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26, 2011

시편 1 편 (5)


시편에서 다룬 문제는 이 시인이 자연환경을 보고 아름다워서 그것을 노래한 것도 아니고, 인생의 슬픔과 기쁨에 대해서 무엇을 읊은 것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늘 계속해 나오는 악한 자, 또 의로운 자, 그 현상은 어떤 것인가를 연유를 써서 나타내고 그 운명, 혹은 장래는 어떤 것인가를 간단하게 읊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는 종합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그냥 읽으면 시가 가지고 있는 참된 의미와 깊이와 아름다운 것을 잘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간단한 시인 까닭에, 간단한 가운데 큰 것을 넣은 까닭에 또 그 다룬 제목이 가장 큰 인생 문제의 하나인 까닭에 그것을 우리가 바로 이해하려면 이 시에 있는 용어 하나를 쓰더라도 생각해서 쓴 시인의 그 심정을 생각하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읽어야 간단히 표현된 시 가운데 담겨있는 풍부한 의미를 파악 할 수 있게 됩니다.

구약의 많은 시편이 그렇지만 특별히 1편은 전 시편의 서문과 같이 쓰여진 까닭에 다룬 제목이 보편적이고 또 그만큼 심오한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이 시에 있는 용어들을 주의해서 생각해야 이 시를 통해서 나타내시려는 계시를 이해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문제는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시는 것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무엇을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많은 것 가운데서도 세 가지를 특별히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은 악한자의 의논대로 행하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행복스럽다. 요컨대 일종의 행복의 조건과 같이도 들립니다. 이러 이러한 사람은 행복스럽다. 그러고 그 사람을 표시할 때는 시냇물 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또 그 잎사귀도 마르지 아니함 같다고 그렇게 설명을 해 놓고 그리고 그의 행하는 일은 무릇 다 형통할 것이다 하고 앞으로 올 일까지도 그에게 큰복이 어떻게 큰 것인가 또 어떻게 시간적으로도 영원한가 하는 것을 느끼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복스러운 사람인 사실이 어떻게 증명이 되는가 할 때 시냇물 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는 이 말에서 그 현상이 그렇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열매를 맺는 사람이 받는 은혜가 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게 있는 가지로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하여 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욱 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이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포도원 농부와 같이 내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신다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열매를 더 맺게 하시고 더 풍성하게 맺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잎사귀도 마르지 않고 따라서 그 행하는 일이 형통하다 하는 것이 시인이 한 이야기인데, 그 열매를 맺는다는 것, 이것은 시적인 표현으로서 연유를 썼는데, 즉 비유적인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것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참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열매라는 것 그것 하나만 가지고라도 많은 것을 생각 할 수밖에 없지만 오늘 우리가 이 시편 1편을 읽으면서 열매를 맺는다 할 때는 단 몇 가지를 특별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 하셨는데 누군가가 심어 놓은 나무인 것입니다. 그냥 저절로 아무렇게도 난 나무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심어 놓은 나무는 어떤 나무인가? 를 생각 할 때 성경에 있는 이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5 13절에 말씀에서 그 입으로 나오는 것이 어떤 악이냐?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으로 인하여 걸림이 된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들은 소경이 되어서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이렇게 심은 것마다 내 아버지께서 심은 것이 아니면 뽑힐 것이다 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어 놓아야만 하겠다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으신 나무가 아니면 다 뽑힐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례미야 17 7절에도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이것이 예언가 예례미야가 그린 바 여호와께서 심으신 나무의 복스러운 상태입니다. 예례미야뿐만 아니라 또 선지자 이사야도 이사야 60 21절에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이것은 마지막 완성했을 때의 이야기인데,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이렇게 여호와께서 친히 당신의 백성을 땅에 심는다 하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사야 61 3절에도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의의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나무인데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고 그렇게 칭함을 받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심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80 8절에도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백성을 두고 노래한 것인데 이것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입니다.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신 다음에 그 땅에다가 이를 심으셨습니다.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80:9-12) 이것은 그 사람들의 심판에 대한 것을 또 생각하고 노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 그 이유가 있는데 주께서 심으신 그 백성, 마치 포도나무나 그렇지 않으면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이 물가에 서있는 나무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 마음대로 난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싱싱하게 자양을 얻고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심으신 나무는, 이는 거룩한 나무인데, 열매는 어떻겠는가? 물론 마태복음 12 33절을 보면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그러니까 주께서 심으신 나무는 주께서 바라시고 맺게 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7 17, 18절에도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무와 열매의 절대적인 관계 하에서 거기서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을 때 어떻게 되는가? 