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19, 2011

칼빈주의 예정론(1)

1 장 예정 교리의 서술

1. 하나님의 계획

예정 교리는 하나님의 목적이 절대적, 무조건적인 것이며, 이 세상의 어느 것에도 지배되지 않는 것, 또한 진실로 하나님의 마음이 영원의 목적에만 원인을 갖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의 방향을 정하고 역사의 과정을 세밀한 점에까지 지배하시는 위대하고, 비범하시며, 그리고 강력한 왕으로써 숭앙이 되시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적 지배아래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종국을 향해서 진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도달점은 모든 피조물이 향하여 나아가는, 「아득하고 거룩한 사건」인 것이다.

영원의 옛날부터 하나님은 지금 당장 하고 계신 것을 정확하게 하시려는 목적을 가지셨다. 하나님은 우주의 주권적 지배자셨다.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내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 ( 4 : 35)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있어서 보여준 이러한 대 원리를 창조와 섭리와의 영역에 있어서 논리적으로 시종 일관해서 이것을 적용한 것이었다. 종교개혁에 있어서, 요한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한 성정을 우리들은 예정이라 말한다. 하나님은 이것으로 인한 각 개인과 어떠한 관계가 되어 가는가를 그 자신안에 결정지으셨다. , 인간은 모두 동일 운명으로는 창조되지 아니하며, 어떤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그리고 어떤 자에게는 영원한 죽음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이 두 개 중의 어느 하나를 결말로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인간이 생명인가 죽음인가의 어느 쪽엔가 예정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비쇼프는 「세계는 혼돈하여 우왕 좌왕하고, 또 모든 사물은 맹목적으로 혼란과 뒤죽박죽의 무질서 안에 아무렇게나 쑤셔 쳐 넣어 둔 것 같이 생각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를 연쇄로 하고, 또 알고, 이러한 것들이 부조화와 불일치로 보이는 장소에서, 완전한 조화로 생겨나게끔, 이것을 통치하시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현대는 인간을 높이 끌어올리고 하나님에게는 다만 한정된 부분을 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AA하지가 「새로운 신학은 낡은 신학을 좁다고 비난하고, 하나님의 예정의 교리를 낡은 신학자들이 조작한 것이라 내어버리고 오늘날의 문화인에게는 만들만한 것이 못 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 시작한 일은 아니다. 마치, 올빼미가 일시적인 일식을 한 밤중으로 잘못 알고 자기에게 안 보이는 것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거라 믿고 경솔하게도 독수리를 조소하는 따위다」라고 말하고 있는 그대로인 것이다.

무한의 지혜, 무한의 힘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명확한 계획 없이 세계를 창조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와 같이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 계획은 세계의 모든 부분에까지 닿아 있어야만 되기 때문이다. 단지 하루만에 만들어진 것에 불과한 인간 모든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인간마저도 행동하기 전에는 계획을 세우지 않는가? 계획도 목적도 갖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기업이 크면 클수록 우리들에게는 면밀한 계획이 더욱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의 모든 사업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계획 없이 배를 만들고, 계획 없이 철도를 부설하고, 계획 없이 국민을 다스리려고 하는 사람은 정신착란자라 간주될 것이다. 만일 이것이 인간에 관해서 진실하다면, 하나님에 관해서는 더욱 진실하다. 우리들은 하나님이 이 우주에서 행하는 전반에 걸친 “계획없이” 이것을 창조하시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만일 하나님이 사건의 과정을 예정하지 않고, 아직 정하지 않은 어떤 것의 결과를 기다린다고 할 것 같으면, 하나님의 예정은 영원도 불변도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주의 자는 하나님이 계획을 갖는 것을 부정한다. 알미니안주의 자는 하나님은 총괄적 계획은 갖지만 특정한 계획은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칼빈주의 자는 하나님은 모든 시대의 모든 사건까지도 포함하는 바 특정한 계획을 가지신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계획의 완전성을 부정한다면 무신론을 막아낼 수 있는 견실한 방벽은 어느 곳에도 발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하나님은 이 질서를 갖고 창조의 대업을 완성시키셨다. 그 하나님이 선택하신 계획을 우리들은 하나님의 예정 혹은, 하나님의 결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큰 계획을 잘 생각할 때 우리들은 그것을 계획하고, 그리고 수행하시는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영원한 지혜와 무한한 능력에, 찬양을 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2. 하나님의 주권

생각이 깊은 많은 사람들은 어떤 주권이 자기의 생명을 지배하고 있는 것을 인정한다. 그들은 이 세상에 태고나고 싶었던가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가 물어보지를 않았다. 또 그들은 언제 어디서 무엇으로 태어나고 싶은가도 질문을 받지 않았다. 30세기에 태어나는게 좋은가, 홍수 전이 좋다든지, 백인이 좋은가 흑인은 어떤가 라든지, 미국에서 나는 것이 좋은가, 중국에서 나는 것이 좋은가 라고도 질문을 받지 않았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일체의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의해서, 그 만드신 만물의 절대적 소유자, 긍극적 주재자이신 것이다. 만일 이 세상의 왕의 권력이 그 왕국의 법률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나라의 율법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성경에는 하나님은 우주통치의 왕좌에 앉아계시는 전능의 하나님으로 우리들에게 표명되어 있다.

