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December 21, 2011

왕이신 하나님

1. 사사기의 메세지
사사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대로 알려져 있다. 사사기 저자는 그 이유를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기 때문이라고( 21:25) 설명하고 있다. 견고한 왕권은 나라의 번영과 안정을 상정했고, 그 반대는 당연히 흔란과 파탄의 상황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구약에 기록된 언약의 주요 내용은 후사와 땅과 민족으로 대표된 영원한 이스라엘의 왕국 설립이라고 말할 수 있다( 15). 그러나 구약은 죄로 인한 이스라엘의 패망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언약의 실제 왕국은 열방의 왕 여호와가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였음을 암시하기도 하나, 죄와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언약의 은혜를 분명히 부각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진적 계시과정에서 사사들의 이야기는 하나의 예표로서 가나안 정복 이후 이스라엘의 왕권 설립과정에 나타난 죄-심판-은혜의 3부적 신학구조를 가장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 사사기 신학을 논하기에 앞서 신명기부터 전면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하는 가나안 정복의 신학적 의미와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순종으로 얻어지는 땅
여호수아서는 아브라함의 언약 중 땅의 약속이 성취됨을 기록하고 있다. 땅이 왕국의 가장 기본적이고도 필연적인 자산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땅을 정복함으로써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의 나라를 소유하게 된다. 신명기와 여호수아서는 초기에는 그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땅의 정복이 순조롭게 이루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순종의 모습은 사사기에 이르러 사라지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먼저 땅의 정복을 둘러싸고 이스라엘이 어떻게 순종했는지를 신명기와 여호수아서 에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신명기는 정복해야 할 땅과 정복하지 말아야 할 땅에 대해 이스라엘이 어떠한 자세를 취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신명기라는 책명은 헬라판 구약성 경인 70인역 (LXX) 의 번역으로서 신명기 17:18 의 “이 율법서" (δεθτεονομιον τευτο, 두 번째 율법서)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는 새로운 율법이 아니라 요단동편 모압 땅에 이르러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둔 광야 2세들에게 갱신된 시내 산 언약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명기는 그 문학적 유형상 크게 세 개의 설교 양식(1-4, 5-26, 27-30)으로 구성되어 있고 두 편의 시 (32-33)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신명기가 단순히 정적인 법률 조약 보다는 생명력 있는 설교를 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3편의 설교는 “쉐마 이스라엘" ( 6:4-5; 10:12-13), 즉 “들으라 이스라엘아”라는 주제 아래 묶을 수 있는데, 이는 “모세가 요단 저편(에서) .... 이스라엘 무리에게 선포한 말씀(1:1)인 것이다. 그리고 배경은 “제사십 년 십일 월 그 달 초일일에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자기에게 주신 명령을다 고하였으니(1:3)라고 함과 같이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40년 중 마지막 달의 사건들이 중심이 된다.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이 과거-현재-미래의 3부적 구조로 구성해 볼 수 있다.

주제: “쉐마 이스라엘" (신명기 6:4-5; 10:12-13)

1. 과거: 역사적 교훈 (1-4, 9-10)
1) 호랩과 벤브올사이에서 일어난 일(1-3)
2) 율법 순종과 우상숭배 금지 (4)

2. 현재: 모압에서의 시내 산 언약의 갱신
1) 율법갱신(5, 11)
2) 광야 2세들을 위한 율볍 확장(12-26)

3. 미래: 약속의 땅에서의 삶
1) 이스라엘의 미래 (27-30)
2) 모세의 고별설교(31-34)

이 설교 세 편 중 첫 번째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 선명기 1:5-4:43은 주로 과거를 통한 역사적 교훈을 담고 있다. 특별히 이제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요단 동편 헤스본의 왕 시혼과 바산의 왕 옥의 패배를 언급함으로써 과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땅 (15:18-21; 1:7-8)의 정복을 확신하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의 경험을 통해 자신들의 의지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에스골 골짜기(포도송이의 골짜기)의 풍요로움을 보고도 하나님을 불신하는 결과를 낳았고( 1:25-28), 그들의 속셈으로는 산지의 아모리인들을 전격 습격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1:41-44). 그리고 그들이 끝내 가데스와 시내 산 사이 에서 40년을 방황하게 되었던 것이다( 1:46). 그러므로 모세는 2장과 3장에서 역사적 서언을 통해 가나안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이제는 모든 불신을 버리고 절대 하나님의 말씀만을 따라 행하라고 교훈하고 있는 것이다.

가나안을 향한 그들의 행진이 하나님이 정하선 피할 곳과 정복할 곳에 따라 말씀대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쉐마 이스라엘, 6:4-5).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경외하고, 행하고, 사랑하고, 섬기고, 지켜야 한다( 10:12-13). 그들의 의향대로 피하고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입증해 준 역사적 사건( 1:1-46)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며 순종해야한다. 순종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왕권을 상징하는것이며 오직 순종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길이다. 이스라엘은 호랩에서 가데스 바네아까지의 실패( 1:19-46)를 통해 언약의 성취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매킨토시 (C. H. Mackintosh)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그들의 타락한 의지가 무너짐으로 순종(subjection)을 배우게 되었고,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함으로써 묵종 (acquiescence)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깨달으면서 기쁨(rejoicing)을 얻게 되었다고 진술한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피하라 하실 때 피하며 정복하라 하실 때 정복하는 순종과 묵종과 기쁨을 얻게 되기를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2) 정복하지 말아야 할 땅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간 방황을 마치고 이제 가나안 정복을 위하여 가데스 바네아에서 요단 동편으로 북진하기까지 에돔(세일)과 모압과 암몬의 땅을 지나가야 한다. 이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그들과 대결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그곳은 정복의 땅이 아니라 피할 땅인 것이다.

