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25, 2011

믿음에 대하여 (1)

역사신앙 (누가복음 8:26-36)

구원의 증거로서의 믿음

일반적으로 믿음이라는 말은 지식이라는 말보다 약한 상태를 의미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무슨 일에 관하여 말을 하고 나서 막상 그 말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기를 원치 않는데 직접 그런 요구를 하기는 어려우니까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는 전하지 아니 할 줄로 제가 믿습니다하고 돌려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이 절대로 그 말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런 말이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영어에서도 “I believe….” 라는 말이 이하의 사실을 내가 획실히 알고 있다 하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믿음이라는 말을 이런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 또는 신앙이라는 말의 의미는 훨씬 중요한 종교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는다는 말이 항상 믿음과 관계되어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결과를 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과 관계되어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결과는 물론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 3:16). 한마디로 믿음이라는 말은 영생을 얻는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것은 성경은 믿음을 가로 영생을 얻는다는 개념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말에서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할 때 이것이 댓가를 나타내는 것인지 아니면, 순서를 나타내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도리는 개혁교회의 중요한 성격을 표시하는 것이므로 분명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구원의 사실이 거기 있다는 것을 실증해 주는 구체적인 내용이 바로 믿음이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이 나에게 있어서 그것을 공로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명확한 정신은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것” 이라는 유다서 1:3의 말씀에서 보듯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셔서 그것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확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믿음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사실과 동시에 그의 영혼의 기능 가운데 믿음이라는 중요한 현상이 벌써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뿐입니다. 복음주의를 따르는 어떤 교회에서는 믿음을 댓가로 생각해서 “믿으면 그것 때문에 구원받습니다하고 사람이 믿음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교리는 그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구원하셨으면 그것 때문에 그의 영혼의 기능에는 믿음이라는 확실한 능력의 작용이 있어서 다른 사람 앞에 구원받은 자라는 것을 증거하기도 하고, 구원받은 자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구원받지 못한 이 세상 사람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증거하기도 합니다.

역사적 신앙과 역사 신앙

성경에서 이렇게 믿음이라는 말을 종교적인 의미로 썼을지라도 언제든지 구원과 연결된 구원의 실증으로서의 믿음만 표현한 것은 아닙니다. 개혁교회는 역사적으로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도리에 따라 믿음을 다음과 같이 구별하여 중요하게 가르쳐 오고 있습니다.

첫째는 역사 신앙 이라는 것인데, 어떤 명확한 지식에 의해서 그 사실을 시인하고 나가는 신앙입니다. 거기에도 믿는다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나는 사실이 그런 줄로 확신합니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적 신앙 입니다. 기적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을 뿐 아니라 자기가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믿고 그 기적을 행하기 위해서 기적을 내리시는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주여! 믿습니다 이 병을 낫게 하여 주십시오” 하는 이것도 하나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역사 신앙처럼 어떤 특이한 종교적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반드시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기적을 믿을 뿐 아니라 자기가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반드시 구원받았다는 증거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현세 신앙 인데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열심히 종교를 행하고 지지하고 나가므로 진실한 신자인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 신앙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강한 자기”  라는 것이 속에 계속 머물고 있어서 도무지 신앙의 바른 열매를 내지 못하는 그런 신앙입니다.

넷째는 구원의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실과 내용을 바로 고백하고, 그 실증으로서 성신의 능력으로 드러나는 삶의 열매를 맺어 나가는 신앙입니다.