하나님의 전능은 세계의 경과가 하나님의 계획에 일치한다는 것의 확실한 보증이 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전능의 조물주는 한 가지로 또 만들어진 모든 것의 절대적 지배자로서 나타난다 하나님은 영원한 왕으로서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29 : 20)

하나님의 힘은 불변이다. 하나님은 전력을 다해서 인류와 항쟁을 계속하지만 그리고도 그 목적을 달하지 못한다든지 하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심한 모독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대의 경향은 인간의 의지의 자율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의 교리를 배척하는 것이다. 가령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간다든지, 하나님이 괜한 노력을 한다고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피조물의 수준에까지 끌어 내리는 것이 된다.

3.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섭리란 것은, 하나님의 전 피조물과 그 모든 행동의 가장 깨끗한, 슬기로운, 강력한 유지와 통치다. (웨스트민스터 소교리 문답 11)

성경전체를 통해서 자연의 법칙, 역사의 과정, 개개인의 저마다 다른 운명 등은 언제나 하나님의 섭리적 지배로 돌아 간다. 모든 것은 하늘에 있는 것도 땅에 있는 것도, 사람으로부터 세미한 원자에 이르기까지 틀림 없는 섭리에 질서 있게 되어져 있다. 우리 각 개인이 언제 어디서, 어떤 사정 아래 태어나서, 생활하고 죽어야만 되는가를, 또 우리들이 남자로 태어나는가 여자로 태어날 것인가, 혹은 희게, 검게, 어질게, 어리석게, 모든 하나님이 결정한다는 것은, 거의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바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것을 가지고 그가 바라는 바를 해 내신다. 혹은 신앙을 통해서 구원에 인도되며, 다른 자는 불신앙 안에서 멸망으로 버림을 받는다. 영적이거나 지상적이거나 이러한 하나님의 은사를 받는 자는 순수한 은혜에 의해서 이것을 받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은사를 받지 못하는 다른 자에 관해서는, 단지 하나님이 그것을 주기를 꺼린 것이었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은혜를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는 없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 목적 달성을 위해서 그들을 쓰신 것이다.
하나님은 단순한 우주의 방관자는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고, 그리고 모든 곳에 계시고, 또 활동하신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지하는 기반이며, 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힘이다.

모든 일은 진전하여 모두가 예정된 결말로 향하는 것이다. 윌필드 박사가 말한 것 같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란 종을 환영하기 위해서 리브가를 샘가에 오게 해서( 2410, 혹은 요셉을 애굽에 보내서( 45 : 850 : 20), 그리고 그것을 선으로 고치신 것이었다. 또 하나님은 바로의 딸을 갈대로 만든 상자로 인도하여 모세를 구출했던 것이며, 그러한 일은 절대로 우연한 사건이 아니었던 것이다.

성경은 이 섭리적 지배가 보편적이며, 강력하고, 슬기롭고, 또 깨끗하다는 것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해서 인간의 자유행동과 조화하는가는 아무 곳에도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들의 전부가 알아야만 되는 것은 하나님은 그 창조물을 지배한다는 것과 그들 위에 하시는 하나님의 지배는 그들의 성질을 무로 돌리는 따위의 것은 아니라는 사실, 또 하나님의 지배는 하나님 자신이 선하다는 것과 훌륭하다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4. 하나님의 예지

