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23, 2011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1)


로마서 12:1-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교회관의 난맥상
우리가 참 교회의 자태를 바로 보존하고 늘 증시하며 살아 가려면 구원의 도리가 정당해야 할 뿐 아니라, 그 구원하신 내용의 여러가지 은혜와 하나님의 경영을 잘 깨달아서 주께서 오늘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나를 구원하신 주님의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고 살아나가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맹목적으로 알지 못하는 가운데에서 살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볼 때에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 교회라고 칭하는 많은 종교 단체의 활동이 있고, 또 거기서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고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다 분명히 알고 느끼듯이 기독교인이라고 자처하고 사는 많은 사람이 실제로는 기독교인으로 볼 수 없는 경우가 흔합니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정당한 표준으로 판단해 볼 때 확실히 구원과는 상관이 없으면서, 다만 기독교의 문화나 종교적인 색채와 관계되어 있다고 해서 스스로 기독교인으로 자처하고 기독교적인 활동을 추구하면서 대외적으로 발표하고 나가려는 많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정당한 교회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교회가 무엇인지를 바로 잘 깨닫지 아니하고서 어떤 전통이나 습관에 의해서 교회관을 형성하고, 이런 것이 교회라고 생각하고 그런것에 어울리는 생활 행동을 할 때에는 참으로 그릇된 데로 빠져 들어가기가 심히 쉬운 것입니다. 잘못된 일을 하고도 잘못된 것인 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을 우리가 실례로 지금 많이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참된 도리는 무엇이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의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무엇이며, 무엇이 참된 구원이고, 무엇이 중생이며, 무엇이 새사람이고, 또 무엇이 그리스도의 속죄이며, 영광의 내용인가를 정당하게 알아서 비슷하나 절대로 아닌, 소위 사이비라는 것을 분간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그런 분별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교회이고, 무엇이 교회 아닌가를 모르고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아주 거친 의견, 그렇지 않으면 아무런 비판을 거치지 않은 제멋대로의 전통이나 특수한 환경에 의해서 형성된 그런 생각을 가지고 교회라고 하면서 그렇게 모여서 조직하고 활동을 한다면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릇된 신학이 참된 신학이 되지 아니하고, 그릇된 교리가 구원의 도리가 되지 못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그것이 비슷하고 그럴듯하게 하나의 종교 철학으로서의 교회관을 말할지라도 그런 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회가 아닌 것을 이 세대에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속죄, 십자가, 부활, 그로 말미암은 새로운 생명, 성화와 같은 구원관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경영하신 가장 영광스러운 실체인 참 교회는 어떤 것이고, 그렇지 아니한 것은 어떠한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오늘날 시대와 같이 배교의 세력이 큰 성격으로 역사속에서 드러날때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거센 물결에 끌려 들어가기가 쉽습니다. 본인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지만 배교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 됩니다. 더구나 그런 아무런 훈련이 없는 사람들이 교사가 없고 정당하게 가르치는 도리가 없는 세계에 들어가면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참으로 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참된 교회관이 바로 정립되지 않아서 여러가지로 교회가 무엇이 바르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해 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사 시대에 사람들이 바른 도리를 찾지 못하고 다 제각기 자기 좋은 대로 했다는 말씀처럼 다만 어떤 종교적인 형식을 가지면 교회가 되는 것으로 자기 좋은 대로 생각하는 까닭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몇 사람이 모여서 예배라는 형식을 취하면 그것이 교회다 하는 생각을 가지는 까닭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라는 대로 차례차례 교회의 확실한 모습를 드러내야 하겠지만 그것도 하나하나 다 근거 있게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근거 없이 남이 그러니까 나도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이 세대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형식이나 우리의 활동하는 것이나 우리의 방향이나 우리의 노선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증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배교의 도도한 물결이 창수와 같이 휩쓰는 때에 튼튼히 서 있는 반석 위에 세운 교회가 되려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것들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형식상 조건들
개혁교회가 형식상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을 구분 할때에 신학상 적어도 세 가지 요소를 생각해 왔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설교(Preach)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강단(Pulpit)이 있어야 하고,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단에서는 말씀이 정당하게 가르쳐지고 해명되어 나가야 합니다. The true preaching of the Word of God , 이것을 첫째 요건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 말씀이 말씀대로 바르게 설교되지 않으면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 해도 형식상 교회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말씀을 보이는 형식으로 제공하는 성례(세례와 성찬)를 바르게 집행하는 일입니다. 보이는 형식으로 제공하려면 받는 사람이 있고, 주는 사람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서 교회에 전달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개혁교회는 이 일을 집행할때 반드시 그 일을 위하여 준비하고 훈련된 사람이 하도록 하였습니다. 일반 교우 아무라도 할 수 있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의 요소라는 것을 형식상으로도 확립해 놓은 것입니다. 성례를 집행할 때 교회적인 행사로, 교회적인 권위로, 또 교회적인 권위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례를 집행할 때에는 사석에서 몇 사람이 앉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회적인 의미를 가진 집회를 열어서 성례를 행하도록 하였습니다.