마태복음 21 18절에도 예수님께서 수난주간 월요일 아침 일찍 예루살렘을 향하여 베다니에서 들어가는 도중에 싱싱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당연히 거기 먹을 것이 있을 것으로, 참된 열매들, 그것이 있을 것을 생각하시고, 적어도 있을 것으로 기대하시고 바라보았지만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는 것을 다 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제부터는 다시 열매를 내지 못하리라 그러더니 그날 오후에, 저녁에 돌아갈 때 보니까 뿌리로부터 다 말라 버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그 이외에도 예수님께서는 비유로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찍어 버려야겠다, 왜 땅만 허비 해야하겠느냐?(누가복음 13:6-9)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또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와 가지의 비유로서는 내 안에 있는 가지로서 열매를 맺지 못 할 때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하여 버리신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열매를 맺지 못 할 때는 제하여 버리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열매는 반드시 선한 열매,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하나님의 징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도 포도원에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해서 주고, 비료까지 주고, 망대까지 세우고, 즙 짜는 기계까지 다 만들어 놓고, 그래서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그만 들 포도를 맺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포도원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울타리를 거두어서 먹힘을 당하게 하고, 시랑이가 거기 오고 못쓰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 5:1-7) 시편 80편 말씀과 같은 말씀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울타리를 거두어서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다 따게 하셨습니까? 하고 시인은 이야기하는데,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힐 때는 그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주의해야 합니다. 시편 80 12절에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거기는 시랑이 돌아다니면서 거하고, 집을 짓고, 엉겅퀴, 가시가 거기 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어떻게 하셨는가를 우리가 보는데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누구에게든지 열매를 제대로 맺지 아니하면, 그것은 반드시 맺지 아니한 사실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개인적으로도 아무 열매를 안 맺는다든지, 볼 만한 것이 없다든지, 좋은 포도를 맺어야 할텐데, 실컷 맺는 것이 들 포도 정도나 맺는다면 교회 오래 다녔다고 하는 것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라고 해서 얼마나 사람이 많이 모이고, 몇 년이나 되었다고 자랑해도 만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교회가 정당히 맺어야 할 참된 교회다운 자태와 능력과 영광의 열매를 맺지 못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를 그냥 두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열매에 대해서 세 가지 중요한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성신의 열매”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 22절로 23절에 그리스도의 품성에 대한 것을 특별히 표시 할 때, 성신의 열매라 하는 도덕적인 성격을 이야기합니다. 둘째는 “빛의 열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5 9절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또 특별히 이런 열매에 대해서 베드로 후서 1장을 보면 그것이 어떤 종류의 열매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셋째는 마태복음 21 43절 말씀에 “그 나라의 열매”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열매를 말씀하실 때에 악한 농부들이 있어서 사신을 보내서 열매를 구하니까 죽이더니 나중에 아들을 보내면서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고 했더니, 그 아들, 저건 상속자다 자 우리가 잡아죽이고 그것을 차지하자 하고 그 아들까지 죽인 이 악한 농부, 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그 주간 화요일에 하신 이야기인데 바로 목요일 날 밤에는 잡혀가시는 것인데, 역력하게 그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 악한 농부의 비유 끝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지만 무리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아는 까닭에 못 잡는다고 그랬는데, 거기에 이 마태복음 21 43절에 그 나라의 열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에게 주어질 것이다.” 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열매에 대해서 성경은 여러 가지로 열매란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무의 열매도 있고, 짐승의 열매도 있고, 토산물이라고 해서 땅의 열매도 있고, 혹은 입의 열매라는 말도 있고, 손의 열매라는 말도 있고, 열매라는 말을 아주 다양하게 히브리말은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물론 사람들이 모르게 은어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곧 손의 열매면 손이 일을 해서 만들어 낸것을 가르치는 것이고, 입의 열매는 말을 해서 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가 하는 것을 입술의 열매라고 하고, 태의 열매라 하면 아기를 의미하는 것이고, 짐승의 열매라 하면 그 짐승의 새끼를 의미하는 것이고, 나무의 열매는 나무의 과실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렇게 열매라고 하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빛의 열매, 성신의 열매, 그 나라의 열매, 이런 것들을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종합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것을 생각하면 열매는 첫째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성신의 열매라는 말로 표시했습니다. 갈라디아 5 22 23절에서 “성신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존절이라.” 