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25, 2011

믿음에 대하여 (2)

바른 신앙과 헛된 신앙
야고보서 2:14-26

믿음이라는 말의 쓰임새
교회 안에서 많이 쓰는 ‘믿음’이라는 말이 참으로 나타내고 있는 뜻을 생각해 가는 중인데 먼저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할 것은 믿음이란 사람이 “예, 믿겠습니다한다거나 믿으려고 노력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실에 대하여 그 사실을 내가 “아 과연 그렇다하고 시인할 수 있는 것도 거기에 항상 객관적인 조건과 또 그렇게 수긍하지 아니할 수 없는 강한 선천적인 논리가 자연스럽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부인하려면 부인하고 시인하려면 시인하고 그렇게 안 되는 것입니다. 사실을 시인할 때에는 내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하지 아니할 수 없는 조건들 위에 서서 시인하게 되는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신앙은 자기가 믿어 보려고 노력하면 곧바로 생겨나고 자기가 부인하려고 노력하면 부인해 버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바른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이리는 말을 속되게 쓸 때 가지는 관념입니다. 좀 희미하고 확실한 지식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자기의 욕망이나 소원을 표시하기 위해서 믿음이라는 말을 씁니다. “예, 그것이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할 때에는 확실히 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희망적인 요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사용되는 ‘믿음’이란 말에 대하여 우리가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이 쓰일 때 똑같은 의미로만 쓰인 것은 아닙니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보면 구원을 확실히 드러내는 믿음 즉 ‘구원의 믿음’ (saving faith)이 있고, 다른 하나는 비록 그것이 종교적으로 아주 훌륭한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구원을 보장하지 못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구원의 징표로서의 믿음이 아닌 것도 믿음이라는 말로 부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21:21) 라든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11 :24) 고 할 때의 그 믿음은 반드시 구원을 받은 증거로서의 믿음은 아닙니다. 그것은 소위 기적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즉 기적을 행할 때 갖는 신앙 태도 혹은 기적을 수긍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이런 것들도 성경에는 믿음이란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구원의 믿음이라고 보증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보통 기도해서 병을 고친 사람은 믿음이 좋아서 하나님 앞에 가장 가까이  사는 사람처럼 생각하기 쉽겠지만, 어떤 종교적인 법칙하에서 그렇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구원이 그런 좀더 초월한 듯한 종교 행동이나 종교적인 심리 작용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거나 적어도 그런 것이 구원에 대단히 가까운 것같이 생각하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안 가르쳤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가르친 구원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내려주신 것이고 사람이 스스로 조작해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주실 때에도 믿음만 따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부활의 사실을 믿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새로운 생명이 그 안에 생겼을 때, 즉 성신님께서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으로 재창조하시는 일이 발생하면, 그에게 있는 이 새 생명은 새로운 마음의 상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생명에 가장 현저하고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믿는 마음이고 또한 이 믿음이 있는 곳에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그것을 실행해 나기는 순종의 행위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러한 재창조로 말미암은 구원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런데 말씀 가운데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라고 할 때 아무말이라도 몇가지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믿어야 할 사실들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핍되면 구원의 신앙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
유다서 1:3을 보면 사랑히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우리가 다 같이 받은 것,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나눈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편지를 하려고 하던 침에 ‘아 이것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는 어떤 강렬한 동기가 생겼는데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해서 너희가 힘써 싸워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표면상으로는 아무 박해도 없지만 내부적으로 이상한 종교 현상이 들어와서 참 신앙인체하고 차츰차츰 퍼져 나가는 것을 보면서 간곡한 편지를 쓸 필요를 더욱 느끼고 “아 안 되겠구나 성도에게 단번에 내리신 바 믿음의 도를 위해서 너희들은 일어나서 싸워야겠다하고 편지를 했습니다. 이것이 유다서를 보내는 목적입니다.