세번째는 권징(착한 일을 권장하고, 악한 일을 징계함)을 신실히 행한다는 것을 개혁교회는 중요한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권징이라는 것을 희미하게 생각했지만, 개혁교회의 신학자들과 지도자들은 절대로 그것을 소홀히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의 순결을 위해서 그랬습니다. 불순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여 점점 혼탁하게 하는 악한 요소를 그냥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예를들어 사람의 몸에 병이 났다고 해서 매번 대수술을 하여 어떤 부분을 잘라 내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번 회개를 요구하는 것이고 그것을 고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잘못이 있을 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자기 개인뿐 아니라 교회 앞에서, 교회의 지체로서 하나님 앞에 거룩한 교통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끝까지 못하겠다고 한다면 할 수 없이 최악의 경우에는 자르는 것입니다. 교회는 순결을 늘 보존하기 위해서 그렇게 엄격하게 행정적인 조치, 법적인 조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권징을 할 수 있는 권위를 공동으로 승인하고, 그런 권위하에 있어야만 교회가 된다는 것을 개혁교회는 과거에 늘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런 점이 아주 느슨해져서 어떤 경우에는 아예 시행 되지 않을 뿐더러 현실적으로 시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결국 교회의 권위가 없어져서 하나님께서 교회를 다스린다는 표징이 사라진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표상적인 가르침
이제 좀더 본질적인 문제로 들어가서 교회란 무엇인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성경이 가르친 교회란 무엇인가를 형식적인 면에서가 아니고 그 본질, 지니고 있는 속성들을 가지고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성경은 교회라는 것이 신비하고 심오한 거룩한 실체임을 사람들로 하여금 바로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문학적인 여러 가지 수사학적 양식 (Rhetoric Style)을 써서 교회에 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비유를 베풀 때에 표상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표상들(Figures)을 사용해 가지고 교회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교회를 말할 때 그리스도 이전에 있던 교회를 가리킬 때 구약의 교회란 말로도 쓰고 구약의 오이코노미아라고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충만한 계시로서 임하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교회의 내용이 물론 과거에 있던 교회와는 다른 전연 새로운 실체는 아닙니다. 신약의 교회는 구약의 교회를 계승하는 것이지만 계시 발전의 역사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신약 교회에서는 좀더 충만한 계시로 본질적인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과거의 많은 표상, 그리고 손으로 잡을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는 물질적인 사실로써 보이시던 여러 가지 현상을 이제 신약 교회에서는 좀더 심오하고 좀더 본질적이며 신령한 내용으로 보이십니다. 그러나 그 신령한 내용을 파악 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므로 다시 어떤 표상을 써서 깨달으라고 설명하십니다. 그런 것을 과거의 개혁교회가 신학상 네 가지로 나누어서 가르쳤습니다. 여러 가지가 성경에 나오지만 가장 종합적으로 중요하게 쓰는 표상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라는 말로 표시하였습니다. 둘째는 교회는 성전이다, 또는 하나님의 집이다 하는 표상이고 셋째는 하늘의 예루살렘’ 또는 새 예루살렘이라고 했고 넷째로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것을 이러한 표상들로 바로 깨달아 알도록 가르치셨다면, 우리는 사전적인 용어를 사용해서 교회는 이것이다 하고 정의하지 않고, 왜 하필 그 표상을 사용하신 것에 대하여 하나하나 주의해서 배우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런 수사적인 표현을 쓸 때는 우리가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수사학적으로 어떤 표상을 쓰는 것은 실체의 어떤 부분을 구체적으로 표시하는데 유리하고 편리하니까 쓰는데 특별히 그것을 바로 파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 말씀을 씨라는 것으로 비교하는 씨 뿌리는 비유를 보면 누가복음에서는 씨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러면 왜 하필 하나님의 말씀을 씨라는 말로 표시 했는가? 