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26, 2011

시편 1 편 (5)


시편에서 다룬 문제는 이 시인이 자연환경을 보고 아름다워서 그것을 노래한 것도 아니고, 인생의 슬픔과 기쁨에 대해서 무엇을 읊은 것도 아니고 역사적으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늘 계속해 나오는 악한 자, 또 의로운 자, 그 현상은 어떤 것인가를 연유를 써서 나타내고 그 운명, 혹은 장래는 어떤 것인가를 간단하게 읊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시는 종합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그냥 읽으면 시가 가지고 있는 참된 의미와 깊이와 아름다운 것을 잘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간단한 시인 까닭에, 간단한 가운데 큰 것을 넣은 까닭에 또 그 다룬 제목이 가장 큰 인생 문제의 하나인 까닭에 그것을 우리가 바로 이해하려면 이 시에 있는 용어 하나를 쓰더라도 생각해서 쓴 시인의 그 심정을 생각하고 그 의미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읽어야 간단히 표현된 시 가운데 담겨있는 풍부한 의미를 파악 할 수 있게 됩니다.

구약의 많은 시편이 그렇지만 특별히 1편은 전 시편의 서문과 같이 쓰여진 까닭에 다룬 제목이 보편적이고 또 그만큼 심오한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이 시에 있는 용어들을 주의해서 생각해야 이 시를 통해서 나타내시려는 계시를 이해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문제는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시는 것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무엇을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많은 것 가운데서도 세 가지를 특별히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것은 악한자의 의논대로 행하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은 행복스럽다. 요컨대 일종의 행복의 조건과 같이도 들립니다. 이러 이러한 사람은 행복스럽다. 그러고 그 사람을 표시할 때는 시냇물 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또 그 잎사귀도 마르지 아니함 같다고 그렇게 설명을 해 놓고 그리고 그의 행하는 일은 무릇 다 형통할 것이다 하고 앞으로 올 일까지도 그에게 큰복이 어떻게 큰 것인가 또 어떻게 시간적으로도 영원한가 하는 것을 느끼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복스러운 사람인 사실이 어떻게 증명이 되는가 할 때 시냇물 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는 이 말에서 그 현상이 그렇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열매를 맺는 사람이 받는 은혜가 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게 있는 가지로서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하여 버리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욱 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이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포도원 농부와 같이 내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신다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열매를 더 맺게 하시고 더 풍성하게 맺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잎사귀도 마르지 않고 따라서 그 행하는 일이 형통하다 하는 것이 시인이 한 이야기인데, 그 열매를 맺는다는 것, 이것은 시적인 표현으로서 연유를 썼는데, 즉 비유적인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것이 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참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열매라는 것 그것 하나만 가지고라도 많은 것을 생각 할 수밖에 없지만 오늘 우리가 이 시편 1편을 읽으면서 열매를 맺는다 할 때는 단 몇 가지를 특별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 하셨는데 누군가가 심어 놓은 나무인 것입니다. 그냥 저절로 아무렇게도 난 나무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심어 놓은 나무는 어떤 나무인가? 를 생각 할 때 성경에 있는 이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15 13절에 말씀에서 그 입으로 나오는 것이 어떤 악이냐?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까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으로 인하여 걸림이 된 줄을 아시나이까? 하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들은 소경이 되어서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이렇게 심은 것마다 내 아버지께서 심은 것이 아니면 뽑힐 것이다 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어 놓아야만 하겠다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심으신 나무가 아니면 다 뽑힐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례미야 17 7절에도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이것이 예언가 예례미야가 그린 바 여호와께서 심으신 나무의 복스러운 상태입니다. 예례미야뿐만 아니라 또 선지자 이사야도 이사야 60 21절에 “네 백성이 다 의롭게 되어 영영히 땅을 차지하리니”, 이것은 마지막 완성했을 때의 이야기인데, “그들은 나의 심은 가지요 나의 손으로 만든 것으로서 나의 영광을 나타낼 것인즉” 이렇게 여호와께서 친히 당신의 백성을 땅에 심는다 하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사야 61 3절에도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의의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나무인데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고 그렇게 칭함을 받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심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80 8절에도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백성을 두고 노래한 것인데 이것은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입니다.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신 다음에 그 땅에다가 이를 심으셨습니다.