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December 25, 2011

시편 1 편 (1)


시편 1편은 세상 사람들 누구나 다 같이 추구하는 행복론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셔서 불행하도록 처음부터 만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하고 자기 뜻대로 나가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길이 있는데, 그 길로 순종하지 않고 자기 생명과 자기 장래를 자기 마음대로 결정한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것이 최초의 인류의 죄악이고, 언약의 머리로서의 아담의 죄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죄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본래의 본의와 인류 전체의 운명에 관계되는 길인 까닭에 그 길을 범한 것은 인류 전체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들어가게 되었고 그 상태야 말로 참 복을 잃어버린 불행의 상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이 보이신 거룩한 길은 그렇게 되라고 한 것이 아니고, 좀 더 높은 데로 올라가서 하나님이 정하신 그 거룩하고 아름다운 세계에 도달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참된 의미의 행복을 가질 수 있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행복에 관해서 복 있는 사람 혹은 행복스러운 사람을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는 교리도 있고 예언도 있고 기도도 있고 찬송도 있는데, 전 시편이 가지고 있는 기조로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본의에 부합하는, 본의에 더욱 가까이 이르는 사람의 상태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아주 큰 제목을 시편1편에서 시로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이 있다는 말은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이란 말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이 세상의 복의 개념, 즉 옛날 헬라시대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것이나 근대에 와서 특별히 유럽 사상계에서 말하는 공리주의의 내용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하면 그런 것을 얻을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참된 행복의 내용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긴말로 설명하는 대신에 하나의 수사 양식인 명유를 사용했습니다. 무엇 무엇과 같다고 했습니다. 행복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은 “악한자의 의논대로 행치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해서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을 하는 자.” 라고 표현해서 이러한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복이 있다는 상태를 또한 비유를 사용해서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도 마르지 아니함과 같다” 하고 설명을 하고 그리고 결론으로 무릇 그의 행사는 다 형통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악한 사람에 대한 설명은 길게 하지 않고 4절에 그 역시 또 하나의 Simile를 사용해서 설명을 대신했습니다.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고 말하고 그 다음에는 그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아서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그 심판에서 감히 견딜 수가 없고 또 의인의 회중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악한 사람은 복 있는 사람과 대조해서 결론적으로 복 있는 사람이 걷는 길은 여호와께서 “오냐 내가 인정한다. 받아준다.” 하지만 악한 사람이 걷는 길은 저들이 아무리 많은 이론을 말하고 훌륭한 듯해도 그 결국은 멸망이다. 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이 시의 한 가운데 3 4절에 두개의 명유를 사용했습니다. 이 시의 구성을 보면 처음에 복 있는 사람에 대한 비유와 악한 사람에 대해서도 Simile에서 시작을 한다. 처음 시작할 때와 같은 양식으로 시작을 해서 그 Simile로서 설명한 내용에 결론은 심판을 못 견디고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고 그리고 그 길은 망한다고  직설로서 설명을 했습니다. 시에 대우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내용의 리듬이라는 것이 이런 대우법에 의해서 표시된 까닭에 악하고 선하고 혹은 복 있고 또 죄인, 이런 것을 대조를 해 놓고 그것을 산 같이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대우법이라는 것은 아주 특별히 구약 시편에, 히브리 시에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보통 세계의 명시라든지 그 다른 언어로 쓰인 외국 시를 다른 나라의 말로 번역을 해놓으면 그 리듬도 많이 잊어버리고 거기에 음악성을 잊어버리고 그 말뜻만이 대체로 살아서 움직이는데 결국 시적인 미의 많은 부분을 다 상실하고 마는데, 이 히브리 시는 그렇지 않고 그 시적인 리듬을 많이 잊어버리지 않는 까닭은 이런 독특한 방식을 사용해서 표시한 까닭에 그런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에 대한 설명을 생각할 때 두개의 명유에다가 초점을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도 마르지 아니함과 같으니 무릇 행사가 다 형통할 것이다 하는 이 말의 뜻을 우리가 생각하려면 그 말이 있기 전에 먼저 복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복이 있는가 할 때 “악인의 의논대로 행치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해서 하나님께서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하는 것들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위 작위와 부작위, 하는 것과 않는 것, 둘을 이렇게 대조해 놓았는데 첫째는 마땅히 해서는 안 될 것을 하지 않는다는 세 가지가 있고, 둘째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이 두 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서 특별히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을 한다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행복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 악한 자의 의논대로 행치 않는다.”