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19, 2011

칼빈주의 예정론(6)

5. 궁극적 구원

성도의 지키심의 은혜에 관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자 안에서 용납하시고 실제로 부르시고 또한 성령으로써 거룩하게 하신 자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전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타락할 수는 없다. 그들은 마지막 날까지 그 상태에 있을 것이며 또한 영원히 구원을 받을 것이다.(17:1)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절대 무조건적으로 영원한 생명에 선택하시고 성령의 구속의 은혜를 그들에게 유효하게 적용한다면 그들은 반드시 구원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은 불가피적인 결론이다. 하늘에 있는 성도들은 현재 이 세상에서 생활하는 신자들 보다 행복하긴 하지만 안전성에 있어서는 모두 한가지이다. 이와 같은 선물의 수여는 그것을 받는 자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의 계시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하나님의 손에서 떠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 자가 말하는 것 같이 참 그리스도 신자가 된 자에게도 멸망하는 자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왜 그들을 그들이 아직도 구원의 상태 안에 있을 동안에 이 세상에서 제거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아무리 그렇다 해도 하나님이 그들의 장래의 배교를 예견하지 못해서라고 말하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구속되어 하늘로 옮겨간 자는 거룩한 가운데 보호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더구나 만일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 성도들을 그들의 자유 행동을 방해하는 일 없이 보호하지 않으시겠는가 중생된 그리스도 신자가 하늘의 아버지에 대해서 그 아들이 되는 관계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은 지상의 아버지에 대해서 그 아들이 아들되는 입장을 잃는 일이 없는 것과 한가지이다. 참 기독교 신자도 타락하고 멸망하는 수가 있다는 사상은 중생된 영혼에 주어지고 영적 생명의 원리에 관한 개념을 잘못하는데서 생기는 것이다.
바울은 믿는 자는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고 가르치고, 그러므로 신자는 율법아래 있지 않는고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정죄하는 일이 없다고 말하고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니라」( 6:14)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11:6)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4:15)이라 가르치고 만일 행위에 의해서 가르침의 최소 부분이라도 하려고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은, 「그는 율법의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자라」( 5:3)말하고 있다. , 그들은 자기의 힘으로 완전하게 순종하고 그것으로 자기의 구원을 얻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 무한, 신비한 책은 그들이 절대로 멸망되지 않기 위한 보증이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부동이며, 하나님의 실재와 같이 불변이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한 1 4:10) 히브리서의 기자가 그리스도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12:2) 이라고 말할 때에, 하나님이 선택하시는 자는 결코 멸망 당하는 일은 없다고 가르친다. 이것으로 우리들의 구원의 전 과정은 하나님에 의해서 계획되고, 하나님에게 인도 된다고 가르치시는 것이다. 만일 기독교 신자가 타락하는 수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 은혜를 걷어버리고 그의 구원의 방법을 변경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하나님이 사람을 율법 아래 되돌려 버리는 것이다.

선택된 자의 구원에 관해서 루터는 「하나님의 예정은 강하고 확실하고, 그리고 그 결과인 필연도 한가지로 불변이며 반드시 성취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들은 더욱 더 우리들의 순결을 지켜주심과 구원의 보증과 우리 자신들의 약한 성질에 의하지 아니하고, 전혀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지지력에 의한다는 사실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된다.

보전의 교리는 기독교 신자가 일시적으로나마 범죄하고 타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슬픈 일이긴 하나 우리들은 너무나 빈번하게 범죄한다. 가장 훌륭한 신자라도 일시적인 배교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절대로 전연 패배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 위에 그의 은혜를 부어주시므로 가장 약한 성도도 최후적으로는 배교에서 확실히 지켜주지 때문이다.

그들 스스로의 개인적 경험에 관해서는 대 사도 바울조차도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7:19)라고 고백을 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 신자에게 있어서는 범죄를 하는 것은 모순이다. 히브리서의 기자도 범죄하는 자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6 : 6)고 말했다.

기독교 신자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그의 상태는 전쟁과 같은 것이다. 그는 일시적으로는 실패하는 일도 있고, 어떤 때는, 전연 신앙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가 한 번 참으로 구원된 자라면 그는 은혜에서 전연 이탈할 수는 없다.