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80:9-12) 이것은 그 사람들의 심판에 대한 것을 또 생각하고 노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 그 이유가 있는데 주께서 심으신 그 백성, 마치 포도나무나 그렇지 않으면 물가에 심은 나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인데 이것이 물가에 서있는 나무에 대해서 생각해야 할 중요한 문제입니다. 제 마음대로 난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싱싱하게 자양을 얻고 열매를 맺게 하시려고 심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께서 심으신 나무는, 이는 거룩한 나무인데, 열매는 어떻겠는가? 물론 마태복음 12 33절을 보면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그러니까 주께서 심으신 나무는 주께서 바라시고 맺게 하시는 열매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7 17, 18절에도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나무와 열매의 절대적인 관계 하에서 거기서는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을 때 어떻게 되는가? 마태복음 21 18절에도 예수님께서 수난주간 월요일 아침 일찍 예루살렘을 향하여 베다니에서 들어가는 도중에 싱싱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당연히 거기 먹을 것이 있을 것으로, 참된 열매들, 그것이 있을 것을 생각하시고, 적어도 있을 것으로 기대하시고 바라보았지만 아무 것도 먹을 것이 없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는 것을 다 보고 있었습니다. 내가 이제부터는 다시 열매를 내지 못하리라 그러더니 그날 오후에, 저녁에 돌아갈 때 보니까 뿌리로부터 다 말라 버렸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그 이외에도 예수님께서는 비유로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를 찍어 버려야겠다, 왜 땅만 허비 해야하겠느냐?(누가복음 13:6-9)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또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와 가지의 비유로서는 내 안에 있는 가지로서 열매를 맺지 못 할 때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하여 버리신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열매를 맺지 못 할 때는 제하여 버리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열매는 반드시 선한 열매,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할 것이고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하나님의 징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도 포도원에 필요한 것을 다 준비해서 주고, 비료까지 주고, 망대까지 세우고, 즙 짜는 기계까지 다 만들어 놓고, 그래서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그만 들 포도를 맺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포도원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울타리를 거두어서 먹힘을 당하게 하고, 시랑이가 거기 오고 못쓰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 5:1-7) 시편 80편 말씀과 같은 말씀이다. 주께서 어찌하여 그 울타리를 거두어서 다른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다 따게 하셨습니까? 하고 시인은 이야기하는데,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힐 때는 그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주의해야 합니다. 시편 80 12절에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거기는 시랑이 돌아다니면서 거하고, 집을 짓고, 엉겅퀴, 가시가 거기 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어떻게 하셨는가를 우리가 보는데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누구에게든지 열매를 제대로 맺지 아니하면, 그것은 반드시 맺지 아니한 사실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개인적으로도 아무 열매를 안 맺는다든지, 볼 만한 것이 없다든지, 좋은 포도를 맺어야 할텐데, 실컷 맺는 것이 들 포도 정도나 맺는다면 교회 오래 다녔다고 하는 것이 아무 소용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라고 해서 얼마나 사람이 많이 모이고, 몇 년이나 되었다고 자랑해도 만일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교회가 정당히 맺어야 할 참된 교회다운 자태와 능력과 영광의 열매를 맺지 못 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를 그냥 두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열매에 대해서 세 가지 중요한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성신의 열매”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 22절로 23절에 그리스도의 품성에 대한 것을 특별히 표시 할 때, 성신의 열매라 하는 도덕적인 성격을 이야기합니다. 둘째는 “빛의 열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5 9절에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또 특별히 이런 열매에 대해서 베드로 후서 1장을 보면 그것이 어떤 종류의 열매인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있습니다. 셋째는 마태복음 21 43절 말씀에 “그 나라의 열매”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열매를 말씀하실 때에 악한 농부들이 있어서 사신을 보내서 열매를 구하니까 죽이더니 나중에 아들을 보내면서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고 했더니, 그 아들, 저건 상속자다 자 우리가 잡아죽이고 그것을 차지하자 하고 그 아들까지 죽인 이 악한 농부, 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그 주간 화요일에 하신 이야기인데 바로 목요일 날 밤에는 잡혀가시는 것인데, 역력하게 그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 악한 농부의 비유 끝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지만 무리들이 예수님을 선지자로 아는 까닭에 못 잡는다고 그랬는데, 거기에 이 마태복음 21 43절에 그 나라의 열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를 맺는 백성에게 주어질 것이다.” 