(1 ) 에돔( 2:1-8; 20:14-21)
홍해 길로 광야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여러 날 동안 세일(에돔의 초기 명칭) 지방을 두루 행하였다(2:1). 이제 광야에서 죽은 출애굽 세대들에 이어 광야 2세들이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되었다. 물론 그들도 전 세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반역한 자들이다. 그러나 아브라함과의 언약이 지켜져야 한다. 또한 이는 아담( 3:21)과 요나(요나 1:1; 3:1)와 베드로( 21:16)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신,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기도 한다.

세일(에돔) 땅을 지나야 하는 이스라엘은 그들과 다투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는다( 2:5). 그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땅이 아니다. 더구나 에돔( 25:21-26)은 이스라엘의 동족인 에서의 자손( 2:4; 1:11; 10:12; 1:2) 이며 세일 땅은 하나님이 에서에게 기업으로 준 땅(2:5) 이기 때문에 그들과 다투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만 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에돔에게도 주셨다. 케언스(Ian Cairns)가 지적한 것과 같이 그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God of Israel) 이신 동시에 열방의 하나님 (God of Nations)이시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1:1) 여호와 하나님은 천지의 주재로서( 17:24) 모든 땅과 모든 백성을 다스리시는 통치권을 가지고 계신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시고 온땅에 거하게 하시며 저희의 년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신” ( 17:26) 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양한 국경과 문화와 인종을 서로 존중할 수 있어야 하며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된다. 땅끝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증인이 되고 복음을 나누는 것은 분명 제국주의 개념과 구별 되어야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열방의 왕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메마른 광야에서도 이스라엘에게 에돔 땅을 피해갈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미리 충족시켜 주셨다. 이스라엘은 돈으로 그들에게서 양식과 물을 사서 먹고 마실 수 있을 정도로( 2:6) 풍족하였다. 신명기 기자는 하나님 여호와가 그들에게 복을 주셨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한 것 같으나 그 모든 행함을 아시고 그 곳에서도 그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다( 2:7). 하나님 이 그들을 아셨다"는 히브리어 어법은 구약에서 종종 문맥상 “보살피다“함께하다“예비하다“보호하다”로 번역된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그들의 생각을 통촉하여 주의 오른손으로 인도하시며 붙드선다( 139:1-10). 하나님이 피하라고 하실 때, 그가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실 때, 그가 양보하고 용납하라고 하실 때 그는 벨써 우리에게 모든 것을 예비하시고 우리를 선하고 영원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139:24). 그러므로 모세는순종하여 세일 산에 거하는그들의 동족 에서의 지손을 떠나서 아라바를 지나 엘닷과 에시온게벨 곁으로 지나 행하고 돌이켜 모압 광야 길로 진행하게 되었다( 2:8).

(2) 모압( 2:9-15; 21 :12-15; 22:1-25:5)
이스라엘은 모압과도 싸워서는 안 되었다. 본문은 에돔과 ‘다투지 말라” ( 2:5), 모압과 ‘다투지 말라" ( 2:9), 암몬과다투지 말라" ( 2:19)는 단편적 술어들과 대구를 이루고 있다. 모압 땅 (요단 동남편에 있는아르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혈통인 롯( 19:37; 21: 15 , 28)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선 땅이다( 2:9). 그러므로 모압을 피해야 하는 이유도 에돔을 피해야 하는 이유와 다름이 없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God of Israel)은 열방의 하나님 (God of Nations) 이심이 다시 한 번 부각된다. 세계의 지정학적인 모든 경계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아래 있다. 이 모압단편 속에 삽입된 신명기 2:10-12은 천지의 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우주적 속성을 강화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열방의 왕이신 것이다. 원래 모압에는 아낙 족속과 같이 거인족인 엠 사람들(무서운 자들)이 살고 있었고(2:10-11) 에돔 땅 세일에도 호리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땅은 하나님이 에돔과 모압에게 기업으로 주신 땅 이므로 그들이 정복하였고, 이는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주신 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일반인 것이다" ( 2:12). 즉 이스라엘이 에돔과 모압을 피해 가야 하는 이유와, 반대로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는 이유가 근본적으로는 동일하며 하나님의 “일반된"(just as) 행위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절대주권 아래 있다.

신명기 2:8-15에서 모압단편은 거기서 일어난 여러 가지 중요한 사건들을 생략하고 있다. 그 예로 발람 선지자와의 대립을 들 수 있다( 22:1-24:25). 이는 본문이 사건의 기술보다는 사건에 대한 신학을 목적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세는 이 말씀을 통해 언약을 갱신하며 가나안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이 율법을 준수해서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모압단편은 이제 하나의 중요한 암시로 마무리된다. 언약을 준수하지 못하여 광야에서 다 멸절된 출애굽 1세들에 대한 비극이다(2:13-15)-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중에서 멸하신 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 ( 2:15).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반역했다. 이는 케언스가 역설한 것과 같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멸하심 (destructiveness of God) 이라기보다는 스스로의 멸절(self-destruction)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뒤로 한 채 의미대로 무엇을 피하며 무엇을 정복할지를 결정하는 인류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방황하며 죄로 인해 스스로 멸절해 가고 있는 것이다. 왜 모압을 피해야 하고, 왜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는가, 인간은 왜 도덕적이어야 하나? 그 궁극적 해답은 인간의 도덕적 기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참된 해답은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있는 것이다.

