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19, 2011

칼빈주의 예정론(3)

2. 무조건적 선택

선택의 교리는 예정, 또는 예지의 일반적 교리의 적용 즉, 죄인의 구원이란 문제에 관해서 생각된다. 웨스트민스터의 신앙고백에서는 이 교리를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경륜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인간과 천사들 중에 어떤 이는 영생으로 어떤 이는 영원한 죽음에 경륜되었다.(3 3)

하나님은 선택된 자를 영광에서 예정하는 것과 한가지로 그의 의지가 영원하고 가장 자유로운목적에 의해서 수단도 미리 정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 스스로가 물어야 할 제 1의 문제는 이 교리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다.

우선 에베소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어보자.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였으니」(1:4-5)

, 로마서 8:29-30절에는, 영원부터 영원에 걸친 속죄와 황금의 사슬이라 할만한 가르침이 있다.「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성경은「선택」을 개인의 공적과는 관계 없이 그것을 과거에 있었던 일과 같이 또 전연 주권적인 것으로 해 주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문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성경에는 사람을 선택하는 자, 사람을 하나님께 접근시키려는 자는 하나님이라 가르치고 있다. (65:4 참조) 알미니안주의는 이 선택을 하나님의 손에서 빼앗아 인간의 손에 넘겨 줄려고 한다.

만일 선택이 사람의 신앙과 복음적 순종에 근거를 갖는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스스로 예견하시는 사람으로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자만을 조심스레 선택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구원은 전연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선택의 교리를 부정하는 자는 자기 모순의 입장에 서게 되는 자이다. 구원은 인간의 소원이나 노력에 의하는 것은 아니며, 불쌍히 여겨주시는 하나님에 의하는 것이다.(16) 왜 그가 구원되는가?, 왜 이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이 구원되는가? 다만 그 이유는 만물을 자기 의지가 있는 곳을 따라 정하시는 하나님의 의향에 의해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이 영원, 무조건의 선택의 교리는 때로는 개혁주의 신앙의 심장이라 일컫는다. 이것은 구원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마니안주의는 제공된 은혜의 수용을 결정하는 바 인간의 신앙과 순종하는 행위를 강조한다. 신비중의 신비는 무한의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 이 유죄한 인류의 전부를 구원에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고 그 몇 사람이라도 구원에 선택하셨다는 사실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예정은 예지위에 세워지는 것은 아니다. 예지되는 것은 확정된 것이다. 그리고 예지된 자만이 한정된 자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 선택의 교리가 혹은 일반적으로 예정까지도 예지위에 세울 수 있다고 가르치는 구절로서 곧잘 지적을 받는 절이다. 이것은 로마서8:29-30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도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 있는 「아는」이란 말은 곧 단지 있는 일을 인지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에 쓰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와 같이 「알려진」자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의 특별함이며, 독특한 대상이란 것을 보여준다. 이것을 유대인에 관해서 말할 때에는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3:2)라고 있는 것과 같다. 만일 바울이 「미리 정한다」는 말을 선택이 단순히 예지 근거로 한다는 의미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선택이 다만 하나님의 뜻에 의한다는 성경의 어디에서나 보이는 그의 주장과 모순이 된다는 점에 같이 주의를 해야만 되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의 견해는 선택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서 인간의 손으로 넘겨진다. 이것은 전능자인 하나님의 목적을 배신한 인간의 불확실한 의지에 의해서 조건이 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일시적인 사건을 영원적인 행위의 원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 된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옳은 일을 하도록 고심을 하면서도, 언제나 그들의 사악한 의지로 배신당하는 마음씨 좋은 아버지와 같이 취급하려고 한다. 이와같은 교리는 다만 비성경적이고 불합리일 뿐 아니라 정녕 하나님에 대한 모욕이라고 말해야만 된다. 원래 인간의 신앙도 또 하나님의 은사이며 회개도 또 하나님의 은사였다. 「하나님은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이방인에게도 주셨다」(11:18)는 것이다. 또 세례 요한의 유아에 관해서 말한다면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눅(1:5)라 한 것과 같이 그가 그렇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사인 것이다.