하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열매에 대해서 성경은 여러 가지로 열매란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무의 열매도 있고, 짐승의 열매도 있고, 토산물이라고 해서 땅의 열매도 있고, 혹은 입의 열매라는 말도 있고, 손의 열매라는 말도 있고, 열매라는 말을 아주 다양하게 히브리말은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물론 사람들이 모르게 은어로만 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곧 손의 열매면 손이 일을 해서 만들어 낸것을 가르치는 것이고, 입의 열매는 말을 해서 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가 하는 것을 입술의 열매라고 하고, 태의 열매라 하면 아기를 의미하는 것이고, 짐승의 열매라 하면 그 짐승의 새끼를 의미하는 것이고, 나무의 열매는 나무의 과실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렇게 열매라고 하는 말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빛의 열매, 성신의 열매, 그 나라의 열매, 이런 것들을 주의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종합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것을 생각하면 열매는 첫째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을 성신의 열매라는 말로 표시했습니다. 갈라디아 5 22 23절에서 “성신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존절이라.” 이것이 성신의 한 열매인데 성신으로 말미암아 나는 열매 안에 있는 속성들은 이런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열매가 따로 하나 있고, 희락이라는 열매는 따로 있고 그런 것이 아니라 성신으로 말미암은 열매는, 그 열매라는 말속에는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그 안에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랑이다 희락이다 혹은 평화라, 평안, 참는 것이다, 혹은 자비로운 것이다, 또 양선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특별히 대인관계에서 많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 대해서 충성스럽고, 늘 순종하는 온유가 있고, 또 늘 주신바 은혜를 필요한 때 가장 유효히 쓰는 존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그리스도적인 품성이 첫째 필요한 열매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에베소서 5 9절부터 보면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다.” 고귀한 가치가 있는 것, 그러한 마음 자리라는 것인데, 첫째는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 모든 착함과, 또 그 다음에 다만 마음자리만이 아니라 그러한 생활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착하게 의롭게 진실하게 늘 섬기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봉사의 활동을 늘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든 착함, 성의, 정의, 진실, 그러한 열매라 하는 것이 빛의 열매라는 말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빛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런 다음 열매 없는 어두운 일에 참여하지 말라고 했는데, “열매 없는 어두운 일에 참여하지 말아라 저희들이 하는 일을 보면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이러한 말씀을 보면 그 열매는 어떠한 행동과 또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행하는 일, 에베소서 5 8절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그러면 빛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그러한 마음이나 그러한 생활 상태나 그러한 봉사나 그러한 구체적인 사업, 행동, 무슨 구체적인 일, 이런 일들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께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시험해 보아라. 이렇게 해보며, 저렇게 해보며, 주께 기쁘게 할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찾아야 할 것이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운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행하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오는 결과가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매라는 것은 도덕적인 품성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활 행동의 구체적인 결산들인 것입니다. 이런 것을 열매라는 말로 표시한 것입니다. 또 다음에 우리가 베드로후서 1 4절로 9절을 보면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이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주신 이 새로운 언약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의 정욕적인 것에 가담치 않고 그것을 피해서 신에 성품에 참여하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닮아가는 성품은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성품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얻게 하시려고 했으니 너희가 그렇게 되려면 물론 성신께서 우리 안에서 주장하셔서 우리 안에서 그것을 심어 주셔야 하지만, 또한 동시에 그 성품이 구체적으로 확연하게 바깥으로 장성해 가면서 드러나려면,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들을 더해 주어라 이와 같은 여러 가지 덕성이 우리 안에서 더욱 더욱 증가 되어나가면,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한다”, 또한 여기 열매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도 않고, 열매 없는 사람이 되지도 않고, 헛되이 잘못 알고 자기의 종교로 알고 돌아다니지 않고 진짜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바로 아는데 유효하고 유실 할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열매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열매라는 것은 어떤 지식의 내용으로 말미암은 결과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지식, 그리고 그 안다는 열매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아 가지고 열매가 있다는 의미보다는 알기를 깊이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을 증가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히브리 말 안다는 말, “요데아혹은 야다”, 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권능을 행하고 많은 큰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습니까” 하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 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예수님께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모른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모르실 리가 없는 예수님 입니다. “난 너를 모른다” 여기 알고 모른다는 말이 히브리적인 사상으로는 중요한 것입니다. 