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19, 2011

칼빈주의 예정론(5)

4. 불가항력적 은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불가항력적 은혜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명으로 예정된 모든 사람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들만을 자기가 정하시고 적당하다고 인정한 때에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죄와 죽음의 상태에서 실제로 불러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총과 구원의 자리에 들어가게 하신다. 또한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있도록 영적으로 또한 구속적으로 계몽하신다. 돌과 같이 굳은 마음을 없게 하고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주셨다. 선을 원하게 하는 절대적인 전능으로써 그들의 뜻을 새롭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실제로 가까이 나오게 하신다. 이 때에 그들은 가장 자유롭게 나아오며 은총으로써 그것은 원하도록 변화를 받는다. (10:1)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인간은 그 자연의 상태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부패하고, 그 자신의 어떠한 힘에 의해서도 깨끗해질 수가 없고, 또 행복하게 될 수도 없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구원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에 의할 수 밖에 없다. 만일 죄인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려면 그는 새로운 성질을 받아야만 된다. 그는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으면 안된다(3:3). 그런고로 죽은 사람은 자기가 자기 몸을 운신할 수가 없는 것 같이 구원의 최초의 행동은 안으로부터 일어날 가망이 없다. 죄많은 인간은 자기를 구원하기 위한 원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하도록 충고하고, 격려하고, 호소하고, 도와주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었다.

구원은 마음의 변화를 분명히 포함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 변화를 중생의 씻음이라 부르고 있다. ( 3:5) 이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한 것과 한가지로 큰 능력에 의해서 행해지는 영적부활이다.(1:19,20) 그리고 이 변화의 주체는 새로 창조된 자라고 말한다.(고후5:17) 이러한 기록은 중생을 인간의 활동이라 보는 알미니안의 견해에 완전히 반대하는 것이다. 영혼의 갱신은 우리들에 의해서 되어지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영적 죽음에서 영적 생명을 향한 순간적인 변화이다. 이것이 일어나는 순간에 있어서 영혼은 나사로가 예수에 의해서 생명으로 되돌아 온 것과 마찬가지로 전연 수동적이 된다.

중생은 성격의 변화를 포함한다.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는 나무를 좋게 할 필요가 있다. 우리들은 자기의 육체적 탄생에는 전연 관여하지 않는다. 자기의 탄생을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로 받는 것 같이 우리들의 영적인 탄생도, 우리들 자신이 아무일도 하지 못하고,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로 받을 뿐인 것이다. 이 영과 육과의 탄생은 어느 것이나 우리들 자신의 힘, 혹은 우리들의 동의가 없이 일어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신앙에서 탈락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거역한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나님에게는 그것을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는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명령하셨을 때에 강한 힘이 그 명령을 효과적인 것으로 했다. 나사로는 먼저 목숨이 되살아나고 그리고 숨을 되찾고 먹었다. 이와 같이 죄 가운데서 영적으로 죽은 자도 먼저 영적인 생명으로 거듭나게 되어, 다음에 신앙과 회개가 주어지고,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선택된 자는 복음을 듣고, 그리고 믿는다 그것은 반드시 최초에 들었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정한 때에, 그러나 선택되지 못한 자는 들어도 믿지 않는다. 그것은 증명이 불충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내적 성질이 거룩한 것에 적대하기 때문이다.

물질세계도 영적 세계도, 한가지로 하나님의 창조이다. 물질세계에 있어서 물은 주권적으로 술이 되고, 문둥병자는 한 번 손을 대면 고쳐진다. 알미니안은 물질세계에 있어서, 하나님의 기적적인 힘을 승인한다. 왜 그들은 영적 세계에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의 지배를 넘어서는 것 같이 하나님의 힘을 부정하는 것일까? 육체의 눈은 한 번 장님이 되고나면 아무리 많은 강한 빛을 눈에 가져와도 시력을 회복할 수가 없다. 죄로 죽은 영도 또한 한가지다. 아무리 많은 복음의 진리를 제공해 봐도 그것으로 영적 시력을 갖게 되지는 않는다. 시력회복은 외과의사의 수술이나 또한 기적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으면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영혼의 거듭남에 의해서 아니면 절대로 복음의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것이다.

아담과의 계약에 있어서 인간의 운명은 그 자신의 행위에 달려 있었다. 우리들은 그 시험의 결과를 알고 있다. 이와 같이 인간은 올바른 생활을 할 때에도 자기 자신이 자기를 구할 수가 없었다. 하물며 인간이 타락한 후에 그 기회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알미니안의 큰 결점은 사람의 마음에 활동하는 성령의 초자연적 힘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일이다. 만일 알미니안이 말하는 것같이 하나님이 모든 인간의 회개를 열심히 구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바로 이 구속 사업에 큰 실패를 하고 계신 것이 된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인구중에 하나님이 한 사람의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마 25명의 인간을 구원에 실패하고 그들을 지옥에 보낸 계산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하나님의 존엄을 손상하는 것이다. 전능한 하나님의 창조력을 이와 같이 죄인이 파괴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는다. 부활의 주는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28:18)
이 권세는 무한하다.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도다」(4:35)

