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26, 2011

시편 1 편 (2)


시편 1편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확연히 대조 되어 있는데, 그 하나는 행복스런 사람 즉 의인이라는 말로서 표시를 했고 또 하나는 악인, 죄인, 오만한자 이런 이름을 가지고 표시하는데 그것을 대표적으로 쓰는 말은 악인이라는 말입니다. 4절에 "악인은 그렇지 않다" 해서 악인이라는 말을 대표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행복스러운가 하는 것을 시인은 노래하는데 물론 그것만이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편 1편에서는 특별히 세 가지 하지 않는 것과 두 가지 하는 것을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복의 개념을 이 세상 사람이나 옛날 고대의 헬라사람들을 위시해서 인류에게 끊임없이 내려오는 소위 행복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을 지난시간 생각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복, 즉 산상보훈에서 복이 있다 하는 말이나 여기 이 시편 1편에서 복을 이야기 할 때 그 복이라는 개념을 주의해서 바로 생각하지 않고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행복, 그리고 쾌락 자기 정욕의 만족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항상 개인이 하나님 앞에 복을 받고 산다 하는식 생각을 하기가 쉬운데 이것이 교회 안에 많이 영향을 주고 있는 현실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더라도 큰 교회 같으면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이 많이 섞여 있을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을 모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대로 이 장소에 와서 자기가 하나님과 교통해서 은혜 받으려고 온 것이고 본인은 본인대로 내가 또 하나님 앞에 교통하고서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겠다고 하는식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교회의 회중 즉 성도의 거룩한 교통 이라는 의미는 별로 없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어떤 일정한 장소에 목사가 예배를 집행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따라서 나도 예배를 하고 복 받고 가겠다 하는 정도의 생각이지 자기가 교회 회중의 한 분자로서 이 회중을 형성시키는데 자기는 자기의 부분이 있고 자기의 해야할 것이 있다는 생각이 희미해서 생각하는 것이 개인주의적인 것, 개인적 행복추구라는 점에 맴돌고 있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일이 많은 것을 주위에서 보게 됩니다.

또한 선행을 한다 할 때라도 자기 개인이 아주 거룩해져야하겠다. 도덕적으로 완성의 경계를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나가겠다 하는 정도의 생각에서 늘 맴돌고 있지 자기가 왜 이 선행을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자기 개인의 도덕적 완성이란 것을 떠나서 별로 무엇을 생각하는 일이 적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안 믿는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선을 행하면 이렇게 함으로서 자기도 좋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 그 만큼 유익을 끼칠 테니까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혹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사회의 복지를 위해서 나는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사회에 그 만큼 봉사를 하고 기여를 하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지만 오히려 많은 기독교인의 경우에는 생각을 거기까지도 하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시편 1편을 보면 개인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복 있는 사람은 이렇다하고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이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그러한 잠재의식이 있든지 혹은 선입관이 있든지 또한 그런 견해를 가졌으면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복 있다 하는 것이 결국은 나 개인의 도덕적인 완성이라든지, 나 개인이 하나님과 긴밀한 교통을 가져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리고 칭찬을 받고 그렇게 살아가는 결국 생각이 자기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로 다 끝내고 마는 이런 생각을 우리가 참으로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신앙생활에서 장성을 하지 못할 때에는 항상 그 신앙이 개인적인 것으로 그치고 교회의 한 분자로서의 교회아의 의식, 내가 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편교회의 지체 안에서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개인의 존재의 의미도 그런 교회 안에서 가지는 것이며, 구원도 교회 안에서 비로소 가지는 것이다 라는 이런 생각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내가 그의 지체라고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결에 의해서 지체가 된 사실을 떠나서 구원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었으면 나만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자가 거기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의 거룩한 신령한 몸을 이룬다는 이 큰 원칙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원래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어있어서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가치로 인정을 받을 존재가 아니었지만 그 존재의 가치가 인정되는 시간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서 거룩한 그 신령한 몸의 한 분자가 된 까닭에 받은 것인데, 이렇게 하나님 앞에 살았다고 인정을 받는 것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고 생명이 연결되어 있는데서만 받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생명의 연결이라는 것을 나 개인이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으면 그만이다 하는 심히 부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신령한 새 몸을 이루실 때 나 하나만을 대상으로서 이룬 것이 아닙니다. 원래 그리스도께서 그 신령한 대상을 이룰 때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자를 그 거룩한 생명체에 소속하게 한다는 이 전제하에서 하시는 까닭에 나를 하나의 완성품으로서 그리스도와 나와 연결되어 있으면 그것으로 더 바랄 것 없이 완성한 것이다 하고 만들지를 않았습니다. 다른 모든 지체가 와서 붙어 가지고 신령한 몸을 이루기까지는 완성이 없는 까닭에 그런 나를 향해서 날마다 성전이 되어서 지어져 가는 것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2:20-22)

