이집트로 돌려보내지 말지니 이는 주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너희가 이제부터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라

17. 그는 또한 자기에게 아내를 많이 두지 말아야 할지니 그래야 그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을 것이요 그는 또한 자기에게 은과 금도 크게 늘리지 말아야 하리라

18. 그가 자신의 왕국의 보좌에 앉으면 그는 레위인 제사장들 앞에 있는 책에서 이 율법서 한권을 베껴

19. 자기와 함께 두고 평생 동안 그것을 읽어서 그로 주 그의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배우게 하고 이 율법의 모든 말씀들과 이러한 규례들을 지켜 그것들을 행하게 할지니라

20. 그리하여 그의 마음이 자기 형제들보다 높아지지 아니하고 그가 그 계명에서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돌이키지 아니하면 종국에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와 그의 자손이 그 왕국에서 자기 날들을 늘리게 되리라.

이 본문은 모세를 통해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 속에 왕을 세울 수 있는 조항이 (14-15) 분명히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다만 하나님 이 “선정하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법률을 대변할 수 있는 자가 왕이 되어 선정정치를 해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여기서 유일한 점은 이 왕에 대한 자격이나 모습이 고대 근동에 보편적인 왕의 특징과는 너무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이 선정하는(15) 이 왕은 말을 번식시키지 않는 왕으로서 (16) 이는 군사력이 없는 왕을 의미한다. 둘째, 이 왕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아야하는데(17) , 이는 타 왕국과의 조약이 약화되어 왕권이 약해질 수 있다. 셋째, 이 왕은 은과 금도 늘려서는 안 되는데(17) , 이는 재정적으로 약함을 의미한다. 이런 조건은 왕에 대한 보편적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다. 한 왕국의 왕으로서 군사력과 탁월한 외교 기술과 튼튼한 재정에 대한 정책을 포기하라면 왕의 의미가 무색해질 것이다. 이러한 왕에게 유일하게 요구된 것은 율법서를 베껴 자기와 함께 두고 평생토록 읽으며 그 말씀을 지키는 일이다(18-19). 본문은 과연 이러한 왕이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사무엘상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스라엘의 왕권 기원에 대하여 왕에게 초점을 맞추기 전에 1-7장에서 그 왕을 하나님의 뜻대로 선정하며 그 왕을 참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이끌어 줄 사무엘 선지자의 이야기를 그의 출생부터 다루고 있다(1-3). 그리고 그 왕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왕이어야 함을 상기시키기 위해 언약궤를 중심으로 한 사건들(4-6)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더 나아가 왕을 세우기전 사무엘 선지자의 지도 아래 전쟁이 승리함으로써 블레셋으로부터 언약궤를 회복했다고 하여 이스라엘의 참된 왕권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8장부터 등장하는 왕에 대한 백성들의 갈망은 그들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왕권을 외면하고 “열방과 같이" (5) 세속적인 왕을 원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주권적 왕권을대표하는 왕이 아니라 타락한 사람들의 욕심을 따라 원하는 세속적인 왕인 것이다. “너희가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 하나님을 오늘날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도다" (10:19) , 여기서 표면적으로 병행되는 왕에 대한 소위 모순된 견해들은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대표할 수 있는 왕, 부정적으로는 사람들이 원하는 왕으로 분리 해야 할 것이다. 즉 사무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을 선정해야 했지만, 사람들은 “이방 왕 같은” 왕을 요구한 것이다.

2) 사울의 왕위와 다윗의 왕위
사울의 선정은 하나님의 언약에 서 있지 아니한 왕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말하기 위한 서론이라 할 수 있다. 사무엘은 백성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실망이 컸다(8:6), 이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선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7), 그들의 말대로 세운 왕이 사울이다. 사울은(13-15) 왕위에 오른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사무엘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 행한다. 이는 선명기 17:18-20에 기록된 왕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그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고난을 받는다. 본문은 하나님의 통치를 떠난 왕권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함축하고 있다.