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에 “의논”이라는 말은 '엣사' 라는 히브리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 단어의 뜻은 의견이라는 말도 되고 혹은 그의 이론도 되고 그의 사상이라는 의미도 되는데 악한자가 무슨 사상을 베풀면 그것을 읽고 거기에 심취해서 그로 말미암아 받은 영향으로, 그 결과로서 그 사람의 의견을 지배하고 의사를 지배하고 결정을 지배하는 그런 일이 복 있는 사람에게는 해당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되지 아니하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말이 간단한 말 같아도 거기 중요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있으면 무엇을 판단하고 비판할 때는 가지고 있는 사상을 기준 삼아서 하는 것입니다. 가령 문제가 사회상 문제면 어떤 사회관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그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류 역사에 대한 것이면 어떤 역사관을 가졌는가에 따라서 그것을 비판하고 그것을 평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악한자의 의논”이라는 이 말에 표시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떠한 사상을 가지고, 어떤 가치관, 즉 어떤 사고방식(way of thinking)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생각 없이 사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사물을 보고서 사람인 까닭에 자기 이성의 판단에 의해서 단순히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고만 하지 않고 그 가치가 좋다든지 나쁘다든지 훌륭하다든지 못하다든지, 그런 가치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 일지라도 그런 가치관을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어린아이일 경우 그것이 풍부하지 못해서 편파적이기 쉬운 것입니다. 그렇게 어떤 영향 가운데서 그것을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것을 악한자의 의논이란 말로 표시한 그 악한 자의 '엣사', 의해서 형성한 사상을 기준 삼아서 사물을 판단하는 생활을 만일 안 해야 한다면 아무 것도 없는 공백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치 판단은 공백 상태를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아무런 가치판단을 가지지 않았다는 말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동물에게는 어떤 가치판단, 즉 가치관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무엇인가 그러한 악한자가 불어 넣어주는 그 사상의 경향이나 논리나 또 그 내용이나 그런 것을 대치할 다른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악한자의 가치가 들어오더라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하고 배제해 버릴 다른 사상이 나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악한자의 생각을 따라가지 않으려면 그것과는 다른 생각이 들어와서 그에게 사상을 형성할 뿐 아니라 확신으로 그를 지배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확신이 없으면 강렬한 다른 사상이 들어오면 그것으로 지배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에 표현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않다는 말을 단순하게 나쁜 동무가 있어서 꾀를 가지고 이것하자 저것하자 하면 그런 꾀를 따라가면 안 된다 하는 어린아이들 소꿉장난 같은 이야기로 이해한다면 이 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큰 계시의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론이나 또 구체적인 어떤 방안이나 이런 것이 어떤 근거 하에서 나왔는데 그 근거자체에 대한 것을 부인할만한 자기의 것, 강렬한 것이 그 속에 있는 까닭에 그래서 그것을 쫓아가지 않는 것입니다. 다음에 오는 조건들도 차례차례 보면 이 사람이 단순히 유치한 초보적인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이제 막 새사람 되어서 걸음마하고 걸어가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특별히 받는 영향이란 것은 반드시 어떤 특별한 사람에 의해서만  받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서는 Mass Media를 통해서 수 없이 많은 의견과 사상에 접촉하게 되는 것이고, 또 교육을 받으면 받은 만큼 많은 책을 읽으면서 그로 말미암아서 사람이 생각이 이렇게도 저렇게도 어떤 성향을 가지게 되는 것인데, 그러한데서 무릇 악한자의 의견이라고 하는 말로 표시한 어떤 비신국적, 반신국적 사상이나 주장이나 이론이나 그런 것을 확고히 배제해 버리고 그것 아닌 다른 것, 즉 하나님 나라의 사상으로서 생각을 한다는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복 있는 사람으로서 규정할 만한 조건들을 보면 세 가지 않는다는 것과 두 가지 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해야 할 것들을 한다는 것을 표시했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무엇으로 자기의 사상을 형성해 가는가? 할 때 그가 기뻐하는 것은 철학서류가 아니고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유명한 사상가의 사상을 보기를 좋아한다는 것도 아니고 혹은 세상에서 굉장히 큰 영향을 끼친 위대한 작가라든지 혹은 사상가라든지 이러한 사람들의 글을 보고 거기에 심취해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고, 그가 마음 가운데 심취해서 즐거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입니다.