이것이 성신의 한 열매인데 성신으로 말미암아 나는 열매 안에 있는 속성들은 이런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열매가 따로 하나 있고, 희락이라는 열매는 따로 있고 그런 것이 아니라 성신으로 말미암은 열매는, 그 열매라는 말속에는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그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다 희락이다 혹은 평화라, 평안, 참는 것이다, 혹은 자비로운 것이다, 또 양선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특별히 대인관계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대해서 충성스럽고, 늘 순종하는 온유가 있고, 또 늘 주신바 은혜를 필요한 때 가장 유효히 쓰는 존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첫째 필요한 열매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에베소서 5 9절부터 보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 고귀한 가치가 있는 것, 그러한 마음 자리라는 것인데, 첫째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 모든 착함과, 또 그 다음에 다만 마음자리만이 아니라 그러한 생활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착하게 의롭게 진실하게 늘 섬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봉사의 활동을 늘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착함, 성의, 정의, 진실, 그러한 열매라 하는 것이 빛의 열매라는 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런 다음 열매 없는 어두운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는데, “열매 없는 어두운 일에 참여하지 말아라 저희들이 하는 일을 보면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이러한 말씀을 보면 그 열매는 어떠한 행동과 또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행하는 일, 에베소서 5 8절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그러면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그러한 마음이나 그러한 생활 상태나 그러한 봉사나 그러한 구체적인 사업, 행동, 무슨 구체적인 일, 이런 일들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께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시험해 보아라. 이렇게 해보며, 저렇게 해보며, 주께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운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행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결과가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매라는 것은 도덕적인 품성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활 행동의 구체적인 결산들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열매라는 말로 표시한 것입니다. 또 다음에 우리가 베드로후서 1 4절로 9절을 보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이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주신 이 새로운 언약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정욕적인 것에 가담치 않고 그것을 피해서 신에 성품에 참여하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닮아가는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성품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얻게 하시려고 했으니 너희가 그렇게 되려면 물론 성신께서 우리 안에서 주장하셔서 우리 안에서 그것을 심어 주셔야 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 성품이 구체적으로 확연하게 바깥으로 장성해 가면서 드러나려면,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들을 더해 주어라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덕성이 우리 안에서 더욱 더욱 증가 되어나가면,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한다”, 또한 여기 열매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도 않고, 열매 없는 사람이 되지도 않고, 헛되이 잘못 알고 자기의 종교로 알고 돌아다니지 않고 진짜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바로 아는데 유효하고 유실 할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열매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열매라는 것은 어떤 지식의 내용으로 말미암은 결과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지식, 그리고 그 안다는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아 가지고 열매가 있다는 의미보다는 알기를 깊이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증가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히브리 말 안다는 말, “요데아혹은 야다”, 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권능을 행하고 많은 큰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습니까” 하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 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예수님께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모르실 리가 없는 예수님 입니다. “난 너를 모른다” 여기 알고 모른다는 말이 히브리적인 사상으로는 중요한 것입니다. 너하고 나는 아무 관계도 없고 구체적으로 너와 내가 함께 합작해서 일한 일도 없고 같이 생활 가운데서 분명히 무엇을 증거 할 만한 것을 쌓아올린 일이 없다. 이것이 히브리적인 야다혹은 요데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이런 안다는 말은 단순히 그 헬라적인 지식이 있다 무엇에 대한 인지가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경험과 생활과 그러고 생활 경험 가운데 나타난 어떤 구체적인 것들이 거기 있다 하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안다 모른다는 말로 참으로 중요한 내용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렇게 깊이 알아서 자기가 그렇게 알기에 필요한 장성을 하고 그 결과 그 만큼 봉사한 경력으로서 그리고 쌓아 놓은 역사가 거기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서, 너희가 만일 이러한 것들, 믿음에 덕, 덕에 지식, 지식에 절제, 인내 이런 것이 있으면,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도 아니하고 오랜만에 있다가 조금씩 알아보고 그런 것이 아니고 항상 부지런하게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짜로 그리스도를 아는데서 열매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지적인 축척뿐 아니라 그것을 보증 할 수 있는 생활의 경험과 경력과 또 역사가 거기 함께 드러나는 것이다 하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빛의 열매라는 것을 가지고 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열매라는 것이 거기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라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대권이 어떻게 역사하는 가를 자기가 알고 찾아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안에서 다스림을 받은 사람다운 구체적인 자기의 생활이 거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까닭에 나 혼자가 아니고 성도끼리 