빌립보서 2:12-13절에서 우리들이 두려워 떨며 자기의 구원의 달성에 힘써야 한다고 격려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그 뜻과 업을 행해 나가기 때문이다. 회심이란 하나님의 파격적이고 주권적인 은사다. 죄인은 스스로 하나님께로 전향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어떠한 영적인 선을 행하는데도 그것에 앞서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전향되고 새로워 지지 않으면 안된다. 바울 자신도 하나님의 뜻을 알고 또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 선택된 것이며 그가 그서을 행할 것을 예견했기 때문에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22:14-15) 하나님의 자애의 성실이 두드리는 자를 위해서 열 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두드리게 하고 그리고 구하게 하는 것이다.

선행이 구원의 근거는 아니다. 그것은 구원의 열매 또는 증거로서 절대적이며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포도나무에서 포도가 여는 것 같이 자연스럽게 신앙에 의해서 산출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구원은 「행위에 의하는」것이 아니고,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인 것이며, ( 2:9-10) 선한 행위는 그리스도 신자에 있어서는 호흡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호흡하는 것이며, 여기서 살고 있는 이상은 호흡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이 견해는 자연인이 생각할 수 있는 견해는 아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의 계획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 부름받지 않는 한,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우리들의 편견 또는 선입관념에 합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정에 관한 성경의 교리를 포기해 버리는 것은 전연 사려가 없는 태도로 간주할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은 행위는 창조자인 하나님을 피조물인 인간의 법정에서 심판하는 일이 되며, 우리들이 자기가 이해할 수 없었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지혜와 그 공의를 부인하게 되며 게다가 하나님의 계시를 기만이라고 단정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그 지혜를 가지고 씻지 않은 더러운 손으로 감히 하나님의 깊은 신비함을 알려고 하는 것은 실로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건방진 행위이다. 대 사도 바울조차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유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겠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11:33-34) 라고 말씀할 정도였다.

바울은 분명히 정죄의 주권까지도 선택의 주권과 같은 것으로 명확하게 단정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주권적으로 야곱을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내고, 한가지로 하나님을 주권적으로 에서를 미워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가 하나님은 그 원하는 자를 불쌍하게 생각한다고 이야기 한다면 동시에 그는 하나님은 그 원하는 자를 완고하게 하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9장 참조)

잠언 16:4절에는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되어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악한 자에게 있어서는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어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벧전2:8)라고 가르쳤다.

교회는 사실 거의 모든 시대에 그의 이성의 능력에 대한 과도한 자부심에 의해서 부패하고 또 자주 실패해 왔다. 그들은 그의 이성을 넘어선 필연적으로 순수한 계시에 속하는 교리의 그 합리 불합리를 판단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철학자는 사실을 가지고 만족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계시에 만족해야만 된다.

기묘하게도 31체의 교리를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그 모든 선입관을 버리라고 주장하며 또 하나님이 진리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데 도움이 없는 인간 이성에 의뢰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또 성경을 의심 없이 권위 있는 지도자로서 받아들여야만 된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예정 교리에 대해서는 그러한 원칙과 준거(framework)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권적인 그리고 영원적인 거룩한 결정에 의해서 인류의 일부를 구원으로 선택하고, 다른 이를 멸망에 보내신다고 단정하는 예정 교리의 이 일면은 우리들이 갖는 정의에 관한 일반적 관념에 위반되는 것으로 우리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이다. 그런고로 여기 대해서 변명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것이 아무 죄도 허물도 없는 인간에 대해서 행해지는 처사라면, 그 일부의 사람을 정죄하는 것은 옳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죄와 허물이란 상태에 있는 인간에 대한 조치인 것이다. 이것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다. 범죄자는 그 권리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멸명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행해지는 것이며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에게 궁휼을 보이실 경우에 다른 자에 대해서도 정의를 보여주신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우리들이 하나님을 부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우주 통치에 의심을 갖는 것이 된다. 인간은 자기의 덕으로 구원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의 죄로 벌을 받는 것이다. 칼빈주의를 냉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은 사람을 그 성경, 죄과에 관계 없이 구원에 선택하고 혹은 멸망으로 선택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이란 그와 같이 되어가는 것은 아니다.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그들의 멸망의 소극적인 원인일지도 모른다. 마치 의사의 부재가 병자의 죽음으로 으뜸 가는 원인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칼빈주의의 반대자가 곧잘 그려내는 구원을 찾아 사모하고 찾아오는 자에 대해서, 구원을 거절하는 하나님의 잔인한 그림은 너무나 야비한 만화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구원을 소원하는 모든 자를 구원해 주는 분이시다. 그러나 성질이 변치 않는 자는 아무도 구원을 원치 않는다.