사무엘상하 본문은, 왕권의 타당성에 대한 논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왕권이 하나님의 왕권을 대표하며 언약을 준수하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무엘상 16장에 가서 하나님은 그가 선정하신 베들레햄 사람 이새의 아들 다윗을 왕으로 세울 것을 말씀하신다 (삼상 16:1;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 다윗은 사울의 정권이 반 신본주의적으로 흘러감에 따라 그 명성과 권력이 허약해짐에도 불구하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그 어떠한 인간적인 반역이나 혁명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순리를 따라 행하며 하나님의 선정으로 헤브론에서 왕의 직위에 오른다(삼하 2). 다윗은 왕위에 오른 후 곧바로 여호와의 궤를 아비나답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 와서(삼하 6) 그의 정권 위에 하나님의 왕권이 있어 나라를 다스리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의 왕권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을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신다. 창세기 15:18은 다윗의 업적 가운데 한 부분을 다음과 같이 예고하고 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지손에게 주노니다윗은 왕국의 국토를 남쪽 애굽지평에서 메소포타미아에 이르기까지 넓혀 간다(삼하 8) . 그리고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이 계획한 여호와의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대신 다윗의 집을 영원히 보존하실 언약을 세우신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삼하 7:16). 구약은 계속해서 그 다윗의 자손을 통하여 참된 왕의 실체로 오실 한분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영원히 보존할 것을 여러 형태로 예고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분을 “평강의 왕”( 9:6)이라 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23:5-6). 이것은 예레미아서의 기술이 다윗의 의로운 가지를 통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 11:1-2) 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3)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
존스(G. H. Jones)는 열왕기서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누어진 두 개의 원서를 중심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다윗의 영원한 왕권을 목적으로 한 유다문서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문서가 편집되어 이스라엘과 유다왕들의 업적에 대한 정치적 평가가 시각에 따라 일관되지 못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가 열왕기서를 공시적으로 접근해 볼때 왕들의 업적은 언약을 준거로 일관되게 평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약은 종종 이스라엘의 지상 왕들을 실제 왕이신 메시아의 예표로 조명한다. 이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록이라 할 수 있는 열왕기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열왕기 기자는 왕들의 행적을 그들의 역사적인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성취나 업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들이 참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켰는지 여부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는 보편적인 왕록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므로 전례적으로 고대 근동이나 옛 동양의 왕국에서도 왕의 업적을 중심으로 왕록이 기술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열왕기에 수록된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에 대한 기록은 상식을 뛰어넘는 기록들이다. 예를 들어 유다 왕 아사 제 31년에 이스라엘을 다스린 오므리 왕은 이스라엘 역대 왕 중 역사적으로 가장 큰 업적들을 이룬 왕이다. 그는 사마라아를 이스라엘의 수도로 세운 장본인으로서 솔로몬 시대 국토에 가까운 면적을 넓혀 간 인물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에 대해 오직 6절의 짧은 기사를 기록했을 뿐이다(왕상 16:23-27). 단순히 “오므리가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25)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 (27)을 참고하라고 요약하고 있다. 정치, 경제 면에서 큰 업적을 남긴 여로보암 2세도 마찬가지 이다(왕하 14:23-29)

그러나 언약을 중심으로 부정적으로나 긍정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왕들의 기사는 세밀히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부정적으로는 오므리의 아들 아합 왕과 이세벨에 대한 기술이며(삼하 17:1-22:39), 긍정적으로는 히스기야 왕에 대한 기록이다(왕하 18:1-20:21). 이는 열왕기상하의 모티프가 지상 왕들의 업적에 있는것이 아니라그 왕들이 열마나 참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지켰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왕록에서 모든 평가가 언약이라는 빛으로 조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명기적인 (17:14-20) 왕의 모습을 참조점으로 모든 왕들이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열왕기상하는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언약을 파괴하며 세상 왕을 섬긴데 있음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경고가 오래 전부터( 26:14-45) 이야기 되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끝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권과 주권을 외면함으로써 북 왕조의 멸망과(왕하 17-18) 남왕조 유다의 패망으로(왕하 21) 비참한 막을 내린다. 그러나 소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열왕기하 마지막 장인 25장은 유다 왕 여호야긴이 바벨론 옥에서 풀려나 궁전의 예를 받게 하였다고 기록한다(왕하 25:27-30). 이는 다윗의 집을 통하여 일하실 하나님의 구원의 여운을 남기며 그 왕권이 계속 지속될 것을 은밀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4) 영원한 왕으로 다스리시는 여호와
영원히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개념은 그 기원이 언약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구약은 점진적으로 그 형태가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해짐으로써 미래의 재림을 통하여 온전히 성취될 것임을 일관되게 증거하고 있다.

구약은 지상의 왕들은 모두 멸망했지만 “만왕의 왕” 은 궁극적으로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심을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전지전능한 왕이시기 때문이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24:8). 또한 감히 그 앞에 그 누구도 설 수 없는, 경외로운 왕이시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그를 보자마자 떨며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6:5). 이러한 초월의 왕은 재림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전히 구현될 것을 신약은 거듭 증거한다. 그는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만왕의 왕으로 오르실 것이다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 17:14)

왕은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개념이나 은유나 풍유가 아니다. 혹은 고대 근동의 신들을 묘사한 왕권과 유사한 것도 아니다. 구약은 왕이 하나님의 성품이자 함축된 직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다스리시고, 보존하시고, 영원히 우리를 도우시며 보호하시며 구원하시는 참된 왕, 바로 그 자체이시다. 그 왕은 절대 주권을 가지고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낮고 낮은 베들레햄 마굿간에 오셔서 갖은 수모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 사건은 그는 선한 왕이요 한없이 인자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겸손하고 좋은 왕이심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 ( 95:3) 이시며, 열방의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만왕의 왕이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