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26, 2011

시편 1 편 (4)


시편1편에 현저하게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중에 길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악한자의 길 혹은 죄인의 길이 있고, 거기에 대조해서 의인의 길이 있는 것을 6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은 인정하시나 악한자의 길은 망하리로다” 또 1절 말씀에도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길이라는 것이 중요하게 시에서 나타나는데, 물론 시이기 때문에 거기에 자세한 논문을 쓸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길이란 무엇이다 하고 자세히 설명하는 것도 없고 , 악한자의 그 의논이라는 것은 무엇이다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도 없고 오만한자의 자리라 하는 것도 설명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로 알 것을 기대하면서 그리고 바로 알아야 이 시가 노래하는 정신과 참 의미를 우리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그 중에 한 가지씩 계속해서 생각해 가고 있는데 악한자의 의논이라는 말에서 사상이라든지 여러 가지 것을 살펴 보았고 지금은 죄인의 길이라는 말을 지금 생각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길에 대해서 자세하게, 악인의 길은 어떠하고 의인의 길은 어떠하다 하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한 일은 없으나,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의인은 어떤 길을 걷기는 걷는데, 그 걷는 그 상태를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도 마르지 아니한 것과 같다 하는 Simile를 가지고 설명을 했습니다. 결국 의로운 자의 걷는 길을, 혹은 걸으면서 나타나는 그의 능력 있는, 생명 있는 상태를 비유로서 나타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그 율법을 묵상하는 것, 이것은 그의 한 특성인데, 악한자의 의논을 오히려 버리고, 그것을 취할 것이 아니라고 버리고, 도무지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그리고 의인의 길을 택해서 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 가운데 어떤 것이 의인의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지식과 지혜가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과 그러한 큰 도리를, 즉 악한자의 길을 악한자의 길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악인의 의논이다 라고 판단 할 수 있는 것, 이런 판단에 필요한 표준들을 자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터득해 나간 것입니다. 소위 Criteria라는 것 이것이 물론 하나님의 법을 묵상하고 즐거워하는데서 터득한 것입니다. 그냥 율법을 좋고 재미있다고 보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보았으면 본만큼 자기가 좀더 판단하고 바른 것을 선택하는 태도에 있어서 훨씬 바르고 명철해야 할 것인데, 이런 명철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보고 묵상하고 연구 한데서 얻어서 그것이 실행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편 119 101절에는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니” 라는 말씀이 있는데 악한 길로 가지 않으려면 악한길이 어떤 길인가 하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주의 법도를 지킴으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나이다.” 노인보다도 더 자기가 명철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왜 이런 명철이 있는가 여기 보면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함으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도 승하다” 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지식을 넓히고 하는 그런 사람들보다도 이제는 참으로 무엇이 바른 길이고 악한 길이 아닌가 무엇이 의인 길이고 악한 자의 길이 아닌가, 무엇이 그릇된 의논인가 무엇이 잘못된 자리인가? 이런 것을 다 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 필요한 Criteria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의 길”이라는 말도 여기에 나오는데 101절에 보면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 하였사오며” 세상에는 어떤 길을 이야기 할 때 그것을 악한 길이라 혹은 의로운 길이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 할 수 있지만 지금 이 시에서 특별히 말하는 것은 길 자체가 악이라든지 혹은 의라든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악인이 걸어가는 길, 악인이 그 악을 인하여 죄인이 자기 죄악 가운데 그냥 회개 없이 살면서 걸어가는 길, 이래서 이것을 죄인의 길 또는 악인의 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악의 길이라든지 의의 길이라든지 그 길 자체에 무슨 도덕적 성격이 있는 것 같은 용어를 쓰지 않고 죄인이 회개 없이 가고 악인이 악에서 돌이킴이 없이 그냥 걷고 있는 그런 길을 지칭해서 악인의 길이라 죄인의 길이라 그렇게 말을 하고, 의인이 그 의라는 것을 증시하는 생활 행보를 가리켜서 의인의 길이라고 이렇게 말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악인의 길이라는 것이 의인의 길과 확실히 달라서 저 길은 악하구나 이 길은 선하구나 이렇게만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의 길을 대체로 다 최선의 길로 여기고 걸어가는데 그 중에는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이라는 것이 아주 대단히 비슷해서 그것만 따로 놓고 거기 악인도 안 서있고 의인도 안 서 있다면 그것을 특별히 악의 길이라든지 의의 길이라고 이렇게 말하기 어려운 것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그 생각에 의해서 걸어가고 있는 그 인생의 생활 행진을 우리가 주의해서 볼 때 그것은 계속해서 어떤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인생의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떠한 철학과 인생관 하에서 생의 길을 안 걸어갈 수 없이 세월이라는 것이 하나의 길과 같이 그 길 위에서 사람이 자꾸 가는 것과 같이 세월의 길을 누구나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그 사람이 싫든지 좋든지 그 사람 자신의 역사라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경력이나 역사라고 하는 것을 볼 때에 거기에 어떠한 성격이 뚜렷이 드러나는데 그것이 악인의 길을 걷는 것인가 의인의 길을 걷는 것인가 하는 것을 판단하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매우 유사한 점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사하더라도 시인은 노래를 할 때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의인으로 