오늘은 먼저 역사 신앙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역사의 여러 가지 사실을 기록한 역사책을 읽을 때 사가들의 학자적인 양심을 신뢰하고 책을 읽습니다. 사가들이 당시에 있던 시실들을 모아 기록해 놓은 것이라는 것 때문에 우리가 직접 본 일이 없을지라도 그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시저가 루비콘 (Rubicon)강을 건넜다고 하지만 우리는 루비콘 강이 어디쯤 있는지도 잘 알지 못하고 시저가 거기를 어떻게 건녔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사실로서 믿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사실을 의심하게 되면 학문의 많은 부분은 벌써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사람이 학자였든지 역사가였든지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목격한 사람이었든지 간에 믿을만한 증거를 가진 증언자들이 증언을 하면 우리는 그 사람에 대한 신뢰 때문에 그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역사의 사실(historical fact) 을 믿는 것도 하나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거룩한 하나님 나라의 도리를 믿고 배우는 데에도 그런 식 신앙을 갖습니다. “위대한 칼빈 선생이 그렇게 말했고, 부처(Bucer)가 말을 했고 혹은 누가 말을 했으니까 우리도 그렇다고 믿는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이렇게 가르치니까 그래야 하겠다든지 또는 신학 서적을 읽고 “아 그렇습니다하고 신뢰하는 것도 하나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반드시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을 신학상 알기 쉽게 표현해서 역사 신앙이라고 합니다. 마치 역사의 사실을 믿듯이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역사적 신앙과는 구별됩니다. 영어로 역사적 신앙이란 “historic faith”라는 말이고 역사 신앙이란 ”historical faih” 입니다. “역사적 신앙이라 할 때에는 역사에 기념할 만한 위대한 신앙 즉 우리가 전승해 가는 신앙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역사적 신앙을 받이들이고 그것을 우리 자손들에게 전해 주어야 합니다.

역사 신앙은 비록 그가 신앙하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그 사람 속에서 그를 구원할 능력의 역사로 활용되는 일이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 신앙을 가지고 신학 공부를 하면 신학 공부는 많이 할 수 있지만, 구원의 사실에 대해서 획연히 실증할 생활의 경험이나 또 지금까지 지내 온 생활 가운데서 자기 마음속에 고백할 만한 확실한 신앙의 내용은 없는 일이 생깁니다. 믿음이 능력으로 자기 속에 역사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흔히 기독교를 하나의 지식 체계나, 학문의 체계로 받아 들이는데에서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현대 신학계의 큰 조류 가운데 하나는 역사 신앙에 주저앉아 신학을 하나의 학문 체계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결과 신학이 신학이기보다는 거의 종교학이 되고 개인의 철학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에 지식만을 추구하는 사실에 주의해야 합니다. 많은 책을 읽고 배운 것이 많다고 해도 사람의 인생의 중대한 문제 앞에서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능력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교사된 사람들은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너무 지나치게 말만 많이 하고 사실상 내 속에 그것에 대한 확신과 확신에 의한 기쁨이나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내용이 없든지 부족하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아라”( 3:1) 고 하신 말씀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워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실 때는 전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아본 귀신들

누가복음 8:26-36절의 말씀을 보면 역사 신앙이 얼마나 공허한가 하는 실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은 거라사인의 지방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귀신 들린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기록입니다. 여기서 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취한 행동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 사납고 무서운 사람은 무덤 사이에서 거하는 자였는데 예수님을 보고서 부르짖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부르짖으며” 이 부르짖었다는 말은 큰 전율이 지배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말로 부르짖는다 하면 화가 나서 부르짖기도 하고 원통해서 부르짖기도 하겠지만 이말은 “아악!" 하고 소리를 냈다는 말입니다. 영어로 “cried out”이라는 말입니다.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즉 그 앞에 넘어졌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보고서 스스로 허리와 다리를 구부렸다는 것보다는 탁 엎드러졌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그 앞에 엎드린 다음에 “큰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하였습니다.