(3) 암몬( 2:16-25; 21:24)
본문은 다투지 말아야 할 마지막 대상으로 암몬을 기술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에돔과 모압단편에서 기록된 것과 동일하다. 암몬 땅도 하나님이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다( 2:19). 이 짧은 이야기에 삽입된 신명기 2:20-23은 계속 일관되게 부각되고 있는 하나님의 열방에 대한 주권적 통치를 다시 한 번 암시해 준다. 암몬 땅도 원래는 르바임의 땅이었다( 2:20) “그 백성은 강하고 많고 아낙 족속과 같이 키가 크나 여호와께서 암몬 족속 앞에서 그들을 멸하셨으므로 암몬 족속이 대신하여 그 땅에 거하고 있다" (2:21), 이는 세일에 거한 에서 자손 앞에 호리 사람을 멸한 것과도 일반이고 ( 2:22), 더 나아가 가사 촌까지 이르러 살았던 아위 사람을 멸하고 그 땅을 갑돌(크레타 섬)에서 나온 자들에게 준 것과도 일관된다. 이러한 삽입은 이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는 이유와 정당성을 강화시킨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맺어진 언약의 성취인 것이다.

에돔과 모압과 암몬의 단편들은 이제 가나안을 정복해야 하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하게 해준다. 이제 하나님이 르바임과 호리를 에돔과 모압과 암몬에게 붙이신 것과같이 헤스본 왕 시혼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심으로써(2:24-25) 가나안 정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피하게 하시는 이도 여호와이시고 정복하게 하시는 이도 여호와이시다.

3) 정복해야 하는 땅
가나안의 정복은 요단 동편을 따라 남에서 북으로 헤스본( 2:26-37; 21:21-30)과 바산( 3:1-11; 21:33-35)을 정복함으로써 시작된다 이 두곳의 정복은 앞으로의 가나안 정복을 마지막으로 명백히 확신시켜 주는 사건이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점진적인 훈련과 경험을 통해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게 하신다. 이스라엘은 에돔과 모압과 암몬과의 타협 , 그리고 헤스본과 바산의 정복 경험으로 이제 가나안 정복에 대한 준비를 마무리한다.

그러므로 폰 라드(G. von Rad)는 신명기 2:24-39이 약속된 땅의 정복 (The Conquest of the Promised land)의 주제를 본격적으로 열고 있다고 주장한다. 가나안의 정복은 하루 아침에 시작되어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긴 세월에 걸쳐 크고 작은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파란만장한 에피소드가 선행된 사건이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즉각성과  수동성을 보증하지 않는다. 이제 이스라엘은 말씀에 순종하여 에돔과 모압과 암몬을 피했듯이 또한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의 약속을 선뢰하여 헤스본과 바산을 점령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는 과정에는 잘 취해야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잘 버려야 하는 것도 있다.

(1 )헤스본 ( 2:26-37; 21 :21-3)
모세는 헤스본 왕 시혼에게 사자를 보내어 평화적으로 그 땅을 통과하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2:26-29), 그러나 시혼은 이를 거절해서 이스라엘에게 전쟁의 동기를 부여해 준다. 그 땅은 싸워서 얻어야 한다( 2:24), 신명기 기자는 이러한 상황을 여호와 하나님이 시혼 왕을 이스라엘 손에 붙이시려고 “그 성품을 완강케 하셨고 그 마음을 강팍케 하셨다" ( 2:30)고 표현하고 있다. 구약에서 그 누구의 마음을 강팍케 하셨다”는 히브리어 어법을 문자 그대로 결정론으로 이해하는 것은 해석학적 오류라 할 수 있다. 크레이그(Peter C, Craigie)가 시사한 바와 같이 이러한 술어는 역사에 대한 고대 히브리인들의 신학적 표현이자 하나님의 섭리를 반영하는 표현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출애굽 과정에서 바로의 마음이 강팍해진 것과 유사하다. 출애굽기 기자는 바로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완강케 했다고( 8:15) 기록할 뿐만 아니라 상황적으로 강팍케 되었고( 8:19) 더 나아가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완강케 하셨다 (10:1)고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논리를 초월하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긴장을 포착하게 된다. 하나님은 시혼을 이스라엘 손에 붙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시혼의 마음을 강팍케 하신다. 더 나아가 이제 승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나아가 그들과 싸워야 한다 (2:33) , 이스라엘은 자발적인 의지와 순종과 책임감으로 실제 전쟁에 임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을 경험한다. 믿음은 순종과 행위를 통하여 역사한다. 믿음 앞에서 모든 장애물들은 궁극적인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헤스본 단편에서 제일 어려운 주해는 전반적인 가나안 정복에서도 반복되는 남녀유아의 진멸 문제이다( 2:34) , 여기서 우리는 해결할 수 없는 윤리적 의문으로 갈등하게 된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유아까지 진멸하시며 비윤리적인 전쟁의 정당성을 말할 수 있는가?

메릴(Eugene H, Merrill)은 성전에서의 남녀유아 진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그들에 대한 심판은 죄로 인해 정당하다( 9:4-5), 둘째,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일을 마지막까지 고집했다 ( 7:10), 셋째, 진멸하지 않고는 이스라엘이 그들의 우상숭배와 부도덕적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20:17-18)

다른 시각에서 이 문제를 접근해 보자. 먼저 하나님은 에돔과 모압과 암몬에게도 땅을 기업으로 주셨듯이 온 인류를 사랑하심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오히려 4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 노릇하게 하시며 아모리 족속의 회개를 기다리셨다 ( 15:16), 니느웨 백성을 구원하신 것처럼 아모리 족속도 회개 했다면 심판을 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인간의 윤리적 잣대가 과연 하나님의 도덕성을 심판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먼저 던져야 할 것이다. 모든 인류는 이미 아담의 타락으로 심판의 대상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이다. 아브라함은 바로 이 점을 우선 전제하고 나머지를 생각하였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 (18:25). 바울 사도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윤리적 판단이 절대적이며 궁극적일 수가 없음을 천명한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 9:20). 구속사를 통한 계시의 초기 과정에서 가나안 정복은 인간의 윤리적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과 공의가 공존한 불가결한 사건이었음이 분명하다. 우리는 그 진멸을 통하여 죄와 종말론적인 심판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구약은 신정(Theocracy)의 형식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 5:17; 24:44). 율법의 원리인 사랑( 6:4-5)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완성 되었으므로 ( 22:37-40; 13:8)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 사역은 겸손과 섬김과 떨림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정복하는 것이다( 1:8).