인정함을 받아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그 하나님의 크신 은혜 속에서 항상 믿고 의지하고 정당하게 걸으면, 그 걸음 자체라는 것이 악인의 길하고 비교할 때에 별로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분명히 그것은 의인의 길이 되는 것이고, 어떤 사람이 자기의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생각만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경영하고, 자기의 최선을 얻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자꾸 나가면 인간적인 선도 있고 의도 있고 훌륭한 일도 있고 또 인간적인 정욕과 불의와 악도 함께 드러나는 것인데 그것을 보면 그 사람은 분명히 한 인간으로서 자기의 최선을 다 나타내 보려고 그렇게 한 것이지만 그가 죄인으로서, 특별히 회개함 없이 죄사함 받음이 없이, 또 하나님께서 은혜주심으로서 인도해 주시고 비춰주신대로 따라감 없이, 자기 인간의 지혜와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서 걸어간 길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죄인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좀더 적극적으로 불의와 악을 행해서 결국은 멸망을 자취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은 물론 악인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객관적으로 어떤 생활 하나하나를 놓고서 평가해서 의인의 길인지 악인의 길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이 일생 변함이 없이 의인의 길만을 걷는 것이 아니고 가다가 때때로 넘어 지기도 하고 곁길로 가서 결국은 의인의 길이 아닌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또 다시 돌아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인의 길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일생 그가 걸어간 그 외길이 반드시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가급적 그렇게 가려고 일생을 그런 방향을 취하고 나간 경향이 분명히 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비록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종교적으로 열심히 살겠다고 했어도 너무나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가 자기 마음대로 했다 다시 한번 돌아와서 바로 살아 본다고 했다가 하는 것들이 뒤섞여 있는 아주 복잡하고 혼탁한 생활을 할 수 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인의 길이라 하는 것을 생각할 때 사실상 철저하게 의인의 길만을 일생 걷는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에서는 의인의 길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의인의 길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하는 것을 좀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길 자체가 철저하게 의의 길이라 할 때 이 세상 아무도 일생을 통해서 잠시도 비뚤어지지 않고 의의 길만을 걸어갔다고 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의의 길이란 말을 생각할 때 문제는 의인이지만 의의 길로 갔다가 불의의 길로 갔다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을 의의 길로 갈 때는 의인이라 부르고 불의의 길로 갈 때는 악인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렇게 의인의 그 칭호, 악인의 칭호 그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지난 번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하나는 검다, 하나는 희다, 흑백으로 그렇게 딱 나누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의” 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의 길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면 완전히 철저한 의의 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할 때 성경은 우리에게 의의 길이 있는 것을 명확하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지키고 간 사람이라면, 일생 의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길도 의의 길이고 그 사람도 의인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조금도 어김이 없이 다 완성해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생명을 주어서 그 생명을 받은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담이래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다만 마지막 아담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우리 주 예수님만이 완전한 의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아담의 위치에 서서 아담이 실패한 그 의의 길을 걷는 행보를 완전하게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일생의 길은 철저하게 절대로 의의 길이었고 따라서 전혀 흠이 없는 의만이 충만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그런 생활을 볼 때 그것이 철저한 의의 길을 걸으신 생활이지만 사람들은 그 철저한 의의 길을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잘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와 꼭 같은 성정을 가지시고 함께 생활하셨는데 그러기 까닭에 예수님의 생활의 기록을 보면 무엇이 특별히 이 세상의 사람이 생활하는 방식, 특별히 직업으로 이야기 할 때는 한 랍비로서 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분으로서 3년 정도 땅위에서 보내셨다는 그 사실을 볼 때 무엇이 특별히 다를 것이 없습니다. 특별히 과거에 있는 위대한 랍비나 스승과 그 생활의 상태가 크게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철저히 의의 길을 걸으신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 철저히 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사실상 잘 모르는 까닭에 예수님께서 그 길을 나타내실 지라도 잘 깨닫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한 인간으로서의 생활의 길을 걸으셨거니 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 인간은 철저한 의의 길이라는 것을 상상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거리가 있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상상의 정도지 실질상 의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편에서 의인의 길이라 하는 말로서 표시 할 수 있는 신자가 걸어야 할 길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인의 길을 걷는 이 사람이 복스러운 사람이다 하는 것을 가르쳤다면 비 실천적이고 비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의인의 길이라는 것이 철저하게 이야기 할 때는 의의 길이 되어버리니까 아무도 그렇게 의인의 길을 철저하게 걸어 간 사람이 없지만 비교적 어떤 정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약점을 아시고, 인간의 여러 가지 연약을 아시고, 그 인간의 죄악성도 다 아시는 까닭에 그러한 사람 속에서 의인이라 하는 말로 불러 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록이 비교적 많은 의인이라고 할 때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구약에 나타나는 여러 성도 또 여러 하나님의 종들로 충실한 사람들을 다 의인이라고 불렀고, 롯과 같이 소돔 고모라를 택해서 간 사람이지만 성경에서는 저 의인이 그 소돔 고모라 사람들의 불의와 악을 보고서 마음이 상해 있었다고, 그를 의인이란 말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벧후 2:8)