구약에서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만나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란 말을 사용해서 축복을 했고 아브라함도 바로 그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보통 이방 사람의 신 개념 가운데 제일 두드러진 개념입니다. 가령 ‘야웨’ 라고 할때는 분명히 하나님과 계약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엘 엘론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라 할 때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하나님’ 이라는 말 자체도 벌써 그런 의미를 기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란 말이 하나라고 하는 뜻에서는 유일하다라는 말도 되지만, 하늘님이라 할 때는 저 높은 하늘을 벌써 생각하는 것입니다. 끝없이 가장 높은 분이다. 이방 사람의 신 개념에서 일차적으로 표시하는 것은 높은 분이라는 개념입니다. 이렇게 천하의 만민뿐 아니라 지으신 모든 피조물들이 그 권능의 왕국을 다스리시는 왕의 통치 아래 있으므로 권능의 왕의 통치를 받는 만물이 왕에 대하여 다 같이 느끼는 것은 이 천지와 만물과 우주 만물 위에서 가장 높은 분이다하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귀신도 하나님을 천지와 만물 위에서, 이 귀신들의 세계나 혹은 천군과 천사의 세계 위에서 홀로 높이 계신 가장 높은 분이라고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영생하시는 하나님’ 혹은 ‘만군의 여호와라는 것은 하나님을 언약속에서 경험했을 때 그 사람 속에 들어가는 신 개념입니다. 아브라함도 그의 신 개념이 자꾸 발전해서 나중에는 ‘전능하신 하나님’, 그 다음에는 ‘영생하시는 하나님’ 이런 식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역사 신앙의 예
귀신 들런 사람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하고 부른 것은 흔히 알렉산더처럼 위대한 인물을 신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헬라적인 관념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가 분명히 아는 대로 천지와 만물 위에서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 종교가들이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이렇게 알지 못했습니다. 혹시 메시야일는지 모르겠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생각한 메시야는 사람에 불과한 존재이지 신성을 가졌다든지 가장 높으신 엘 엘리온과 직접 관계되어 우리로서는 쳐다볼 수 없는 높은 곳에 계신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귀신은 예수님의 신성을 숭엄하게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에 대하여 깊이 감응을 하고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하고 확실하게 예수님을 알아 본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나와 당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 말을 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우리가 당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에 오셨나이까?" 하는 말이 나옵니다 마태복음의 기록은 특별히 예수님의 왕권을 그리고 있습니다. 우주 만물과 모든 것을 다스리는 권능의 왕권과 또한 그 택하신 백성을 다스리는 은혜의 왕권을 모두 묘사합니다. 물론 마태는 은혜의 왕국의 왕권을 표시히는 것에 주력하고 있지만 권능의 왕권을 표시할 때는 사귀들이든지, 마귀든지 영계에 있는 모든 인격자나 모든 존재에 대하여 왕권을 행사하고 게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하는 말은 자기들이 어느 때에 심판을 당하고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그들은 무저갱으로 들어가서 받는 고통을 아는 까닭에 “지금 우리를 무저갱으로 들여보내지 마십시오. 아직 때가 좀 남지 않았습니까?" 하고 간청한 것입니다. 오히려 귀신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과 그 나라의 경륜 가운데 나타날 시기를 상당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오늘날 많은 사람보다는 훨씬 잘 알고 많이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심판을 받는 시간이 올 줄은 압니다만 아직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당신께서 육신의 몸을 입고 땅에 계시는 동안은 그 시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은 은혜를 가지고 오셨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려고 오신 분이지 심판하러 오신 분이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왜 지금 우리를 찾아오셨습니까? 무서워 죽겠습니다하는 그런 태도입니다. 귀신들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어떤 의미로 세상에 오셨는지 알고 있는 까닭에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이 “나하고 당신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하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에게 직접 접촉할 일은 없지 않습니까?" 하는 말입니다 귀신들은 이런 사실들을 잘 알았던 것입니다.

야고보서 2:19을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유일신을 네가 믿고 있구나 잘한다” 이렇게 하신 다음에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귀신들도 그런 신앙은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의 대권을 알고, 하나님의 그 엄위와 두려우신 속성에 대하여 믿고 떨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귀신들은 그 믿음 때문에 구원 받았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사실을 사실대로 믿는다고 해서 또는 어떤 신뢰할 만한 사람이 잘 연구해서 전달한 사실을 믿는다고 해서 그것으로 말미임아 구원을 받았다고 자만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직접 구원의 증거가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기본적인 구원의 요소가 그 사람 속에 있어야지 말씀에 대한 지식이 구원의 요소와 분리되어 있는 상태에서 끝없이 지식만을 추구하는 것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지식의 재료를 제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종교 지식과 구원은 무관함