(2) 바산( 3:1-11; 21:33-35)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피할 곳과 정복할 곳으로 진군하며 약속의 땅을 정복하게 된다. 이제 그들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진행한다. 헤스본 정복에서도 승리의 열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금하신 압복 강가와 산지에 있는 성읍에는 가까이 가지 않았다( 2:37). 순종이 승리의 주요 열쇠가 된 것이다. 이제 그들이 정복할 두 번째 지역은 요단 동편 북쪽 지방인 바산이다( 3:1).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헤스본의 경험을 상기시키시며 그들의 믿음을 세워 주신다( 3:2). 우리는 여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도우심을 너무 쉽게 잃어버릴 때가 많다. 광야에서 불신앙으로 멸절된 백성들은 홍해의 기적을 잊어버린 자들이었다. 하나님은 헤스본 왕 시혼에게 행한 것과 같이 이제 바산 왕 옥에게도 행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 3:2). 바산에서도 헤스본의 진멸은 반복되었다( 3:3-7), 여호와 하나님은 르바임과 호리를 멸하시고 그 땅을 에돔과 모압과 암몬에게 주셨듯이 이제 르바임 족속의 마지막으로 남은 바산 왕 옥을 멸절하고( 3:11)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주셨다. 이제 이스라엘은 요단강을 건널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는 그들의 의지와 계획과 열성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이 선행하는 적극적 행위로 성취된 사건이다.

4) 가나안을 바라보며
요단 강 동편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이제 가나안으로 진군하기에 앞서 땅을 분배하기 시작한다( 3:12-22; 32:1-42), 이 분배는 필요에 따라 집행 되었고 공평하게 한 지파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를 위해 세밀히 계획되었다. 육축이 많은 르우벤 자손, 갓 자손, 므낫세 반지파는 땅을 먼저 기업으로 받아 처자와 육축을 요단 동편 성읍에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군인들은 무장하여 그들의 형제들도 가나안에서 하나님 여호와가 주시는 땅을 얻어 기업을 삼고 안식하도록 무장하고 선봉으로 요단 강을 건너가기로 한것이다 ( 3:18-20). 하나님의 축복과 안식은 나누어져야 한다. 개인의 정착은 타인의 정착을 위한 것이다.

모세는 요단강 동편에서 40년 간의 광야 생활을 정리하며 이스라엘의 정착 시초를 증인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 모세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는 요단 저편을 건너 “아름다운 땅, 아름다운 산과 레바논” 보기를 간구하였으나 (3:25) 하나님은 이를 금하신다 “너는 비스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 ( 3:27). 모세는 이에 순종하여 그의 지도권을 여호수아에게 넘겨 준다( 3:28), 이제 모세의 사역은 벤브올 맞은편 골짜기에서 마무리된다( 3:29), 하나님은 그에게 벤브올까지만 사역을 감당하게 하셨다. 모세는 분명히 가나안을 바라보며 더 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제 그에게는 하나님의 때에 남은 일들을 여호수아와 하나님께 맡기는 지혜와 덕이 필요했다. 또한 모세는그렇게 함으혹써 구약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남게 된 것이다. 참된 리더십, 거기에는 순종과 절제와 나눔의 지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과정에는이러한 순종과 절제를 갖춘 리더들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나안을 바라보며 사는 신앙인들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피하라 하실 때 피하며, 정복하라 하실 때 정복하며, 그만두라 하실 때 그만둬야 한다. 그리고 공정하게 분배하고, 일에 대한 욕심을 절제하며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는 덕망을 갖춰야 신앙의 땅을 정복할 수 있는 것이다.