예정에 대한 알미니안주의자에 반대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예지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대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이 아시는 것이라면, 그 본질에 있어서 그가 예정하시는 일과 한가지로 본질적이고, 또 확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예정이 인간의 자유행동과 모순하는 것이라면, 또 예지도 마찬가지이다. 예정은 사물을 확정적으로 하지만, 한편 예지는 사물이 확정되어 있다는 전제에 서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 자가 하나님의 예지를 논증할 때에 미래의 사건의 확정성 또는 불변성은 승인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도 인간의 자유 행동의 문제를 논할 경우에는 자유행위자의 행동은 불확정하고 최종적으로는 그 사람의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를 즐긴다. 이것은 분명히 모순된 입장이다. 인간의 자유행동이 불확정이라 주장하는 견해는 인간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는 것이 된다.
하나님의 예지의 완전과 불변성과를 부정하는 것은 피조물로 인해서 하나님 자신이 실망하고, 또 패배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 된다. 그리고 알미니안주의가 하나님의 예지를 부정하지 않는 한 칼빈주의의 시종일관한 논리 앞에는 무방비로 서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예지는 확정을 포함하고, 확정성은 예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미래에 관한 예정을 안하셨다면, 창조 전의 영원한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러한 것에 관해서 확정성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예지와 예정과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예지는 예정을 필수조건으로 한다. 그러나 예지는 그것 자체가 예정은 아니다. 자유행위자의 행동은 그것이 예견되어 있으니까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게 확정적이니까 예견되는 것이다. 내가 「나는 내가 할려고 하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경우, 나는 이미 결심하고 있는 것과 나의 지식이 결심에 선행하지 않고, 오히려 거기 따르고, 그 위에 근거를 갖게 되는 것은 분명하다.

알미니안주의 자의 주장이 만일 올바른 근거에 서는 것이라면 예지도, 예정도 모두를 부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지는 예정 위에 서는 것이며, 하나님이 예지한 후에 예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너무나 예지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알미니안주의가 결국 아무 것도 논증할 수 없는 것이라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5. 모든 신앙체계의 개략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길을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체계는 사실상 다음의 세 가지가 있을 뿐이다.

(1) 보편 구제주의(Universalism)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해서 죽으셨다. 그런고로 전 인류는 이 세상에 있어서든 또는 미래의 시련을 통해서든 결국은 전부 구원되는 것이다.

(2) 알미니안주의
그리스도는 인류 각 개인을 위해서 - 구원되는 자를 위해서와 한가지로, 멸망되는 자를 위해서도 - 공평하게, 무차별하게 죽으셨다. 선택은 하나님의 영원적인 또는 무조건적인 행위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제공된다. 그 은혜를 받느냐 거역하느냐는 그 사람의 자유라는 것이다.

(3) 칼빈주의
모든 인간은 그 자신이 유죄하고, 부패하고, 절망적인 상태가 된다. 이 타락한 집단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신앙에 있어서 어떤 자를 구원으로 선택하고 불신앙 관계로 어떤 자는 버림 받는다. 그리스도는 순수하게 대리적인 속죄에 의해서 그의 백성을 구속하기 위해서 보내신 자이다. 성령은 선택된 자에게 그 속죄를 유효하게 적용하신다. 이렇게 모든 선택된 자는 확실히 구원을 받아들인다고 설명한다.

원래 인간은 그 목전에서 칭찬하고 그 사람을 추켜 올려서 기쁘게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악평하는 것보다는 순진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욱 환영을 받는다. 알미니안주의가 보다 대중적인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그 보여 주는 것이 냉혹하고 무섭게 느껴져도 그것이 보다 사실에 접근된 것이다. 우리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신앙체계를 발전시킨다는 자유를 갖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 박사는 말한다 「이러한 신앙사상 체계가 진리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은 그 어느 편이 우리들의 감정에 의해서 받아 들여지기가 쉽고, 또 우리들의 이해에 보다 그럴 듯 하게 보이느냐 하는 것으로 결정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어느 편이 성경의 교리와 경험의 사실과 시종일관 합치되는가에 따라서 결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라고.

6. 부당한 사변에 대한 경고

이 고원한 예정의 교리를 취급함에 있어서 거기 붙일 부당한 사변한 호기심에 대해서 여기서 조금 경고해 둬야만 하겠다.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주장은 그 자체가 지극히 복잡한 과제이기 때문에 인간의 호기심에 의해서 지극히 번잡한 것으로 인정되고 따라서 위험한 것이 되었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첫째로, 예정에 관한 지식을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보여주는 이상으로 얻어낼려고 할 때에는 통행 불가능의 길을 갈려고 하고 혹은 어둠 속에서 볼려고 하는 것과 한가지로 심한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마음에 새겨둬야만 된다. 하나님의 우주적 목적에 관해서 무지한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조언자로서의 자격은 없다.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을 알아 내려고 하는 것은 태평양을 헤엄쳐서 건너 가려는 것과 한가지가 된다. 인간이 하나님의 법칙의 신비를 해명하려 하고, 그리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데는 너무나 지식이 빈약하다. 우리들은 예정에 관해서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조금 알 뿐이지만, 그러나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하나님은 계시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들은 성경이 인도하는 곳을 따라가는 것이 안전한 것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