씨의 어떠한 속성이 거기에 해당하느냐 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씨라고 했으니 덮어놓고 씨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작용이 꼭 하나님 말씀의 작용과 같다고 생각한다면 거기에 큰 잘못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표상에 대하여 너무나 지나친 해석을 해서 잘못되기가 쉬운데 그런 일이 적지않게 발생합니다. 우리가 그런 점을 소홀히 생각지 말고 주의해야 합니다. 반면에 참으로 성신의 거룩한 조명과 지혜와 많은 경험과 풍성한 지식을 가지고 표상을 바로 해석하는 사람이 또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수사학적인 표현를 해석하든지 어떤 표상을 해석하든지 그것을 해석할 때는 그 자체가 의미하고 있는 한계를 넘어서서 다른 것를 거기다 붙이면 안 됩니다. 즉 그 표상이 가지고 있는 다른 속성까지 다 갖다 붙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만일 어떤 하나의 표상이 비유적으로 쓰였으면 그 한계 안에서만 해석을 해야지 비유를 풍유처럼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표상적인 표현을 해석할 때 주의 할 점
풍유라는 것은 어떤 이야기를 쓸 때 다소간 자연성이 떨어지고 무리가 되는 보조 관념을 써서라도 그 실체의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풍유를 보면 짐승이 사람의 말을 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추상적인 관념, 가령 진리, 사랑, 은혜의 구원, 나태함 등 선덕이든 악덕이든 그런 추상적인 덕을 하나의 인격체로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풍유 곧 Allegory입니다. 그런데 만일 어떤 비유를 비유로 생각하지 않고 풍유로 해석하면, 그 표상이 나타내려고 하는 진리는 파악하지 못하고 표상이 의도하지 않고, 그 표상에서 의미 하지도 않는 다른 속성들을 말하기가 쉽습니다.

또 하나의 예로 은유 (Metaphor)라는 것이 있는데, 실체적인 선언과 상징적인 선언을 합쳐 놓은 것입니다. 쉬운 말로 하면 어떤 사람이 발명을 잘할 때, 그를 위대한 발명을 잘한 대표적인 인물이 에디슨 (Thomas Alva Edison) 이라고 해서 “이 사람은 한국의 에디슨이다’ 하는 말로 표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실제의 에디슨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것을 가리켜 은유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에디슨이라는 것은 어떤 점에서 그런가 할때 에디슨이 가지고 있는 뚜렷한 특색, 발명을 많이 했다는 것 하나를 표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에디슨이 발명하다가 곤하면 자기가 앉아서 일하는 실험실 책상 위에다 큰 사전 하나를 놓고 책상 위에 그냥 누워서 잤다. 저 사람도 그렇게 누워서 잘 자니까 그도 한국의 에디슨이다 한다면 영뚱한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또 “에디슨은 자기 생일이 되면 헨리 포드(Henry Ford)하고 둘이서 자동차를 타고 하루 종일 둘이 드라이브하면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사람도 생일날이 되면 자동차 타고 하루 종일 드라이브하면서 이야기하니까 그도 한국의 에디슨이다 한다면 그런 이야기는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물론 에디슨이 한 일이고 에디슨을 표시할 수 있는 특색이겠지만 그런 것을 들어서 에디슨이라고 한다면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씨가 무엇을 표상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만일 씨를 생각 할때 씨는 자체 안에 생명력이 있어서 땅에 심으면 그 생명이 발휘되어 나간다. 그처럼 하나님 말씀은 자체 안에 생명력이 있어서 그것이 사람의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생명의 작동을 한다고 해석하면 그것은 절대로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관이 아닙니다.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는 말씀 자체에 생명력이 있어서 그것이 어디에 들어가든지 반드시 그 속에서 역사해서 무슨 작용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복음의 말씀이 누구한테든 들어가기만 하면 반드시 다 예수 믿는다고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신님이 말씀과 함께”(Cum Verbo) 역사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를 나타냅니다. 이런 말씀에 대한 이해에 대해서 이 비유를 들어서 말씀이 씨라면, 어떻게 씨가 무슨 특별한 외부의 작용이 있어야만 씨로서 생명력을 발휘하는가? 