AH스트롱은,「믿음이 있는 자는 마치 언덕을 기어오를려는 사람과 같다. 어떤 때는 미끌어져 떨어지는 일이 있어도 그 얼굴은 언제나 정상을 쳐다 보고 있다」라고, C.H (stong)스펄죤은 「믿음이 있는 자는 큰 배를 타고 있는 자와 같은 것이다. 곧잘 갑판위에서 딩구는 일이 있어도, 그러나 바다에는 떨어지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다.

참 그리스도 신자로 보이는 자가 최후에 배교로 떨어져버린 경우도 절대로 해석이 곤란한 것은 아니다. 성경도 우리들의 경험도, 친구에 대한 우리들의 판단은, 곧잘 잘못되는 것을 가르친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참 신자인가 아닌가를 확실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외적인 고백이 반드시 영혼이 구원되었다는 보증은 못된다. 예수는 제자를 훈계하여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이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24)라고 말씀하시고 바울은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 하나니 (고후11:13)라고 주의를 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가 아무리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일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회라」 (2:9) 라고 사실을 아시는 것이다. 요한은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저희가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요일2:19)라고 말하고 있다. 타락해서 영원히 떠나가는 모든 자를 바로 이와 같은 경우의 것들이다. 이와 같이 신앙 고백으로부터 떨어지는 자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서 떨어지는 자는 없는 것이다.

단순히 교회의 신자가 물론 참 그리스도 신자의 보증은 안된다. 때로는 어떤 목적으로 외면적으로 복음의 고백을 하는 자도 있다. 그들은 잠시 동안은 외면적인 도덕생활을 강요당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친하게 사귀는 일도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그들의 심정의 참 동기를 본다면 그들이 과거에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그들 모두는 염소이지 양은 아니며, 또 사나운 이리이며 순한 양은 아니다. 베드로는 그들에 관해서 「개가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하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라든지 하는 속담대로이다. (벧후 2:22)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들은 과거에 선택된 백성에 속한 일은 없었던 것이다.

자유의지의 교리와 은혜로부터의 타락의 교리와를 지니는 철저한 알미니안 주의는 이 세상에 있어서는 결코 그의 영원한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 진실로 그는 현재의 구원의 확신은 가질 수 있겠지만 궁극적인 구원에 관해서는 희망을 가질 수가 있다는데 불과하다. 만일 알미니안주의가 진리라면 그리스도 신자의 장래는 그의 타락한 의지가 바른 길을 계속 선택한다는 조건위에 서 있기 때문에 지극히 불안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알미니안주의의 구원의 보증은 전능하여 불변한 하나님의 손에 맡기지 아니하고 약하고 죄많은 인간의 손에 돌려놓고 있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 자의 논리에는 그리스도 신자가 되도록 빨리 이 세상을 떠나야 되며, 자기에게 약속되어 있는 무한의 가치 있는 후사를 확보하는 일이야 말로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타락해 버린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그리스도 신자가 이 세상에 머물러 이 세상의 얼마 안되는 생활을 위해서 이 영원한 구원을 상실 할 가치가 있을 것인가? 영적인 사실에 관해서 의심의 상태는 불행한 상태다. 이와 같은 교리는 우리들을 위협하고 영원토록 거기서 피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가능하다면 내가 목숨을 의탁하는 이 배가 항해에 견디고 뱃길을 떠나면 반드시 안전하게 목적의 항구에 도착하는 것을 알고 싶은 것이다.

알미니안주의 자는 성경 안에서 믿음이 있는 자가 타락의 가능성을 포함하는 배교, 타락에 대한 경고의 말을 인용한다. 하나님이 타락의 경고를 하는 것은 그의 타락을 인정한다는 목적을 지니기 때문은 아니다. 이와 같은 경고는 하나님이 그를 타락에서 지키시려고 하시는 수단이다. 이와같은 경고는 믿음을 갖는 자에게 있어서 보다 더 큰 신앙과 기도를 하라는 격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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