성경의 어디에 하나님이 힘을 다해서 사람들을 납득시키려고 충고하고 주장해도 그 피조물인 어떤 인간에게 자기 자신의 목적을 성취할 수가 없었다고 되어 있는가? 만일 하나님의 소명이 유효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나는 모든 이간이 구원되는 것을 바란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뜻이 아닌 까닭으로 나는 드디어 할 수가 없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라 상상하는 따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에 순응한 기독교 신자라면 하나님이 그와 같이 자기 자신의 피조물에 좌우 되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구원에 관해서 그리스도가 「만유 안에 계시느니라」는 바울의 말(3:11)에 첨가하시기를 구원 사업에 관해서 인간 자신은 전연 무력하며, 자기 자신 안에는 구원에 해당될 만한 아무 가치도 없다고 말해도 된다. 우리가 복음은 충고가 아니고 좋은 소식이란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우리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은, 우리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들을 구하기 위해서 무엇을 하셨는가를 말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주 예수께서 아버지 되신 하나님이 하신 구속의 사역을 「다 이루었다」고 선언한 그 의미는 「전부 성취했다」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나 알미니안의 입장은 트프레디의 말과 같이 자유로 이것을 받아들이고 또는 거절하는 힘을 지니는 자는 그리스도를 향해서 「아니, 당신은 속죄를 이루었다(성취했다)는 것이 아니고 다만 그 일부를 성취했을 뿐이었고 그 위에 인간 자신이 무엇인가를 더해야만 된다. 그렇게 못하면 당신이 해낸 전부는 무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말해야만 되는 것이다.
알미니안의 체계에는 언제나 보편주의적인 경향이 농후하다. 만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한결 같이 사랑하고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시고 성령이 속죄의 은혜를 모든 인간에게 가할 수가 있다면 분명히 다음의 두가지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1) 모든 사람은 한결같이 구원된다.
(2)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서 하는 일에 일체의 일은 인간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은 다만 인간이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데 맡겨둔다.

전자는 성경에 모순된다. 후자에 관해서 말한다면 만일 하나님이 그 구원의 모든 사역을 하신 후에 이것을 「받아 들이든가」「거부하든」간에, 인간에게 맡겨두고 판정만 한다면, 전능한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거부권을 인간에게 주고 그리고 구원은 결국 인간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 된다. 이 사상 체계에서는 하나님이 아무리 구원 사업의 대부분을 하시려고 해도 결국은 인간의 최후가 요인이 된다. 구원에 이른 자는 그 자신에게 무엇인가 소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며 멸망하는 자에 대해서 무엇인가 자랑할만한 것을 갖고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멸망하는 자에게 경멸의 손가락을 내밀어 「너는 나와 한가지로 좋은 기회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너는 거절하고 나는 받다 들였다. 그런고로 너는 괴로워하는 것이 당연하다」라고 자랑하게 된다. 이것은 바울이 말한 대로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이로니라 라고 한 말씀과 칼빈주의의 교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칼빈주의의 인간은 믿어도 하나님에 대해서 돌아가는 것을 그 뜻과 반대로 강제당하고, 구원의 일에 관해서는 인간이 기계와 한가지가 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목석과 같이 또 노예와 한가지로 취급되어 그 의지와 반대로 구원을 강제로 구하도록 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 마음은 성령의 빛에 비쳐 하나님에 대해서, 자기에 대해서, 죄에 관해서, 전 의식이 변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보내서 그 사람이 영원토록 하나님의 자비심과 은혜를 찬미하고 인격적으로 순종하도록 기분 좋은 속박 아래 놓아 두시는 것이다.

중생된 자는 새로운 동기와 소원에 의해서 그 자신이 지배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또 과거에는 미워한 것을 지금 사랑하고 요구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어떠한 외부적 강제로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영혼 안에 창조되는 바, 새 생명의 원리에서만 달성되고 그리고 다만 그가 구하는 영의 식물에 의해서만 그 혼은 만족이 되는 것이다.

영적율법은 선행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을 무서워하는 것이다. 여기 대한 유비는 세상에 흔히 볼 수 있다. 하나의 예로서 법률 아래 있는 시민과 범인과를 비교해 보자, 법률 아래 있는 국민의 대부분은 그 국가 또는 민족의 법률을 의식하지 아니 하고 그날 그날을 보내고 있다. 그에게는 위정자나 경찰관이 친구 같이 보인다. 그들은 국민이 존경하고 기뻐하고 권하는 관헌을 대표하는 것이다. 그는 자유로운 인간이다. 국민에게 있어서 법률은 그의 생명을 보호하고, 그가 사랑하는자, 또 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극단적인 비유이긴 하지만 악인에게 있어서는 어떠한가, 그 사정은 전연 다르다. 그는 아마 일반의 사람들 보다도 더 자세하게 법률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법률의 제재를 벗어나기 위해서 그리고 판결을 무효로 하기 위해서 법률을 공부한다. 그는 언제나 공포가운데 살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그 밀실에 방탄 커텐을 달고 경찰관이나 그밖의 사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겁내며 언제나 권총을 가지고 다닐 것이다. 그는 언제나 속박 아래 있다. 그의 자유 사상은 경찰관을 물리치는 일이고, 법정을 매수하는 일이며, 그가 한 그 일에 관해서 사회의 습관과 법률을 비판할 것이다.

이 불가항력적 은혜란 말은 인간위에 있는 압제적인 힘이 가해짐으로서 인간이 그 뜻에 위반되어 행동할 것을 강요당하는 것 같은 암시를 받기가 쉽고 잘못되기 쉬운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의미하는 바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선택은 하나님의 힘에 의한 감화이며 자비로운 선택의 행위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헤이 와트(Hewlitt)박사는 과거에 연주된 가장 아름다운 음악에 의해서 혹은 지축을 뒤흔든다고 생각할만큼한 큰 우뢰에 의해서 무덤 속의 시체가 소생할 것인가? 죄와 허물에 의해서 죽은 죄인이 율법이란 우뢰에 의해서 일으킴을 받을 것인가?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 13:23) 에 있는 것과 한가지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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