이렇게 믿음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것이지 자기가 믿어 보려고 노력을 해서 믿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 앉아 있는 이 집이 날아서 공중으로 올라갈 필요가 있다고 할 때 “날아서 공중으로 올라갑니다 올라갑니다. 나는 믿습니다 믿습니다하고 천번을 믿는다고 이야기해도 집이 날아서 공중으로 안 올라가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심리 여하에 따라서 일이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자기 혼자만의 문제라고 해도 “내 몸이 날아서 공중으로 올라가겠다. 올라가겠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한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믿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서 탄생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과 같이, 명백한 과학적인 현실을 부인하고 동정녀가 아들을 낳으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는 것은 사람의 보통 이론과 보통 정신으로는 결코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시는 믿음으로 비로소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문제입니다.

믿었다, 안 믿었다 하고 과연 그럴까 아닐까 한다면 그것은 안 믿는 것입니다. 믿음 쪽으로 기울어졌다 부인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하는 이것은 참믿음이 아닙니다. 참믿음이란 그것을 단번에 주시면 그것으로 요지부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때는 마음 가운데 회의가 있어 방황하고 괴로워하다가 어느 때는 조금 안심하고 안정하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색의 과정에서 인식이 얼마나 명료한가 또는 재료가 얼마나 풍부한가에 따라서 왔다갔다 하는 것뿐이지 믿음이 새로 생겨서 조금 믿다가 믿음이 금방 없어져서 안 믿다가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것과 같이 인간의 종교를 믿는 식으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철학적 사색이 믿음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믿음과 동시에 새로운 생명이 그 속에서 역사하여 생명으로서 기능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 생명은 하나님의 자식의 생명인 까닭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자식다운 격을 드러내게 된다. 마치 식물의 생명은 식물인 것을 나타내고, 동물의 생명은 동물인 것을 나타내고 사람의 생명은 사람다운 것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동물이나 식물의 생명과는 구별되는 영혼의 활동이 없다면 사람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식은 하나님의 자식디운 품격을 충분히 나타내는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자식다운 생명의 특권과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식다운 영혼의 활동 속에는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하고 의지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중생하게 하시면 그 속에 있는 영혼의 성향(disposition)은 항상 하나님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지 사람이 조작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가려고 하는 필연적이고 본능적인 행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를 중생이라고 하며, 이후로는 성선을 의지해서 구별된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활의 길을 걸어가는 성화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다운 마음 상태의 구체적인 표시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이므로 필연적으로 말씀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나에게 요구하고 명령하는 것을 따르게 됩니다. 물론 그것은 자기가 목표를 세우고 노력해 가는 도덕적인 노력과는 동질의 것이 아닙니다. 신자라고 할지라도 나태해서 정당하게 장성하지 못하거나, 성경을 밤낮 읽고 공부도 하지만 자기의 욕심에 집착해서 바른 믿음의 능력이 그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 상태가 되면, 순종의 생활은 희미해지는 것이고 결국 옛사람이 자기를 지배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사욕에 속한 신자의 상태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1 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대할 때 신령한 자를 대함과 같이 할 수 없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 곧 젖으로나 먹고 밥으로 먹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대함과 같이 대하노라”고 썼습니다.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 로서 자기의 욕심에 속해서 사는 자들이라고 평가한 것입니다.

역사적인 개혁교회가 강력하게 강조하는 것은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있다고 해서 처음부터 아주 위대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고 그 사람의 장성의 정도에 따라 차츰 차츰 열매를 드러내게 됩니다. 이런 의미로 개혁자들은 믿음이 처음에 들어왔을 때의 상태를 믿음의 씨” (semen fidei)가 그 속에 떨어져서 싹이 나오기 시작한다는 말로 표현했습니다. 결국 믿음이 들어가면 자연스럽게 열매를 자꾸 맺어 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종교적인 노력 여하에 따라 불신앙과 신앙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신앙이라는 위치에 올라가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것은 일반 종교에 있는 현상이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계시와 거룩한 도리에 의한 참된 신앙은 아닙니다. 만약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에서 이러한 현상이 발생했다면 사이비적인 것이며, 한마디로 불신앙의 한 증상인 것입니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말씀과 더불어” (cum verbo)라는 말을 사용해서 성신님께서 함께 일하시는 가운데서만 말씀은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확실히 실증한다고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어떤 사람의 속에는 성신님께서 함께 일하시는 것이 없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씀은 그것 자체가 신통력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개혁교회의 강렬한 주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아무말이나 들어가도 금방 무슨 희한한 작용을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말씀은 마치 양쪽날이 선 칼과 같이서 어떤 사람에게 들어가더라도 효과를 드러낸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믿지 않았을 때에는 무서운 심판의 조건이 됩니다. 사망에 이르는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향기가 되는 것이고 생명에 이르는 사람에게는 생명에서 다시 생명으로 이르게 하는 향기가 되는 것입니다(고후 2: 16).