이렇게 명백히 가져야 할 사상은 철저한 개인주의가 아니고 행복스럽던지 또 하나님 앞에 유용하던지 간에 개인주의적인 사상에 근거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생명의 일체를 이룬 거룩한, 신령한 몸,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의 나의 의미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체가 완성하기까지 철저한 의미로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러한 사상의 그 견지에서 시편 1편이든지 어디든지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시인은 시의 형태로 표현을 해서 그것이 서술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여기에서 하나의 사회적인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을 주의해서 보면 소위 하나가 아니고 복수로서 쓴 것들이 여러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원문의 단수 복수를 정확하게 표시해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복 있는 그 사람들은 영어 같으면 ‘the man’으로 소위 말하는 대표 단수로서 복 있는 한 그룹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악인들의 꾀라고 할 때는 꾀는 단수이고 그 꾀의 출처인 악인은 복수입니다. 어떤 한 악인의 의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죄인들의 길에서는 길은 단수고 죄인들은 복수입니다. “오만한자들의 자리에서는 자리는 단수이고 오만한자들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수에서 그것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하나, 그것은 공동의 소유이고 그리고 그것은 보편의 한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악인들의 사회가 있고 여러 사람이 만들어낸 사회의 의논이라면 그것은 '공동의 의견' 즉 공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다 그렇게 공통으로 보편적으로 생각해 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다 할 때도 어떤 한 악인이 괴상하고 비상한 꾀를 내서 그대로 하자 하는 그런 식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악인이라고 규정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누구에게나 공동으로 보편적으로 다 지지하고 그렇다고 하는 그런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수 단수를 분명히 하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 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에서는 나무는 단수이고,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여기라는 것은 복 있는 사람 한 개인을 의미하는데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뽑힌 한 사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선택받은 한 사람, 그 사람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4절에서는 그 악인들은에서자라는 말은 꼭 어떤 것을 지정한 것 보다도 너희들 생각하고 있는바 소위 악인의 모든 수, the evil man이든지 the wicked 이렇게 말할 때에는 결국 악인의 총수를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 있어서의 the wicked, 그 악인들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회중에서 회중이란 congregation, 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결속이 되어있는 자리인데, 그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회중이란 말은 구약에서 사용된 말인데 70인역에서는 교회라는 말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예배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하나인 것을 의식하고 모여있는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기도 의인들의 길, 악인들의 길, 할 때 길은 단수이고 그 앞에 있는 형용사는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 시의 정신으로 볼 때, 복 있는 사람의 행복이라는 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 사회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항상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시적인 표현으로서 명백하게 사회적인 성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시인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사상이 이런 문장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그러나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한다의인들의 회(에다), 또 의인들의 길 이러한 말로서 거기 또 역시 보편적인 어떤 사실, 공동의 사실을 표시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을 읽을 때 첫째 하지 않는 3가지가 있는데 악인들의 의논이나 사상이나 의견을 다만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고 그것을 취할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그리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이성이란 것, 사람의 지적 작용이라는 것은 악인의 사상과 가치관을 취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것이다 옳지 않은 것이다 생각하고 그것을 판단을 해서 포기를 하지만 그리고 포기하는 까닭에 그 의지도 분명히 그의 바른 인식에 의해서 악인과 같이 움직여 나가지 않고 그리로 행치 않는데 그러면 그 사람의 감정은 이런 때 어떤 상태인가? 