세상의 다른 경전들은 종교학의 재료로서 유용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경전에서 끝나든지 지식의 재료나 신학의 원천에 그친다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도리입니다. 개혁교회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명확하게 선포하고 가르쳤습니다. 성경이 신학의 원천 노릇을 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물론 신학이 되려면 계시하신 말씀을 가지고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떠나서 자기가 사유하고, 사색해 나가는 종교를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철학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성경이 신학의 원천으로 존재할지라도 구원의 거룩한 수단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의미 없는 것입니다. 성신님께서 말씀과 더불어사역하시는 사역과 활동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능력으로 존재하고, 지금까지 알지 못하고 막막한 가운데에 있다가 확실히 그것을 믿게 되는 사실도 있어야 합니다. 즉 단번에 믿음의 도를 주시면 그로 말미암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닌가 긴가 방황하지 않습니다. 방황한다는 것은 안 믿는다는 말밖에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억지로 믿어 보려고 종교적 감정을 일으켜 보려고 하는 것도 신앙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에 중요한 요소가 되려면 그것이 구속의 은혜의 방도(means of grace)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물론 지식의 증가로 일어나는 마음의 기쁨이 있다면 그것도 하나의 은혜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반 은혜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라도 어떤 문제를 풀려고 골똘히 애를 쓰다가 문제를 풀었을 때 기쁨을 얻고, 또 알았다는 환희 속에서 그 지식이 하나의 힘이 되어서 그 다음 문제로 전진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것이 은혜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은혜의 수단으로 쓰인다고 할 때는 구속의 은혜라는 확실한 성격을 가진 것이라야 합니다. 그 사람의 생명의 양식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생명의 양식은 아무렇게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고 해서 생명의 양식이 되는 것은 아니고, 생명의 능력이 그에게서 작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우리들이 항상 중요히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19절에서 귀신들도 그렇게 믿고 떤다는 말씀을 한 후에 “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된 것인 줄 알지 못하느냐?” ( 2:2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 행함이 도덕적인 행동을 인간의 힘으로 다른 종교인들이 수행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행해 보려고 하는 식의 행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신께서 그 속에서 역사하셔서 믿음의 능력이 자연스럽게 생활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생활 행동으로 드러나지 아니하는 믿음은 관념에 불과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 ( 2:17). 그것이 무슨 믿음이냐? 그것입니다. 믿음이라 할 때는 거기에 능력이 함께 작용해야 비로소 믿음이란 말이 정당하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역사 신앙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2:26). 요컨대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는 것은 믿음이라고 말을 하기는 하지만 자기의 종교적 지식과 종교적 감정을 바탕으로 어떤 형태를 구성하고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생활 행동 즉 생명의 작용으로 나타난 행동과는 다른 것입니다. 믿음에 있어서는 생명의 작용으로 말미암아 그 믿음이 구체적으로 증거되는 것이 중요한데 그것이 없다면 자기 힘으로 건설하는 하나의 인간 종교의 형태일 뿐이라는 것이 야고보서의 가르침입니다.

교회에서 많은 것을 가르치지만 많은 것을 가르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고 배워서 거기에 의해서 장성해야 합니다. 이 장성한다는 것은 곧 생명이 그 속에 들어가서 양분이 되어 자꾸자꾸 커 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는 말씀처럼 차츰차츰 깨달음이 늘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도 갚어지고 또 인생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가운데 방황하지 않고 확실히 정립해서 자기의 갈 길을 가고, 개인이 아닌 교회아로서 자기 사명을 인식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중요한 생활입니다. 생활이라고 할 때에는 자기 혼자 선행을 하고 나가는 수도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지체의 한 분자로 존재하는 본의를 각성하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자기 의무와 자기 권리를 알고 이것을 충실히 나타내고 사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사귀가 예수님을 잘 알고 또 여러 가지 종교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알지 못했던 것까지 잘 보았고 그리고 잘 관찰했을지라도 그런 것이 사귀에게 구원을 갖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면서도 열심히 다른 학문을 하듯이 신앙을 하나의 학문 체계로 쌓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으로만 제공해 주는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교회의 가족이 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씀을 받아서 능력을 힘입도록 하려는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는 성신님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말씀 가운데 성선님이 내 속에서 역사하셔서 이 말씀을 쓰셔서 거룩한 능력을 내려 주옵소서”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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