5) 약속의성취
신명기에 나오는, 땅에 대한 정복은 여호수아서에서 완성된다.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 라는 구속적 의미를 지녔다. 여호수아서의 주요 내용을 분석해 보면 오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이 절대적이고 일방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의 순종을통해 성취됨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런 언약(약속)을 맺으셨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햇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브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 15:18-21) , 땅에 대한 이러한 약속은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된, 후사와 민족과 땅에 대한 3대 약속 중 하나이다. 이제 여호수아는 민족을 이루어 약속된 땅을 말씀대로 정복하고 취함으로써 언약의 이행을 증명하게 된다. 애굽에서 민족을 이룬 이스라엘은 땅을 얻게 되고 끝내 후사인 다윗 왕조를 통해 나라를 건설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여호수아는 그 과정에서 일차적으로 땅의 약속을 성취하게 된다. 그는 가나안 땅 정탐으로 시작한 가나안 정복을 성공리에 마치게 된다 “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따라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 11:2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 21:43) , 이러한 땅의 정복은 아브라함에 이어 모세에게 약속하신, 즉 이스라엘의 열조와 맺으신 언약의 성취를 일관적으로 보여 주는 것인 동시에 남은 약속의 미래적 성취를 보증하논 것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이렇게 항상 진행형 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과정인 셈이다. 언약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미”와 “아직”이 이어지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여호와 하나님 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열방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서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언약 백성들은 거룩하게 구별된 자답게 세상과 싸워 여호와를 더욱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분을 섬겨야 한다는 경고를 듣게 된다( 23:11-24:28) , 이스라엘은 그 이웃 나라들과 같이 민족을 이루어 땅을 차지하고 한 나라를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다스리게 될 다윗의 왕조는 “후사인 메시아의 그림자가 되고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의 나라의 예표가 되는 것이다. 가나안 정복은 이스라엘 민족과 땅은 하나님의 나라의 유형이며 그들의 참된 왕은 여호와 하나님 이심을 암시하고 있다. 오늘날도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긴다면 우리의 모든 삶과 지경이 작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성경의 구속사는 왕이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로 삼고 있다. 백성, , 후사, 이 모든 개념과 실제가 구속(Redemption)이라는 통일된 하나의 신학적 유기체를 이루고 있다. 그 예로 오경의 출애굽이야기에서 구속의 예표를 볼 수 있고 여호수아의 약속의 땅 이야기에서 구속의 성취 과정을 볼 수 있으며, 마침내 신약의 복음서를 통하여 왕의 왕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와 구속의 완성을 볼 수 있다. 신약은 이스라엘 왕국의 설립이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조명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가나안 정복( 21:43-45)은 “하늘의 속한 모든 신령한 복" ( 1:3)을 기업으로 얻게 될 미래의 왕국을 예고한다. 기적을 동반한 애굽에서의 구속과 가나안 정복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기적적인 구속사의 씨앗을 보게 된다( 3:7-4:11). 요단을 건너며( 3; 114:3, 5)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여리고 성을 향한 예언의 후기 성취( 6:26; 왕상 16:34)와 같이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서는 땅에 대한 과거의 약속의 성취를 기록하는 동시에 그러한 가나안 정복이 이제 앞으로 도래할 열방의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주권을 예고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가나안에 이스라엘 왕국을 세운 것이 가나안 정복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과정이자 매체였다고 할 수 있다. 여호수아는 이를 세겜의 언약갱신 (24:1-28) 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가장 중심적인 동기는 이제 그들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버리고” 오직 여호와만 섬기기 위함이었다( 24:14-15).

존 그레이(John Gray)와 알베르토 소진(J. Alberto Soggin)도 바로 이 세겜의 언약갱신이 여호수아의 주요 기록 목적이라고 지적한다. 소진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장면에서 갑자기 여호수아의 신앙고백적인 선포로 본문이 바뀌면서 가나안 정복 이야기의 초점은 땅이 아닌 땅을 통한 하나님의 통치임을 보여 준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고대 근동에는 새로운 땅으로 들어갈 때 그 땅의 신을 섬겨야 하는 풍속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땅이 목적이었다면 그 땅의 우상을 섬겨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야는 언약의 갱신을 통해 그 땅을 정복한 것은 그 땅의 모든 우상들을 정복하고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확립하는데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생존의 무한 경쟁 속에서 안식과 정착의 지경을 넓히기 위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발버둥침은 무엇을 향한 것인가? 우리가 정복하고 있는 것들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세상을 정복하기보다 이 세상에 정착하기 위해 세상의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이 세상에서 우리의 정복이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것이라면 바로 우리 삶의 현장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될것이다.

6) 사사시대의 죄-심판-은혜
사사기는 여호수아의 죽음을 기록하며 여호수아서를 자연스럽게 이어 가는 역사서 이다( 2:6-9; 24:29-31).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며 남겨둔 가나안 족속들은 이제 사사시대에 다시 그 세력을 재건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사기의 이야기 속에는 죄-심판-은혜라는 구약의 3부적 신학 구조가 자리잡고 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착 후 원래 정복의 목적을 잃어 버린다. 그것은 우상숭배에서 나타나는데 그들의 그러한 죄는 그들을 가나안 사람들의 손에 붙이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그들은 애굽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들 주위의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다( 2:11-13) 그러나 사사기의 주요 신학적 메시지는 죄와 심판이 아니다. 그들에게 사사를 세워 구원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그것이다. 백성은 그를 포기해도 하나님의 주권은 계속 이어진다. 물론 사사기는 과거 여호수아의 승리를 회상하고 더 나아가 이스라엘의 왕정 설립을 미래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17:6; 21:25) , 주요 메시지는 그들을 다스리는 왕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었지만( 21:25), 내부적으로는 그들이 여호와를 그들의 왕으로 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2:13).

사사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야주 중요한 과도기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노예집단에서 광야 유목민으로, 이제 정착민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는 이미 정착하여 강한 도시국가를 이룬 다양한 민족들이 있었고 바알과 아스다롯과 가나안의 토착종교가 농업을 중심으로 한 종교적 세계관과 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180) 이스라엘이 그러한 환경에서 여호와를 왕으로 삼고 신앙의 세계관을 정착시키는 일은 실제 땅을 정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였다. 그들은 애굽에서 그들을 기적적으로 구원하시고 시내 광야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존의 현실 앞에서 하나님을 떠나 불신앙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속을 체험했지만 우리는 이 시대의 블레셋 앞에서, 바알과 아스다롯과 자본주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다. 과연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어떻게 하실 것인가?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보시고 대조적인 두 가지 일을 반복하셨다. 첫째는 그들을 심판하시는 일이었고, 이어 사사들을 보내어 그들을 구원하시는 일이었다. 사사란 재판관을 뜻하는 쇼프팀을 번역한 라틴어 Judicum에서 유래한 말이다. 사사는 정치적 리더가 아니었다. 사사는 하나님의 구속적 도구였다.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의 심판과, 사사들을 세우시는 은혜로 이어졌다. 도날드 캠벨 (Donald K. Campbell)은 사사기에 기록된 사건들 속에서 일관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    우상숭배나 배교의 죄
2.    타민족의 손에 이스라엘을 붙이시는 하나님의 징벌
3.    이스라엘의 탄원 또는 회개
4.    성령의 감동을 입는구원자(사사)를 하나님이 보내심.
5.    전쟁이 없는 평화의 기간