믿음과 행함
말씀을 믿고 일어난 마음의 상태가 성신님의 역사로 발생한 바른 신앙의 상태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요구나 명령이나 보이신 것에 대하여 간절히 사모하고 갈구하면서 나가게 됩니다. 명확한 명령의 형식으로 오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각성 정도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냥 비추기만 하는 것도 강한 요구로 올 수가 있습니다. 소견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말을 할 때에 꼭 요구나 명령의 형식을 취하지 않고 자기 이야기같이 지나가는 말로 할지라도 민감하게 그 의중을 짐작하고 그 마음 가운데 무엇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생각이나 말에 주의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주의하지 않는 사람은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 그대로만 생각하지만 주의하는 사람은 그 뒤에 있는 마음의 요구, 나에게 비추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것입니다. 이런 것을 간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에도 담담하게 지나가는 것과 같은 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간취해서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라고 느낄 수 있는 성숙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 어디를 보든지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사, 하나님이 나에게 알기를 원하시는 것, 따라서 내가 해야 할 것, 즉 당위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장성한 신자의 자태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명확한 성경의 명령과 요구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성경에 쓰여진 약속을 강력하게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참신앙이 명확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지 말라하는 것이 있고 ‘이렇게 하는 것이 내가 기뻐하는 것이다하는 하나님의 요구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라고 하신 것을 생략하는 죄(omission)를 범하거나 하지 말라하신 것을 범하는 죄 (commission)에 대해서 주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행함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런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야고보서는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이 들어가면 하나의 심상이 형성되고, 그 심상에 의해서 마땅히 해야할 당위를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신성한 명령으로 자기에게 나팔 소리보다 크게 울릴 수가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해라하는 간단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이 울려오면 “예, 제가 순종치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활과 그 심상이 일치하는 것이고 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의 행동은 무의식중의 행동이나 깜깜한 밤중에 끌려서 걸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분명히 알고, 해야 할 당위를 느끼고, 신성한 의무감 가운데서 밀고 나가는 것입니다. 성신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할 수 있도록 힘 주시고 같이 거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분명하게 성신의 인도를 받는다는 생생한 현실의 경험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열매입니다 “이런 믿음의 열매 없이 믿음이란 말만 하면 그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라고 야고보서는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영혼이 없는 육신이 시체인 것처럼 행위 없는 믿음이라는 것은 죽은 것이라는 참 중요한 도리를 가르친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말을 오해하는 소위 관념론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의를 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
거라사에서 귀신 들린 자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앞에 엎드려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내가 당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내 때가 아직 이르기 전에 우리를 멸하려고 오셨습니까?” (누가복음 8:26) 하고 말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도 모르고 있었고 혹은 잘 알려고 하지 않거나 부인하던 예수님을 귀신은 지극히 높이 계시사 천지의 주재로 계시는 분의 아들로 아주 생생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로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 2:19) 해서 그렇게 믿는 믿음이 구원받는 믿음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면 구원받는 믿음을 가진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가까이에 있던 제자들도 잘 몰랐던 사실을 이 귀신은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시실이 귀신을 구원할 아무 조건도 안 되었습니다.