물론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즐거워하는 것은 그 악인들의 사상이나 주장이 아니고 여호와의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율법에서 기쁨을 얻고 그것을 연구함으로 그 세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차츰 차츰 더 탐구하고 터득해 나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여타의 악인들의 사상이나 주장이나 그러한 것들이 그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지,,의가 정당하게 움직이면 그런 사람이 참으로 행복스러운 사람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하나님 나라의 사상을 형성하는데만 그런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길을 결정을 할 때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 자기네가 어떠한 길로 인생을 걷고 있어야 가장 유리하고 행복스럽다고 생각해서 자기 인생의 행복을 찾아서 유리한 길을 생각하고 모두가 같이 인정하고 그래서 따라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성격의 길을 죄인들의 길이라고 하는데 그런 죄인들의 길에 서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어떤 길에 서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 길을 걸어왔고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 서 있는 길에 서서 계속 걸어가겠다는 것인데, 복 있는 사람은 그런 성격의 길로 걸어온 것도 없고 앞으로 그리로 걸어 갈 사람도 아니란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인생의 길이라는 것은 별달리 있어서 걸어가는 길이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서의인의 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은 인정하신다는 것인데 그 의인들이 가는 길이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어떤 한 개인이 자기 일생의 길을 어떻게 갔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모든 하나님 앞에 복을 받은 의인들은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것은 좁은 문으로 가고 험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가지만 그리고 그것이 죄인들의 길이지만 생명을 향한 길이란 좁은 길이지만 의인들의 길이며,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해서 오만한자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자리가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한 의자의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사람이 살고 생활하는 터전을 의미하는 것인데 즉 "모샤브"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오만한자들의 그 거처에 같이 가서 그 세계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인의 길로 가다가 보면 오만한자의 자리, 그런 세계에 도달하겠지만, 복있는 사람은 그러한 그릇된 의견도 안 듣고 그리로 가지도 아니 할뿐 아니라 죄인의 길에 서서 결국 오만한자의 자리에 이르는 그런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계시다 하더라도 인생의 길은 우리가 스스로 경영해야 한다. 나는 내가 내길을 정하고 내가 할 일을 내가 한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해야하고 우리가 복리를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나 개인의 복리뿐만 아니라 남의 복리까지라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한 노력을 한다면 그것이 최고의 선이 아닌가. 이런 철학, 이런 생각 가운데서 사람은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러한 사람들은 인간이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한번 진노하시고 사람이 범죄로 말미암아 받는 이 비참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그러한 기본적인 사실을 무시하고 인간이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행복스럽게 만들 수 있는 것 같이 생각하고 혹은 적어도 그런 희망을 주는 까닭에 그런 주장을 자꾸 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는가 그 진노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어찌 할 길이 없는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자기가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고 건설하겠다는 노력을 하지만 참으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현재의 이 비참하고 괴로운 현실이란 것은 무엇이 원인이고 그 원인은 그대로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을 기본적으로 바로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기본적으로 생각하면서 자연히 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 할 때 자기 개인과 동시에 사회라는 것을 생각할 수 밖에 없듯이 의인들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을 하는데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로 어떠한 세계를 추구하고 사모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어떠한 마음자리와 생활 행동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개인적으로도 알고 그리고 자기 개인에게만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세계가 거기 건설 되어야하고 어떤 여러 사람의 사회가 거기 전개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사회가 바로 전개되고 바로 건설되고 바로 나타나기 위해서 나는 내 부분이 있다 하는 것을 비로소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열매를 맺을 때 그 열매에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열매가 자기 개인의 선한 행실로 끝나는 정도라면 이 시의 의미가 바르게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항상 이 시가 가지고 있는 그 정신, 기저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항상 드러내는데 행복스러운 사람의 참된 행복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생각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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