이를 요약하면 오경의 3부적 주요 신학의 틀인 죄-심판-은혜의 구조와 유사하다. 죄와 심판 후에도 은혜가 가능한 것은 사사들이 위대해서거나 앞으로 세울 왕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왕권과 그의 사랑이 그의 절대주권 아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사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아야 하는 연약하고 타락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사사기는 삼손의 힘도 그의 것이 아니고 여호와께서 주셨음을 밝히고 있고( 16:23-31), 소를 모는 막대기 하나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다는 삼갈의 이야기( 3:31)를 통해 하나님의 개입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삼갈의 이야기를 살펴보며 사사기의 메시지를 정리해 보자. 교회를 좀 다닌 사람들에게는 아브라함, 다윗, 솔로몬, 삼손 정도는 누구나 어색해 하지 않는 익숙한 성경 인물들이다. 그러나 ‘삼갈’ 이라는 이름은 대다수의 교인들에게 다소 생소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하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삼갈’ 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다”고 사사기 3:31은 기록하고 있다. 그 시대는 대로가 비었고 행인들은 소로로 다녔던 시대 였다( 5:6). 즉 삼갈이 살던 시절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보다 훨씬 더 강한 가나안 사람들에게 억압을 당해서 넓고 평탄한 큰 길로 다니지 못하고 굽고 좁은 산길로 숨어 다녔다는 것이다. 그때 이스라엘은 우상숭배와 배교를 통해 우여곡절의 시대를 살아갔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어려움 속에 있는 백성을 구원한 사람이 삼갈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귀한 사람인가! 그러나 구약은 이 삼갈에 대해 오직 이 짧은 본문의 한 절만을 기록하고 있다. “에훗의 후예 아낫의 아들 삼갈이 사사로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죽였고 그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더라( 3:31).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사사기의 주요 메시지를 포착할 수 있다. 삼갈이 철기와 강력한 병마를 이끈 블레셋 사람들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도록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은 오직 “소 모는 막대기”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다윗이나 솔로몬과 같이 천하의 영화를 누리는 권력이 없었다. 아브라함과 같이 기록될 만한 믿음의 업적이나 부를 소유한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는 그저 그 시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그냥 길에서 주워서 만들 수 있는 “소 모는 막대기” 하나만이 주어졌다. 그가 소를 모는 막대기를 가지고 다녔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겠지만, 먼저 그가 많은 종을 부리는 큰 부자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소를 모는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그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들과 싸웠으니 그에게는 마병이나 철로 만든 활이나 창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에게는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볼 만한 특별한 것이 없었다. 그러니 얼마나 고난을 많이 받았겠는가! 그 얼마나 그의 인생이 힘들었겠는가! 소 모는 막대기 하나로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구원 하려니 그 얼마나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겠는가! 그런데 바로 그가 이스라엘을 구원했다.

오늘날 우리는 삼갈의 시대와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참된 왕이 없어 극적인 개인주의가 팽창한 이 시대를 사는사람들은 각각 그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다 스스로 멍들어 가고 있다. 가치관의 혼돈, 무한한 자본주의의 퇴폐적인 경쟁, 목적 상설, 정치적 부패, 인신매매와 청소년들의 방황, 가정파괴, 집단 이기주의, 윤리적 타락, 교육의 상업화, 세대간의 갈등과 같은 타락과 심판 앞에서 어떻게 보면 우리들이 가진 것은 소 모는 막대기 하나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삼갈과 같지 못하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삼갈이라는 사람과는 너무 대조적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나에게 건강을 주십시오. 그러면 이스라엘을 구원하겠습니다“ 하나님 나에게서 모든 고난을 면제해 주십시오. 그러면 이스라엘을 구원하겠습니다“하나님, 나에게 물질과 명예와 정치적 권력과 엄창난 부와 평탄한 길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면 어려움에 처한 이이스라엘을 내가 구원하겠습니다” “나에게 땅을 주십시오. 나의 지경을 넓히게 하옵소서. 그러면 내가 여호와를 섬기겠나이다그래서 하나님이 건강과 물질과 명예를 주시면 우리는 이 세상을 구원하기보다는 자신과 세상을 타락으로 몰고 간다.

우리는 사사기를 다시 한 번 자세히 읽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삶의 문제가 없고 강하기 때문에, 잘나고 많이 배웠고 부하고 똑똑하기 때문에 쓰임을 받은 것이 아니다. 소 모는 막대기 하나가 있더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쓰임 받는 자들이 된 것이다. 어두운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 1:7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함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보배란 하나님의 의이고, 질그릇은 그 의를 감히 담을 수 없는 우리의 부족한 속성이다. 나의 의로움, 물질, 지혜, 힘과 경험, 온전한 삶, 기발한 아이디어, 그 어떠한 계획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내가 무언가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사역에 열심은 있으나 덕을 못 세울 때가 너무 많다. 그러나 질그릇과 같이 너무 약하고 소 모는 막대기 하나밖에 없는 우리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보배를 우리에게 은혜로 담으셨다. 그는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왕이기 때문이다.