교회가 바로 서는 것은 많은 것을 아는 것으로만이 아니고 참으로 믿었다는 것과 믿는 생활에서 열매를 거두는 것이 더 중요한 증거가 됩니다. 교회가 사람 많은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거나 믿는다는 종교 관념과 종교 의식 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종교 감정을 신앙의 중요한 기준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무엇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생활의 열매가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열매라고 할 때에 무슨 큰 사업을 하여 좋은 성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이 새로운 사람답게 나타나는 것이 우선의 과제입니다. 그 사람의 도덕적인 성격 즉 품성이 그리스도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위대한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가서 무슨 큰일을 하지 않고 화려하고 기이한 일을 하지 않을지라도 그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중요한 열매를 맺게 되는 그릇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와 동시에 거룩한 교회아로서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아라는 말은 자기를 생각할 때 철저히 하나의 개인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나는 교회의 한 지체이며, 그 부분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의 의미가 곧 그리스도의 지체의 한 분이라는 인간관을 가지고 교회의 한 지체로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나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어떠한 양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정당한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 니라에 대한 나의 책임, 단순한 의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구체적으로 그 나라의 성격을 명확하게 하고 역사 위에 획증하기 위해서 필요한 책임이 있는데 그것은 그 나라의 법칙과 성격을 바로 지키고 보존해서 정당하게 살아야 할 책임인 것입니다. 이런 책임를 깨달아야 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인격의 문제만이 아니라 인생의 길을 걸어 나가는 데서 맺어야 할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열매를 맺지 아니하고 기독교를 이 세상의 다른 문화의 내용이나 종교의 하나로 생각해서 다른 종교에서 하듯이 성경을 연구해서 소위 전문가 노릇을 하고 종교의 지도자로 서려고 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증거할 만한 믿음의 내용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분명히 그 사람 속에서 역사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것이 주님이 가르치신 큰 도리입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신앙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야의 기적에 의해서 자기네가 원하는 하나님의 나라 초래되고 메시아의 복지 국가가 설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것이 늘 메시야 자체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셔서 자신이 과연 메시야인 것을 제지들에게 가르치시되 눈앞에 당장 그 위대한 이상 세계를 현실로 건설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말씀이 너희 속에 들어가서 그 말씀에 대한 반응이 정당하면 열매를 맺어 천국이 입증되겠지만 종교적인 현상만 현저하고 결국 열매가 없을 때는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하는 것을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길가, 돌밭,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상태가 분명한 종교 현상으로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이 전달되었지만 그 마음자리는 길가와 같고 돌밭과 같고 가시떨기 같아서 결국은 열매를 못 맺고 마는 것인데 열매를 맺지 못하는 땅은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옥토리야만 합니다. 그뿐 아니라 마귀는 적극적으로 사이비적인 것을 심어 놓았습니다. 이것을 가라지 비유에서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원수가 와서 악한 자의 자식들을 그 속에 함께 뿌려 놓아서 같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그런즉 당장에 가라지를 뽑으면 알곡이 상할 수 있으니 아직 뽑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마지막 추수하기 직전에 기라지만 먼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사르고 알곡은 거두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알곡을 거둘 때까지 무서운 사이비의 현실이 터전을 함께하고 생활의 근거를 같이하여 우리가 흡수하는 여러가지 것들을 공동으로 흡수해 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바로 받지 못해서 열매를 못 맺을 경우 심하면 가라지 노릇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구원과 상관이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유다서도 구원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고, 야고보서도 분명히 구원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믿음이 능력으로 실증되어 자기의 생활 행동에서 하나님의 법을 순종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요구를 깨닫고 거기에 순종하여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러한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는가?” 하고 구원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 했습니다. “믿음이라고 하면 덮어놓고 구원인 줄 알지 말아라. 그런 관념론적인 신앙이라는 것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관련되는 신앙을 허술하게 그냥 관념, 이론, 신학으로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깊이를 깨닫는 것이 참지식입니다. 책을 보고 암기하는 일은 안 믿는 사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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