주야로 묵상을 한다는 것은 오다가다 들은 교조나 몇 마디 말씀을 가지고 그것으로 전부를 삼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야로 묵상하려면 주야로 묵상할 만한 그 내용이 있는 까닭에 그렇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발견했으니까 주야로 묵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몇 가지의 교조만을 가지고서 그것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주야로 같은 말을 반복하고 반복해서 일부러 자기의 그 종교적인 수행의 태도로서 그렇게 하기 전에는 사실상 그 교조 몇 가지만 가지고는 풍성한 것을 만들어낼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율법 자체는 거기에 많은 보고가 그 속에 있어서 심오한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주셨을 때는 이 율법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결국 터득하게 하는 세계관이 하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행한다는 것은 기계적으로 어떤 조목 하나만 이 세상에서 하나씩 행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율법 전체가 구상하고 있는 어떤 한 세계를 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런 것이 그 법이다 하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만일 세심하게 잘 주의해서 자꾸 생각해보면 결국은 어떤 세계에 도달해서 그 세계의 생활과 그 세계에 호흡을 하지 않고서 율법의 참 정신이라는 것을 그대로 나타낼 수도 없고 그대로 잘 터득 할 수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 할 때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이 사람은 벌써 그 율법에서 주야로 묵상할만한 풍요한 내용, 사상, 세계관, 이런 것을 발견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그것이 한 원칙으로만 끝내지 않고 방법을 거기서 가르친 것입니다. 율법은 그것이 실천할 수 있는 실정법인 까닭에 아니 실정법으로서 의미를 또 가지는 까닭에 이 실정법으로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 하면 왜 그래야 하는가? 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 까지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는 이렇게 심오하고 깊은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있는 까닭에 그것으로서 세상에서 들어오는 그릇된 사상적인 습격, 공격이라는 것을 잘 막아내는 것입니다. 막아만 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이렇게 보고 이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앉아있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렇게 요구하고 이렇게 하라고 한다하는 답변이 명백하게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한 그의 연구와 또 이미 연구해서 터득한 내용에 대한 그의 확신이 확실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수많은 반신국적 사상에 흔들리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으로 세계관이든지 사관을 형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보셨고 우리에게는 어떤 세계를 사모하라고 했는가? 하나님께서 인류라는 것을 어떻게 보셨고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는가? 인류 전체의 역사적인 의미라는 것은 어떤 것이며 거기에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경영하셨는가? 이런 것들을 알아야 이런 것들에 대한 그 악한자의 의논이라는 것들을 따라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어서 하나님이 나타내신 계시이외에서 작용하는, 사람들이 생각으로서 만들어낸 의견이나 사상이나 철학이나 주장이, 그것이 결국은 궁극적으로 볼 때에 악한자의 의논이 되는 것입니다. 취하지 못할 자의 의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형성해 나가야 그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시절을 쫓아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열매가 저절로 맺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시절을 쫓아, 어떤 시절이었든지 각각 그 시절에 적응하게 맺는 것입니다. 괴로울 때도 혹은 기쁠 때도 평안할 때도 슬픈 때도 그 때에 적응하게 어떤 열매가, 그런 모든 것이 밑거름이 되어서 어떤 열매가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열매가 나오기 위해서 그냥 간단하게 저절로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아니하고 특별히 하나님나라의 그 심오하고 참으로 행복스러운 사람의 위치에서의 일을 하려면 먼저 첫째 악한자의 의논대로 행치 않는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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