라고 반문한다면 그것은 바르게 비유를 생각하지 못한 결과인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많은 표상적인 표현을 해석할 때 그 표상 안에서 의미하지 않는 것들을 자꾸 갖다가 붙이고 또 붙이면 그것이 풍유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여기서도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해석 할때 몸에 나타나는 여러 현상, 때때로 감기도 걸리고 가렵기도 한 것을 가지고 이렇게 가려운 것은 무엇이다 하는 식으로 해석하기로 한다면 그것은 엉뚱한 이야기가 되고 맙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는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가를 바로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표현의 한계가 어디인지를 늘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에 우리 마음대로 상상해서 짐작하면 안 됩니다. 성경의 보증(Biblical Warrant)이 해 주는 사실이 없다면 그것은 곧 자기 마음대로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표현을 쓰기 전후에 항상  몸이라는 말을  이해 할 수 있도록 지시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문맥을 따라서 읽으면 왜 몸이라는고 했는지를 느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한 표상에 들어 있는 어떤 현저한 속성이라도 어느 때는 성경의 보증이 없는 경우가 있는 것을 알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소금의 속성만을 생각한다면 짠 맛을 낸다는 것과 냉장고가 없었던 옛날에는 생선을 소금에 절여서 썩지 않도록하는 방부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소금의 속성을 화학적으로 분석을 한다면 여러가지 속성이 더 있겠지요. 그러면 여기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할때 너희는 세상에 맛을 내는 존재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너희는 세상에 들어가서 부패를 방지하는 방부제 역할을 해라소금이 방부제 역할을 하려면 녹아야 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세상에서 희생을 해야한다.  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게 됩니다. 두가지 해석이 다 맞는 것일까? 아니면 그 중 하나일까? 아니면 둘 다 틀린 해석인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이 본문을 자세히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단히 설명한다면, 정당한 해석은 소금의 짠맛처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독특한 맛 즉 팔복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생명의 품성을 드러내야 함을 의미한다는 것을 문맥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이라 할 때 춧불을 켜 놓으면 초가 자꾸 타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냐? 그처럼 자기 희생이 계속 되어야만 빛이 더 밝아지는 것이다”라고 해석해서 자기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 많습니다. 만일 이런식 해석을 한다면 아무것이라도 다 갖다가 붙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에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이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의미가 달라져서 귀에 걸면 귀거리가 되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주의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한몸과 많은 지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에 그 앞뒤에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왜 썼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 로마서 12:4을 보더라도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해서 몸과 지체의 이야기를 먼저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이 구절에서 당장 몸이라는 말을 무엇으로 먼저 해석을 해야 하고 생각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두 가지가 여기에 나타납니다. 한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으니까 지체와 몸의 관계에서 몸이라는 말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는 것처럼 교회도 많은 지체가 있으나 한 몸이다 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그리고 나서 “모든 지체가 같은 직분을 가진 것은 아니니” 했는데 이것이 두 번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한 몸에는 많은 지체가 있다 그 많은 부분들이 모두 동일한 직분으로 같은 일을 하고있다”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한 몸에 많은 지체가 있지만 지체는 다 같은 일들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다 각각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점에서 우리가 주의를 해야 할 것입니다.