2.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

이스라엘 왕의 기원에 대한 사무엘상의 내러티브는 표면적으로 신학자들의 논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사무엘상 8:6-7은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것이 잘못임을 분명히 암시하는(8:7; 10:19; 12:12-20) 동시에 하나님이 왕권을 허락하셨다고(8:7, 9, 22; 9:16-17; 10:24; 12:13)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최초 왕록이라 할 수 있는 1-7장은 왕의 어린시절이나 왕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수록하기 보다는 선지자인 사무엘의 어린시절과 언약궤에 대한사건을 말하고 있다. 비평학자들은 이러한 모순점을 문서비평이나 편집비평학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좀 더 상세한 분석은 본문의 모순이 실제로는 언약이라는 문맥 속에서 자연스럽게 통일성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언약의 왕권
먼저 이스라엘의 왕권 수립은 시무엘 시대에 최초로 확립된 것이 아니라 시내 산 언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명기 17: 14-20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4. 네가 주 너의 하나님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차지하고 그곳에 거하며 말하기를 나도 내 주위에 있는 모든 민족같이 내 위에 왕을 세우리라하거든

15. 너는 반드시 주 너의 하나님께서 선정하실 사람을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너는 네 형제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니 네 형제가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지니라

16. 그러나 왕은 스스로 말들을 많이 번식시키지 말 것이며 그가 말을 번식시킬 목적으로 그 백성을 이집트로 돌려보내지 말지니 이는 주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너희가 이제부터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라

17. 그는 또한 자기에게 아내를 많이 두지 말아야 할지니 그래야 그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을 것이요 그는 또한 자기에게 은과 금도 크게 늘리지 말아야 하리라

18. 그가 자신의 왕국의 보좌에 앉으면 그는 레위인 제사장들 앞에 있는 책에서 이 율법서 한권을 베껴

19. 자기와 함께 두고 평생 동안 그것을 읽어서 그로 주 그의 하나님을 두려워함을 배우게 하고 이 율법의 모든 말씀들과 이러한 규례들을 지켜 그것들을 행하게 할지니라

20. 그리하여 그의 마음이 자기 형제들보다 높아지지 아니하고 그가 그 계명에서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돌이키지 아니하면 종국에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와 그의 자손이 그 왕국에서 자기 날들을 늘리게 되리라.

이 본문은 모세를 통해 세우신 하나님의 언약 속에 왕을 세울 수 있는 조항이 (14-15) 분명히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다만 하나님 이 “선정하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법률을 대변할 수 있는 자가 왕이 되어 선정정치를 해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여기서 유일한 점은 이 왕에 대한 자격이나 모습이 고대 근동에 보편적인 왕의 특징과는 너무 대조적이라는 것이다. 첫째 여호와 하나님이 선정하는(15) 이 왕은 말을 번식시키지 않는 왕으로서 (16) 이는 군사력이 없는 왕을 의미한다. 둘째, 이 왕은 아내를 많이 두지 말아야하는데(17) , 이는 타 왕국과의 조약이 약화되어 왕권이 약해질 수 있다. 셋째, 이 왕은 은과 금도 늘려서는 안 되는데(17) , 이는 재정적으로 약함을 의미한다. 이런 조건은 왕에 대한 보편적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다. 한 왕국의 왕으로서 군사력과 탁월한 외교 기술과 튼튼한 재정에 대한 정책을 포기하라면 왕의 의미가 무색해질 것이다. 이러한 왕에게 유일하게 요구된 것은 율법서를 베껴 자기와 함께 두고 평생토록 읽으며 그 말씀을 지키는 일이다(18-19). 본문은 과연 이러한 왕이 존재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사무엘상은 이러한 배경에서 이스라엘의 왕권 기원에 대하여 왕에게 초점을 맞추기 전에 1-7장에서 그 왕을 하나님의 뜻대로 선정하며 그 왕을 참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대변인으로 이끌어 줄 사무엘 선지자의 이야기를 그의 출생부터 다루고 있다(1-3). 그리고 그 왕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왕이어야 함을 상기시키기 위해 언약궤를 중심으로 한 사건들(4-6)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더 나아가 왕을 세우기전 사무엘 선지자의 지도 아래 전쟁이 승리함으로써 블레셋으로부터 언약궤를 회복했다고 하여 이스라엘의 참된 왕권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8장부터 등장하는 왕에 대한 백성들의 갈망은 그들이 궁극적인 하나님의 왕권을 외면하고 “열방과 같이" (5) 세속적인 왕을 원하는 데서 시작한다. 이는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주권적 왕권을대표하는 왕이 아니라 타락한 사람들의 욕심을 따라 원하는 세속적인 왕인 것이다. “너희가 너희를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친히 구원하여 내신 너희 하나님을 오늘날 버리고 이르기를 우리 위에 왕을 세우라 하도다" (10:19) , 여기서 표면적으로 병행되는 왕에 대한 소위 모순된 견해들은 긍정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대표할 수 있는 왕, 부정적으로는 사람들이 원하는 왕으로 분리 해야 할 것이다. 즉 사무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을 선정해야 했지만, 사람들은 “이방 왕 같은” 왕을 요구한 것이다.

2) 사울의 왕위와 다윗의 왕위
사울의 선정은 하나님의 언약에 서 있지 아니한 왕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말하기 위한 서론이라 할 수 있다. 사무엘은 백성들이 자기들이 원하는 왕을 요구하는 백성들에게 실망이 컸다(8:6), 이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선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8:7), 그들의 말대로 세운 왕이 사울이다. 사울은(13-15) 왕위에 오른후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사무엘을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 행한다. 이는 선명기 17:18-20에 기록된 왕의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그로 말미암아 백성들은 고난을 받는다. 본문은 하나님의 통치를 떠난 왕권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함축하고 있다.

