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26, 2011

시편 1 편 (3)


시편 1편에 나타난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악인의 의논, 죄인의 길 그리고 오만한자의 자리라는 말이 있고 6절에 보면 ‘의인의 길’이라는 말이 또 있습니다.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 인정을 받는 길이지만 악인들의 길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죄인들의 길’, ‘의인들의 길’ 그리고 ‘악인들의 길’ 이 있는데 죄인이나 악인이나 결국 표현을 달리한 것이지 대개 같은 종류의 사람들인데 그들의 길이 있으면 그 반대로 의인들의 길이 있어서 의인들의 길은 인정하시지만 죄인들의 길은 저희들 생각에는 그 길이 바르다고 생각 하지만 결국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14 12절에 보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다.” 잠언에 이 말씀이 두 번 나오는데 또 한번은 16 25절에 있습니다. 그렇게 죄인들은 자기의 길을 정해놓고 혹은 자기의 길을 자기의 생각하는 최선을 다해서 걸어간다고 하지만 죄인들의 길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인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일을 하고 살아가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삶의 역사는 하나의 긴 길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각각 어떤 역사를 지어가면서 자꾸 미지의 앞을 향해서 전진하는데 이미 지나간 시간은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이 되는 것이며, 그 사람이 걸어온 길로써 짐작해서 앞으로 어디로 가겠다 하는 것도 생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가는 길은 여러 가지로 아주 다양한 길이 있지만 이 시편에서 생각하는 길은 둘 중의 하나 뿐인 것입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인정해주시는 길로서 의인의 길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정하시지 않는 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죄인의 길, 악인의 길로 표시된 길입니다. 사람은 두 길 중에 하나에 지금 이 순간에 서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큰 두개의 보편의 길을 말씀하실 때에 마태복음 7 13 14절에서 거기에 두개의 문이 있고 그 문에 연속해서 앞으로 나가는 두개의 길이 있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3절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다음에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여기 보면 문이 하나 있는데, 그 문은 결국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지만 그 큰문으로 들어가면 넓은 길이 있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고 따라서 크고 넓은 그 길을 걷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처음에 우리에게 명령을 하시면서 그 다음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는데 그 문은 좁고 따라서 역시 이와같이 길이 있는데 그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는 것입니다. 찾는 사람이 적으니까 너희는 그것을 알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협착한 길로 가도록 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둘 중에 하나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생명, 살지 아니했으면 죽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이면 생명으로 가는 길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이고, 멸망이면 멸망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 그리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저 길이 과연 멸망으로 가는 길인가 아니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걷는 길인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의 걸어가는 길을 보면 이것이 넓은 길도 아니고 좁은 길도 아닌 것 같은 그런 길,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같은 경우가 또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 자기 생각에는 이것이 바른 길이다라고 생각하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런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자기 생각에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길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든지 자기의 이상에 도달하는 길이라든지 사람답게 고귀한 생각을 했으면 그 생각에 의해서 바른 자리에 도달케 하는 길이 이것이다 하고 사람들은 생각을 하지만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지만 필경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오직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길로 자꾸 가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길은 당연히 죄인의 길인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자기가 자기 길을 가는 것은 아담이 인류를 대표해서 맨 처음에 지은 죄의 성격인 것입니다. 그런 죄의 오염 가운데서 오늘날 자기도 자기의 선조 그 아담의 죄의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인생의 길을 선택하고 걸어가는 것인데 이런 것은 단연코 멸망의 길인 것입니다. 죄인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는 까닭에 그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의로운 것과 좋은 것을 구하고 그리고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한 양심,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과 방불케 만들어 졌던 본래의 착한 심정, 의로운 것 그러한 선, 그 사람의 본성이 그렇게 착한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큰 각성을 가지고 인류와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위해서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고 봉사를 해야겠다 해서 국가를 위해서 그렇게 하면 훌륭한 애국자이고 또 사회를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그렇게 하면 훌륭한 인도주의자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으면, 있는 만큼 세상은 살기가 좋은 곳이 됩니다. 