그런 점에서 무엇이 의인이냐 할 때 그 사람이 생활 행진이나 그 사람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의 법에 비춰서 조금도 흠이 없는 그런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더라도 인간적인 그 부족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갈의 문제도 그래서 생긴 것이고, 이삭을 드릴 때도 그의 신앙의 동기는 다 훌륭했으나 그 이삭에 대한 그의 관념은 항상 그 시대적인 제한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의 인명에 대한 사상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런 시대적인 사상의 입각지를 하나님께서는 그때의 상황을 가지시고 가르쳐 주셔서 아브라함은 그 후에는 큰 깨달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삭을 드린 그 큰 사실, 큰 경험에 그의 하나님의 계시에 더 깊이 접촉한 큰 은혜를 받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불렀는데 왜 그런 것인가?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께서 불러내실 때 우르와 같은 도시에서 도시인으로서 쭉 생활하고 성장한 사람이 그것을 다 포기하고 아주 원시적인 베드윈의 생활로 다시 들어가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가야겠다 해서 도시의 그 화려한 데서 도시인으로서 살도록 다 기반을 쌓고 훈련이 있고 거기에 적응성을 가진 사람이 자기에게 적응성도 없는 베드윈으로 유목민의 그 한 부족을 이룬 속에 들어가서 자기의 길을 간 것입니다. 왜 그랬는가? 그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부르심의 음성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그랬고 부르심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어디다 쓰시든지 쓰시려고 하시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의인의 길을 걷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죄가 없고, 혹은 넘어지지 않고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자기 인생의 길을 걷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창세 전에 정해 놓으신 어떠한 일, 선한 일, 에베소서 2 10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이 선한 일이란 하나님이 이전에 예비하사 너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미리미리 다 준비 하셨다는 것입니다. 미리 준비 하셨던 이 길로 가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내시고 깨우쳐 주시고 걷도록 하실 때 그것을 들을 귀가 있어서 듣고 그 길로 가면 의인의 길을 걷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무리 정해주셨지만 자기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자기의 뜻대로 자기 이상을 세우고 자기의 목표를 세우고 행복 추구를 위해서 혹은 정신적인 만족을 위해서는 자기 물질이나 육신을 희생하면서 까지라도 자기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희생하고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지내는 것을 보면 불쌍한 것 같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그 사람이 불쌍한 처지에 있는 것은 욕심을 안 부렸다면 그렇지 않을 뻔했는데 좀더 행복스럽게 살기 위해서 소위 향상이라는 구실하에서 행복을 찾아 올라가다가 당하는 수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의인의 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길이라는 것은 그 사람자신이 의인이 되어서 무조건 어디를 가든지 의인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그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두 사람도 똑같이 안 만드신 것과 같이 개인적으로 그를 위해서 혹은 하나님의 그 나라의 거룩한 경영을 그 사람에게도 은사로 소명으로 주셔서 그에게 걸어가야 할 길을 만들어 주신 것인데 그 길로 바로 걸어가려면 하나님께서 그 길로 불러내시고 가르쳐주시는 그것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안 받고 자기 마음대로 이것이거니 저것이거니 하고 지레짐작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세우신 그 길을 그가 어떻게 알고, 깨닫고 나가느냐 하는 문제인데 그것은 물론 두 말할 것 없이 하나님께는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없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게 하셨고, 또 그렇게 하도록 미리 마련하시고 준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첫째는 속죄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하나님의 중생한 새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시되 성신님으로 인도를 하시는데 이 성신님의 가르쳐 주심과 인도하심 가운데 들어가서 그의 가르쳐 주심을 늘 받고 그의 인도를 받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모르는 것을 알았다는데서 만족을 해서는 안되고 알았으면 그 다음에는 그로 말미암아서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은혜를 받아서 자기의 길도 깨달아야 하고 자기의 문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해 주시는 가를 자꾸 경험을 하면서 실질상 확신과 지혜를 가지고 바로 길을 걸어가는 것이 성경을 읽는 보람이고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공부를 할 때 항상 그렇게 분명한 목표를 두고 거기서 능력을 얻도록 해야지 그냥 모르는 것을 알았다는 정도만 가지고서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성신님께서 역사 하시는 그 역사를 생활로 체험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생활로 성신의 역사를 체험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성경을 보고 어떠한 새로운 관념을 얻는데서 만족하고 나아가는 이런 상태에 빠지기가 쉬운 것입니다.