하나님이 많은 죄인을 용서하므로 그의 궁휼을 나타내려고 영원 전부터 정한 것을 바른 일이라 한다면 하나님이 다른 죄인을 처벌하는데 있어서 그의 정의를 나타낼려고 영원으로 정한 일에 왜 강한 반대를 할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사실 하나님의 행위는 하나님의 영원부터의 행위라는 진리와 인류의 일부만이 구원된다는 진리와 이 두 개의 진리는 선택과 정죄의 교리를 완성하는데 충분하다. 만일 알미니안주의 자의 이론, 즉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위해서 죽어서 그의 죽음의 은혜는 실제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이론이 참이라면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 대한 복음의 전달을 위해서 무엇인가의 대비책을 마련해야만 될 것이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복음을 듣고 이것을 받아 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을 부정하는 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2:12).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가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0:13-14)

이것을 바꾸어 말한다면 구원의 오직 하나의 길인 그리스도에 관해서 아직 들은 일이 없는 이교도가 어찌 구원되겠는가 하는 의미이다. 사실, 복음을 갖지 않는 이방인은 멸망한다는 신념은 외국전도의 열의를 갖게 하는 가장 강한 이유이다. 만일 우리들이 그들 자신이 갖는 종교가 그들을 구원하는데 충분한 빛과 진리를 포함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는다면 그들에게 복음을 설명할 필요성은 전연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자의 외국전도에 대한 - 국내전도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 태도는 거의 이 질문에 대한 해답에 의해서는 대부분은 결정이 되는 것이다. 중국 서부의 오지의 암흑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라디오, 비행기, 근대 천문학, 기타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하는 것을 받지 못한 것과 같이 구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조건에 하나님이 인간을 두실때에 확실한 것은 일년 내내 동결되어 있는 시베리아의 북부에는 조금도 밀농사가 안되는 것 같이, 하나님은 그들이 구원되어야만 한다는 의도를 갖고 있지 않으실 것이다. 하나님이 만일 다른 계획을 가지셨다면 그 목적을 위해서 무엇인가의 기회를 주실 것이다.

이 정죄의 교리 - 하나님이 어떤 자를 정죄하고 멸망에 내어놓는다는 설은 알미니인주의 자가 즐겨 공격의 씨로 하는 교리의 하나이다. 이 교리에 관해서 먼저 알아두어야 될 것은 우리가 이 교리에 관련된 모든 비밀을 설명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책임은 이 교리에 관해서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말한다는 것 뿐이다. 이상과 같은 어리석은 논쟁에 대해서 바울이 던져준 충분한 한 마디는 그들이 하나님의 주권의 지혜 안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인 것이다절대 주권에 관련을 지으셨다. 그는 거기에 일체의 근거를 두셨다.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주권에 근거를 두지 않으면 안된다. 사실 알미니안주의 자는 여기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모든 일에 관해서 예지를 가지시는 것을 인정하는 그들은 왜 하나님이 죄있는 생애를 보내고 복음을 거역하며, 회개하지 않고, 죽고 영원의 멸망에 괴로움을 당한다고 예지하시는 자를 창조하셨는가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