나라를 사랑한다든지 또한 사회를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인간이라는 것을 존중히 여겨서 살아가는 그런 생활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선과 아름다운 것을 나타내는 그러한 불신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선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불신자에게는 그것이 최고인 것입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인도애, 인류애 가운데서 인류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 봉사하고 자기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라도 인류를 봉사해나가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 우러러 볼만한 일이고 존경할 만한 일이고 하나님께서 불신자를 다루실 때, 불신이라는 사실이 거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들의 의와 선과 미와 행동에 대해서 그만큼 일반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지 베푸시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 COMMON GRACE, 보통은혜라는 것 이것이 아니면 또 성신의 일반적인 역사, 이런 것이 없으면 사실상 사회가 바로 유지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착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지만 이 세상이 악해서 그 사람을 그냥 착한 그 마음대로 살수 없게 자꾸 주위의 악한 조건들이 그를 지배하게 되면 그 착한 마음을 발휘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정직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그 사회 전체가 항상 부패와 타락과 불공평과 불의가 여기저기 자꾸 드러나면 자기도 다른 사람과 같이 자기를 유지하고 살려면 다른 사람처럼 불의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세상이 다 그렇게 돌아가는데 어떻게 나 혼자만 깨끗하게 살 수 있겠는가 해서 요령을 부리지 아니할 수가 없고 의롭고 정직하게 살려면 도저히 생활자체를 유지를 할 수 없게 어떻게 아무 것도 움직일 수 없게 그렇게 사회 전체가 부패와 불의와 불공평이라는 것이 강렬하게 지배할 때 그 사람은 의롭고 착하고 공정한 사람으로서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가 그런 사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아주 날고 뛰는 것 같이 야단을 내지 않고는 살수가 없는 정직하게 순진하게 일반적인 공정이라는 것이 지배하는 것으로 믿고 나가려고 하면 살수가 없는 그런 사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가 있는가 하면 또한 비교적 사람에게 공정하게 대하고 또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비교적 정직이라는 것이 잘 지켜지는 사회가 있는 것입니다. 서구 사회가 잘 발달을 해 나갈 때 그 사회상을 보면은 차츰 차츰 사람들은 계몽주의 정신으로 사람이 다 같은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는 평등한 위치에서 같이 교제도 하고 교통도 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사회는 발달했던 것입니다. 민주주의라는 한 사회 전체로 흐르는 한 사상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사람과 사람끼리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 서로를 존중하고 상호를 정직하게 그리고 정의가 그 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게 피차 노력하는 그런 정신을 기본으로 하고서 발전해 나갔던 것입니다. 무조건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사회에서 살 때 사람은 의롭고 공정하게 살수도 있고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자기를 맡기고 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역사 가운데는 때때로 그런 의로운 사람들이 있는 것을 잘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런 길을 걷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것이 최선의 최고의 길이지만 그리고 많은 신자들은 거기에도 도달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보지만 남을 위해서 봉사하겠다는 그런 정신조차 아주 없는 자기만 어떻게든지 복을 받되 사람을 이용할 뿐 아니라 이번에는 하늘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복을 받았으면 하고 그래서 종교를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자기 종교로 열심히 거기에 도취하기까지 하지만 일단 사회적인 활동이나 한 시민으로서 의식을 보면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한 연대 책임감이라든지 혹은 봉사의 의식이라는 것이 도무지 결핍되어 있고 거짓말이라도 하고 속여서라도 혹은 그렇지 않으면 뇌물이라도 주어 가면서 자기만의 행복을 어떻게 하든지 얻어 보겠다는 이런 경우를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신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지금 말한 그런 악이 아닐 뿐 아니라 인도주의자의 고귀한 인도적인 정신의 발휘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표준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높은 표준을 세워놓고 이것해라 하고 요구하신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새사람으로 새로 지으신 까닭에 새로 창조된 사람과 같은 덕성을 발휘하고 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항상 옛 사람적인 그런 의와 선을 발휘하고 살아라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은 세상에 있는 인간적인 의와 선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의와 선은 그 자체가 항상 결핍이 있고 이지러져서 그것으로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대표할 수 없고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너희들은 새로 지어서 새로운 창조물로 땅에 두어서 중생과 신생의 새로운 생명이 너희 속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발휘되었을 때 너희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지체로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발휘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자기의 의무를 행하고 각각 개인에게 준 특별한 은사에 의해서 특별한 사명을 행하는 책임을 잘 이행함으로 땅위에서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 거룩한 통치의 사실이 어떠한 것인가를 세상 앞에 증시를 하고, 증시하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결국 이 세상에 최종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어야 할 큰 사실인 것을 미리 예표하고 나타내라 하는 그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가지신 큰 경륜으로 궁극적으로는 다 그것이 완성하는 위치로 올라 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충만한 영광, 완성된 하나님 나라 자태의 충만한 그것을 이 땅에 있을 때 벌써 시작을 하고 나타내고 살아라. 그렇게 하기 위해서 너희에게는 성신님이 내주 하시고, 모든 은혜를 필요한 때 필요한 대로 늘 내려 주셔서 땅위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하나님이 다스리는 백성이라는 것,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것, 하나님 나라의 그 영광을 입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류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어오게 하시려고 하는가를, 복음사실을 증거하고 살아라 하신 것입니다. 성신님이 너희에게 임하여 권능을 얻으면 너희가 내 증인이 된다 하신 말씀대로 증거를 하고 살아라 그 말입니다.