결속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룬 그 사회 안에서 사회적인 구체적인 현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사회적 현실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도의 교통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어서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점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이 없이 교회라는 것을 생각 할 수가 없고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없이 교회라는 것을 말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도의 교통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보이는 사람들끼리도 교통이 있는 까닭에 이것이 사회적인 의미를 늘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단순히 마음 가운데 있는 의와 평강과 기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교통 가운데 구현되는 구체적인 목적을 향한 공동의 노력이고, 공동의 마음 쓰임이고, 공동의 봉사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시를 하려면 나 혼자 앉아서 기도만 하고 종교만 가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교통이라는 사실에서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가도에서 함께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무엇을 위해서 여기 있는가? 역사적 사명은 무엇인가? 첫째는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둘째는 유지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우리의 교회는 존재해야 하는가? 할 때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필요한 일들을 해야 한다 것입니다. 이 일을 할 때에 공동으로서 협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적인 사명인데 이 교회의 사명을 한번 느꼈으면 그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해야합니다. 사명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분부하시는 것인 까닭에 내 마음대로 했다 안했다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충성을 다해서, 한번 맡은 자에게 요구 할 것은 충성인데, 충성을 다해서 해 나아가는 데에 그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열매라 할 때에는 아주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해 놓은 업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그 나라의 열매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을  사랑했다고 한다면 사랑한 결과 무엇이 있는가? 충성을 다했다면 충성한 결과 무엇이 있는가? 그것이 현실 사회에서 어떤 구체적인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위에서 작용해 나아 갈 때는 구체적인 사회적인 능력의 발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서 나가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것은 나 혼자만 그냥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무리 가운데 하나로서 혼자 하나님하고 관계해 가지고 성도 노릇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합쳐서 성도의 교통함을 통해서 교회가 보이지 않는 실질을 보이는 유형의 교회로 나타내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 능력과 덕, 추상적이나 그러나 분명히 거기 존재하는 강력한 이런 거룩한 능력들을 보이는 현실로서 나타낼 때는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답게 성도의 교통과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사실이 그들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개인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국가의 국민들이 법칙 가운데서 움직이듯이, 일정한 법칙 하에서 그것이 움직여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이라는 것이 분명히 거기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지키고 충실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들인 것입니다. 다만 구약에 있는 율법만이 아니라 어떤 형식으로든지 하나님이 ‘하라’ ‘하지 말아라’ 한 것들을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하라’ 한 것은 해야하고 ‘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신약에도 있고 구약에도 다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형식으로서의 법을 우리가 충실하게 해 나가기 위해서 성신을 의지해서 그 인도와 주장과 힘 주심으로 나타내고 생활해야 합니다. 그런 생활의 결과가 곧 하나님 나라의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하면서 시간 속에서 어떤 길을 가는 것이고, 자기 일생의 길을 가는 동시에 뒤 돌아보면 생활 행보 가운데 지어놓은 역사라는 것은 좋거나 나쁘거나 내가 만들어 놓은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증명하는 성격을 늘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백성을 세우신 다음에 경영하셔서 나타내시려고 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을 그 백성이 점점 깨달아서 그것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 가운데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이 단순히 종교 하나를 만드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모든 생활을 규제하고 통제하시는 까닭에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나타내시기를, 어떻게 하시기를 바라시는가? 하는 이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나타내 보여 주시려고, 산상수훈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표시하고 선언했을 때 그것은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지 사람이 교회에 가서 어떻게 해야 할 종교적 규례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같이 사람은 자기 생활과 사회와 또 공동의 시민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증시할 수 있는 그런 각성과 그러한 장성의 성숙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열매로서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 복 있는 사람은 그러한 열매를 맺는 사람인 것입니다. 무조건 복만 받으려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열매를 맺는데서 행복스럽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를 중심으로해서 복을 자꾸 받는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 말이 원문대로 보면 이런 상태에 있는 그 사람들의 행복이여!” 라는 말로서 이러한 열매를 맺는 그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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