결국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있고, 그 다음에 서로가 지체라는 것이며, 그 지체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을 설명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지체는 각각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이렇다. 예언하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예언하는 일을 해야 하고, 섬기는 은사가 있는 사람은 섬기는 일로써, 한 몸의 지체로서 자기 직분을 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가르치는 자라면 그 사람은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한다. 권위하는 자이면 권고하고 위로하는 일을 할 것이고, 구제하는 자는 성실하게 또 그 일을 해야 할 것이다. 또 교회의 치리자로 임명을 받아서 교회 일을 돌아볼 때는 그냥 게을러 가지고 자기가 시간이 있고 여유가 있으면 조금씩 가외로 하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해야 할 것이다. 지체들 각각은 자기가 받은 은사의 부분을 행하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할 것이고, 긍홀을 베푸는 자, 특히 자비를 베푸는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한다, 마지못해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결과에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사랑의 일인데, 이런 사랑을 행할 때 거짓으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부드러운 체하고 속으로는 항상 다른 마음을 품는 짓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중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악한 일이니 너희들은 항상 성품상으로도 악을 미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지체로서 자기 직분을 하려면 이런 되덕인 위치, 그의 차원과 성품이 바로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일을 할 때 성품은 어떻든지 덮어놓고 지체의 일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각각 지체로서 자기 본분을 다한다는 것은 일을 많이 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성격을 구성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몸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지체이면 먼저 도덕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것 없이 큰 일을 하면 무엇이 되는 것같이 생각하는 것은 큰 오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사랑이란 말을 사용해서 단번에 종합적인 도덕으로서의 사랑을 하되 거짓 없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속성, 품성은 선인데 악을 미워하고 그 선에 속하라 하였습니다. 또 형제를 사랑하되 사랑을 할 때에는 개인 개인 그 인격을 사랑하리는 것입니다. 지체의 일만 하면 저절로 사랑이 다 되는 줄로 알지 말고, 네가 한 교회 안에서 서로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에 대하여 내가 구체적으로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고 그냥 겉으로만 위장하고 살아가는가를 마음 가운데 깊이 반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도덕적인 품성이 성장해야 교회의 본질도 바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종교 단체의 하나로 모여서, 무슨 종교적인 일을 한다고 왔다갔다 해 보아도 교회로서의 성격을 제대로 나타내거나 발전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덩치만 큰 사람, 몸이 굉장히 큰 사람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렇게 아주 큰 거인이면 그가 위대한 사람입니까? 그럴 턱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는 먹어서 한 스무 살 먹은 만큼 키는 큰데 속은 열 살 먹은 아이 정도라면 그를 가리켜 충분한 사람,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형식을 꾸미고 종교 단체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크게 꾸며 놓았으나 그 속에 본질이 아주 빈곤하면 교회로서 무슨 의미를 가지겠는가? 그런데에서 어떻게 교회의 샘플을 보겠느냐는 것입니다. 몸만 큰 사람에게서 정상한 사람의 샘플을 못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를 크게 만들면 그것을 모두 교회의 샘플인 것같이 생각합니다. 그런 발상법이 정당한가?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교회관인가? 이런 생각이 너무 보편적이어서 오늘날 교회의 타락이 심하게 드러나는 현실을 주의하자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라고 해서 아주 좀더 구체적인 말로 자꾸 들어갑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막연하게 지내지 말고 서로 만나면 우애를 표시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우애하고 또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며그러려면 마음 기운데 존경이 있어야지 남을 무시하고, 미워하고 자기 자랑을 하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을 형성하는 요소들입니다. 교회를 형성하는 지체로서의 능력을 나타낼 때에 그 저변에 있어야 할 개인 개인의 도덕적인 성격을 먼저 규정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길 때 부지런하게 섬기라 하였습니다. 자기 일에만 몰두해 가지고 소홀히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현대와 같은 고도 사회의 산업 구조 안에서는 자기 생활을 위해서 많은 시간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회사에서 근무한다고 할 때 회사가 요구하는 대로 다 일해 주고 나면 실제로 돌아와서 쓸 수 있는 자기 시간이 많은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이런 산업 구조 안에서 살면서 부지런히 주를 섬기겠다고 하면, 자기에게 있는 나머지 모든 시간을 다 사용해도 부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마저 게을리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어서 주를 섬겨라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주를 섬기는 도리라는 말입니다. 그것이 없을 때는 omission 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은 commit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Do not commit robbery” 하지 말라는 것을 하는 그것은 큰 죄인 줄 알면서, 사랑하라 했고, 우애하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하고, 그래도 괜찮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크게 하나님의 뜻을 오해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 할 때에, 첫째 이 몸에서 우리가 배울 것은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고, 그 지체는 각각 다 다른 일을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한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을 통해서 필연적으로 당연한 공리(axiom)로서 알아들어야 할 것은, 그 한 몸이 동일한 명령 계통 안에서 같은 힘을 공급 받아서 일을 한다는 사실입니다명령하는 본위가 없이 제멋대로 움직여 나간다면 어떻게 지체들이 조화 있는 임무를 이루겠느냐 하는 이야기입니다. 지체란 말을 썼을 때에는 거기에 충분한 harmony를 생각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손은 손대로 제 할 일을 하려 하고 발은 발대로 제 길을 가겠다고 제각기 고집한다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목적 의식과 동일한 생명 안에서 늘 조화롭게 움직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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