이렇게 큰 은혜 독특한 아주 하늘에 속한 여러 가지 은혜와 은사를 주셨고 그런 생명의 약동을 우리에게 주신 까닭에 누가복음 12 48절 말씀대로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다. 너희는 많이 받고 많이 맡았으니까 내가 많이 달라고 하고 그리고 많이 찾을 것이다. 너희에게 요구하는 덕성이란 타락한 인간의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이 부패하고 타락한 인류의 심정 그러나 이지러진 하나님의 형상일지라도 그것을 희미하게 나마라도 유지해서 인류의 인도적인 정신과 인류에 대한 봉사와 나라나 사회를 사랑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대해서 복지를 도모하는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사는 그것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 이상이 없으니까 불신자에게는 불신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것을 용인하시고, 거기에 일반 은혜를 더 베풀어주시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살수 있게 하시고 살 수 있는 그 사회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어서 그 하나님의 백성이 유지하고 살도록 조장을 해 주시며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 안에 건전하게 건설된 사실이 자꾸 증명되는 것을 돕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역사의 의미이며, 이를 다스리는 권능의 왕이 그 권능을 가지고 이 땅위의 사람들이 그래도 일반은혜 가운데 살도록 자꾸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정부도 의로워야 하고 언론도 의로워야 하고 사람들의 교제도 의로워야 하고 그 의로운 법 아래서 법을 무서워하고 살도록 하나님께서 권능의 왕으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잘 나타내는 정부는 그 만큼 더 훌륭해지는 것이고 그런 것들을 잘 나타내는 언론이라는 것은 그 만큼 더 훌륭한 것이고, 그런 것을 바르게 자꾸 전달하면 그런 여러 가지 전달은 그 만큼 복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사회에서 그 사람들과 함께 일반적인 공리와 대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독특하게 경영하시는 그 은혜의 왕국에 은혜의 사실과 영광의 사실을 이 땅 위에다가 자꾸 증거해서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그리스께서 오심으로서 영광의 충만한 위치에 올라 그때 완성할 것으로 하고 그 완성을 위한 그 큰 일을 우리에게 맡기시고 지금 전진을 해 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계관 가운데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나타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영광과 의의 내용들인 까닭에 결코 세상의 인류애나 인도애 정도로서 그것이 증시되지 아니 하므로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높은 도덕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원칙대로 신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의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신의 열매, 빛의 열매를 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타내는 의라는 것은 옛사람의 의가 아니라 새사람의 열매를 나타내라는 것이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성신의 힘 주심과 또 그 인도하시는 의인의 길이라는 길을 걸어가기를 바라시는 것이고, 이 의인의 길과 죄인의 길을 왔다 갔다 하면서 방황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들에는 다양의 길들이 있지만 크게 나누면 첫째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자행자지하고 자기 마음대로 가는 사람의 길이 있고,  둘째 불신자일지라도 사람의 최고의 의나 선을 추구해서 그것을 따르고자 고통과 희생과 괴로움도 개의치 않고 나가는 그런 훌륭한 이 세상 사람들의 길도 있으며, 셋째로는 세상의 정욕과 인간의 대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어느 때는 자기 욕심을 찾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때는 또 사람의 대도를 따라 가야지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바른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도 어느 때는 좀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좀 해 보겠다고 하다가 또한 그것이 얼마 못 가서 그것을 버리고 자기 욕심의 지배를 받아서 질질 끌려서 또 가기도 하고 요컨데 성신의 충만한 지배와 주장을 받지 못했을 때에 내가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좋은 것을 원하지만 내 속에 있는 다른 법을 보는데 그것은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7:21-23) 나를 잡아 가지고 내가 원치 않는 길로 끌고 가는 것이라고..... 이렇게 해서 이 길로 저 길로 방황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라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신자가 온전히 성신께 다 맡기고 성신의 충만한 역사로 그의 가르쳐주심과 손을 잡고 인도하시는 그 길을 걷지 않으면 의인의 길을 걸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신자들 중에는 의인의 길과 의인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방황하는 그렇게 넘나들면서 사는 그런 사람, 결국 그 인생의 길이 장기간에 의의 길 하나로 일관하지 못하고 가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한 신자가 경건히 살고자 하면서도 의인의 길을 걷다가 넘어지고 거기서 벗어나서 방황하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많이 다 이런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순간도 변함없이 성신님만을 의지하고 신령한 생활만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것입니다. 