사무엘상하 본문은, 왕권의 타당성에 대한 논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왕권이 하나님의 왕권을 대표하며 언약을 준수하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무엘상 16장에 가서 하나님은 그가 선정하신 베들레햄 사람 이새의 아들 다윗을 왕으로 세울 것을 말씀하신다 (삼상 16:1;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 다윗은 사울의 정권이 반 신본주의적으로 흘러감에 따라 그 명성과 권력이 허약해짐에도 불구하고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그 어떠한 인간적인 반역이나 혁명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순리를 따라 행하며 하나님의 선정으로 헤브론에서 왕의 직위에 오른다(삼하 2). 다윗은 왕위에 오른 후 곧바로 여호와의 궤를 아비나답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 와서(삼하 6) 그의 정권 위에 하나님의 왕권이 있어 나라를 다스리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이러한 다윗의 왕권을 통하여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을 점진적으로 이루어 가신다. 창세기 15:18은 다윗의 업적 가운데 한 부분을 다음과 같이 예고하고 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지손에게 주노니다윗은 왕국의 국토를 남쪽 애굽지평에서 메소포타미아에 이르기까지 넓혀 간다(삼하 8) . 그리고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다윗이 계획한 여호와의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는 대신 다윗의 집을 영원히 보존하실 언약을 세우신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삼하 7:16). 구약은 계속해서 그 다윗의 자손을 통하여 참된 왕의 실체로 오실 한분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영원히 보존할 것을 여러 형태로 예고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분을 “평강의 왕”( 9:6)이라 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23:5-6). 이것은 예레미아서의 기술이 다윗의 의로운 가지를 통해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 11:1-2) 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선포를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3)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
존스(G. H. Jones)는 열왕기서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누어진 두 개의 원서를 중심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다윗의 영원한 왕권을 목적으로 한 유다문서와,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기록된 문서가 편집되어 이스라엘과 유다왕들의 업적에 대한 정치적 평가가 시각에 따라 일관되지 못함을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가 열왕기서를 공시적으로 접근해 볼때 왕들의 업적은 언약을 준거로 일관되게 평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약은 종종 이스라엘의 지상 왕들을 실제 왕이신 메시아의 예표로 조명한다. 이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록이라 할 수 있는 열왕기서에서도 잘 나타난다. 열왕기 기자는 왕들의 행적을 그들의 역사적인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성취나 업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들이 참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신실하게 지켰는지 여부에 초점을 두고 있다. 이는 보편적인 왕록과는 대조를 이루는 것이므로 전례적으로 고대 근동이나 옛 동양의 왕국에서도 왕의 업적을 중심으로 왕록이 기술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열왕기에 수록된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에 대한 기록은 상식을 뛰어넘는 기록들이다. 예를 들어 유다 왕 아사 제 31년에 이스라엘을 다스린 오므리 왕은 이스라엘 역대 왕 중 역사적으로 가장 큰 업적들을 이룬 왕이다. 그는 사마라아를 이스라엘의 수도로 세운 장본인으로서 솔로몬 시대 국토에 가까운 면적을 넓혀 간 인물이다. 그러나 본문은 그에 대해 오직 6절의 짧은 기사를 기록했을 뿐이다(왕상 16:23-27). 단순히 “오므리가 여호와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 전의 모든 사람보다 더욱 악하게 행하여" (25)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 (27)을 참고하라고 요약하고 있다. 정치, 경제 면에서 큰 업적을 남긴 여로보암 2세도 마찬가지 이다(왕하 14:23-29)

그러나 언약을 중심으로 부정적으로나 긍정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왕들의 기사는 세밀히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부정적으로는 오므리의 아들 아합 왕과 이세벨에 대한 기술이며(삼하 17:1-22:39), 긍정적으로는 히스기야 왕에 대한 기록이다(왕하 18:1-20:21). 이는 열왕기상하의 모티프가 지상 왕들의 업적에 있는것이 아니라그 왕들이 열마나 참된 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을 지켰느냐에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왕록에서 모든 평가가 언약이라는 빛으로 조명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명기적인 (17:14-20) 왕의 모습을 참조점으로 모든 왕들이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열왕기상하는 포로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이 고난을 당하는 이유가 언약을 파괴하며 세상 왕을 섬긴데 있음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불순종에 대한 경고가 오래 전부터( 26:14-45) 이야기 되었음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끝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권과 주권을 외면함으로써 북 왕조의 멸망과(왕하 17-18) 남왕조 유다의 패망으로(왕하 21) 비참한 막을 내린다. 그러나 소망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열왕기하 마지막 장인 25장은 유다 왕 여호야긴이 바벨론 옥에서 풀려나 궁전의 예를 받게 하였다고 기록한다(왕하 25:27-30). 이는 다윗의 집을 통하여 일하실 하나님의 구원의 여운을 남기며 그 왕권이 계속 지속될 것을 은밀히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4) 영원한 왕으로 다스리시는 여호와
영원히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개념은 그 기원이 언약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구약은 점진적으로 그 형태가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해짐으로써 미래의 재림을 통하여 온전히 성취될 것임을 일관되게 증거하고 있다.

구약은 지상의 왕들은 모두 멸망했지만 “만왕의 왕” 은 궁극적으로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고 승리하심을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전지전능한 왕이시기 때문이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24:8). 또한 감히 그 앞에 그 누구도 설 수 없는, 경외로운 왕이시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그를 보자마자 떨며 쓰러질 수 밖에 없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6:5). 이러한 초월의 왕은 재림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온전히 구현될 것을 신약은 거듭 증거한다. 그는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만왕의 왕으로 오르실 것이다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 17:14)

왕은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개념이나 은유나 풍유가 아니다. 혹은 고대 근동의 신들을 묘사한 왕권과 유사한 것도 아니다. 구약은 왕이 하나님의 성품이자 함축된 직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는 다스리시고, 보존하시고, 영원히 우리를 도우시며 보호하시며 구원하시는 참된 왕, 바로 그 자체이시다. 그 왕은 절대 주권을 가지고 모든 악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낮고 낮은 베들레햄 마굿간에 오셔서 갖은 수모를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 사건은 그는 선한 왕이요 한없이 인자하고 은혜를 베푸시는, 겸손하고 좋은 왕이심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 ( 95:3) 이시며, 열방의 존귀와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만왕의 왕이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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