성신께 의지해서 성신님의 유기적인 역사로 나를 깨닫게 하고 또 알게 하시고 그리고 믿게 하시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에게 다 맡기고 그에게 다 바치고 그리고 나아가는 이런 생활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얻은 종교지식하에서 자기가 판단해서 자기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말로 말해서 자기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이런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비슷한 생각 같지만 아닌 사이비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참으로 주시는 성신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신의 인도를 받는 사람의 확실한 증거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배워서 거기에서 뜻을 먼저 깨닫는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신이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서 너희를 인도하신다고 요한복음 16 13절에 말씀했는데 그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는 것을 내가 받았으면 그것이 끝이 아니고 거기에 대한 확신이 생겨야하는 것입니다. 성신님의 인도가 있으면 확신이 있는 것이고 자기가 종교적인 깨달음이 있으면 자기가 지레짐작으로 인정하고 마는 것입니다. 지레짐작으로 인정한 것과 확신이 있는 것이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그것은 문제가 있을 때 하나는 힘을 주는 것이고 지레짐작으로 자기가 인정한 것은 일을 해보려다가 어렵고 핍박이 너무 심하고 혹은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듯 하니까 회피해서 달리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신님의 인도는 그 앞에 무엇이 있던지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전진하는 것이고 그 결과  핍박도 당하고 혹은 죽음이 올지라도 그대로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나아가는 것이 발생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자기가 한번 종교적으로 영웅이 되어 보겠다든지 종교적으로서 위대한 위치에 올라가 보겠다든지 해서 자기가 해보다가 나중에는 굉장한 위협이 올 때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때는 생각을 바꾸어서 잠깐 해석을 달리하고 잠깐 타협을 하고 조금만 이것을 해석을 넓게 하면 괜찮을 텐데 내가 너무 고지식해서 그렇다고  핑계를 붙이고 회피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과거에 큰 핍박이 있었던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하라는 무서운 핍박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던 사실입니다. 끝까지 확신을 가지고 신사참배 하는 것은 타협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가? 아니면 알고 보니 이것은 별것 아니고 국가의식 이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뭐 별 대단한 문제가 아니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교회가 이렇게 하면 사방으로 흩어질 테니까 교회를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잠시 우리가 그냥 타협하고 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생각지 못하고 말씀의 진리를 벗어나서 교회를 생각한다는 것은 성신님에 의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성신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데 말씀으로 먼저 가르쳐 주신 다음에 확신을 주시고 확신에 의해서 그 다음에는 한 걸음을 나가게 하시는 것이지 밤낮 무엇을 자꾸 새로운 것을 알아만 보는데 치중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길에는 크고 작은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자기를 인정하는가 않는가 하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자기 앞에 있을 때 자기가 이것을 할 수 있다든지 자기가 하야겠다든지 하는 생각을 않고, 바울선생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을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한 것같이 항상 이 세상 앞에서 자기는 힘이 없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주께서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면 어떻게 할 길이 없다는 이런 절실한 생각이 드는가 아니면 그런 생각은 한때에 종교적으로 자기가 지어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이고 사실상은 자기를 믿는 자신, 그만한 것 정도야 내가 능히 이길 수 있게 다 만들어 주셨는데 하면서 자기를 하나님의 은혜 주신 것이라고 하는 핑계를 붙여가면서 잠시라도 의지하는가? 하는 이런 것이 갈림길 인 것입니다.

이런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성신의 인도를 받아서 주의를 하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의인의 길이 라는 것은 성신의 인도함을 받고 나가는 길인 것입니다. 결국 성신께서 인도해 주시는 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신의 인도를 받는 길에서 자기 마음대로 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의인의 길이라는 것은 열매를 맺는 길인데 열매를 맺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의인의 길과 더불어 열매 맺는 문제에 대해서 다음에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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