가령 성자라고 하더라도 베드로 같이,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아문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던 것처럼 그렇게 넘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잠시라도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가 의를 나타내 보이겠다고 하는 동안에는 심히 위험한 상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신자의 길도 일생동안 끊임없이 의인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고 정도를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일생의 방향과 그의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인의 길에서 현저하고, 그 사람의 생활의 길을 보면 한때는 넘어지기도 했지만 그의 생활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성격은 역시 의인의 길이라고 할만한 이런 생활이라는 것이 바람직한 생활이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 목표로 세울 것은 잠시라도 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바로 의인의 길만 걷기를 원할 것입니다. 잠시라도 성신을 의지하는 생활에서 떠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다 그렇지 못하고 성신을 의지하는 생활이 긴 사람도 있지만 얼마 못되어 가지고 다시 다른 길로 방황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우선 일생 생활의 행진의 자취를 바라볼 때에 성신을 의지하고 의인의 길을 걸은 그 시간이 가장 많아서 그것이 결국 그 사람의 일생의 생활의 길의 특성이 된다면 그를 의인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평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시편 1편에서 의인의 길이라고 할 때에 어떤 사람이 일생 변함없이 의인의 길만 걷는 사람만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이라고 한다 할지라도 항상 인간적인 연약이 있는 까닭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에 반드시 늘 도달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의인으로 확실히 이야기한 사람을 예로 들면 그 생애를 비교적 많이 알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알 수 없는 사람도 있는데 예를 들면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노아의 생활을 자세히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교적 생활의 기록이 좀더 나타나 있는 사람으로 의인으로 칭함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 6:9, 18:23)   

그러나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아브라함이 반드시 의인의 길의 그 대도에서만 걸어간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갈을 얻은 일을 볼 때는 그 당시의 도덕으로서는 크게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을 입어 보겠다고 하갈을 그것도 사라가 권고해서 얻었는데 그런 것이 그 당시의 사회상 도덕상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엄격하게 생각 할 때 그것이 결국 대도를 걷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인위적인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뤄 보겠다고 하는 것은 얼마만큼 사람이 어두움 가운데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부다처를 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뤄 보겠다 하나님의 뜻이 결국 일부다처에 의해서 나타내야겠다고 하는 그런식 해석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령 이삭을 드리는 가장 훌륭한 신앙적인 행동을 하는 시간일지라도, 이삭의 인권에 대한 고려가 없는 그 사상이라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공의, 대도를 걸어가는 그런 사상적인 행동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미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는 가상하게 신앙을 발휘했지만 그러나 그 신앙은 그의 가지고 있는 그 당시의 제한된 사상의 터 위에서 움직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리아 산에 이삭을 드리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사상상 큰 비약을 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국은 그를 이끌어서 당대의 사람들의 생각에서 훨씬 벗어나는 천국적인 사상을 터득 할 수 있게 하시지 아니했다면 아브라함이 스스로 거기 도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도라는 것은 항상 그런 고귀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이라는 것은 그 방향이 항상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방향이 하나님을 향해서 자기가 못났을 지라도, 힘이 없을지라도 혹은 절름발이 일지라도, 거기를 향해서 자꾸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의인의 길을 그 사람은 걷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생의 방향과 전진의 사실이 의인의 길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만한 현저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바람직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의 길, 세상의 길로 잠시 갔다 나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생활에서든지, 전체적으로 볼 때 결국 하나님을 향한 행진을 일생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갔구나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의 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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