너하고 나는 아무 관계도 없고 구체적으로 너와 내가 함께 합작해서 일한 일도 없고 같이 생활 가운데서 분명히 무엇을 증거 할 만한 것을 쌓아올린 일이 없다. 이것이 히브리적인 야다혹은 요데아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의미입니다. 이런 안다는 말은 단순히 그 헬라적인 지식이 있다 무엇에 대한 인지가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에 대한 경험과 생활과 그러고 생활 경험 가운데 나타난 어떤 구체적인 것들이 거기 있다 하는 것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를 안다 모른다는 말로 참으로 중요한 내용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기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렇게 깊이 알아서 자기가 그렇게 알기에 필요한 장성을 하고 그 결과 그 만큼 봉사한 경력으로서 그리고 쌓아 놓은 역사가 거기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로서, 너희가 만일 이러한 것들, 믿음에 덕, 덕에 지식, 지식에 절제, 인내 이런 것이 있으면,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도 아니하고 오랜만에 있다가 조금씩 알아보고 그런 것이 아니고 항상 부지런하게 그리스도와 교통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짜로 그리스도를 아는데서 열매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러한 지적인 축척뿐 아니라 그것을 보증 할 수 있는 생활의 경험과 경력과 또 역사가 거기 함께 드러나는 것이다 하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빛의 열매라는 것을 가지고 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열매라는 것이 거기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라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라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의 대권이 어떻게 역사하는 가를 자기가 알고 찾아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안에서 다스림을 받은 사람다운 구체적인 자기의 생활이 거기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인 까닭에 나 혼자가 아니고 성도끼리 결속되어서 하나님의 백성을 이룬 그 사회 안에서 사회적인 구체적인 현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사회적 현실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성도의 교통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어서 성도가 서로 교통한다는 점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이 없이 교회라는 것을 생각 할 수가 없고 그리스도와 일체가 되었다는 사실이 없이 교회라는 것을 말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도의 교통이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보이는 사람들끼리도 교통이 있는 까닭에 이것이 사회적인 의미를 늘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단순히 마음 가운데 있는 의와 평강과 기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교통 가운데 구현되는 구체적인 목적을 향한 공동의 노력이고, 공동의 마음 쓰임이고, 공동의 봉사인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증시를 하려면 나 혼자 앉아서 기도만 하고 종교만 가지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교통이라는 사실에서 공동의 목표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의 가도에서 함께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무엇을 위해서 여기 있는가? 역사적 사명은 무엇인가? 첫째는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고 둘째는 유지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우리의 교회는 존재해야 하는가? 할 때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필요한 일들을 해야 한다 것입니다. 이 일을 할 때에 공동으로서 협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적인 사명인데 이 교회의 사명을 한번 느꼈으면 그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해야합니다. 사명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분부하시는 것인 까닭에 내 마음대로 했다 안했다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충성을 다해서, 한번 맡은 자에게 요구 할 것은 충성인데, 충성을 다해서 해 나아가는 데에 그 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열매라 할 때에는 아주 현실적으로, 구체적으로 해 놓은 업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없이 그 나라의 열매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을  사랑했다고 한다면 사랑한 결과 무엇이 있는가? 충성을 다했다면 충성한 결과 무엇이 있는가? 그것이 현실 사회에서 어떤 구체적인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위에서 작용해 나아 갈 때는 구체적인 사회적인 능력의 발휘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라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여러 사람이 함께 모여서 나가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것은 나 혼자만 그냥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무리 가운데 하나로서 혼자 하나님하고 관계해 가지고 성도 노릇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합쳐서 성도의 교통함을 통해서 교회가 보이지 않는 실질을 보이는 유형의 교회로 나타내는 동시에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 능력과 덕, 추상적이나 그러나 분명히 거기 존재하는 강력한 이런 거룩한 능력들을 보이는 현실로서 나타낼 때는 특별히 하나님의 나라답게 성도의 교통과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사실이 그들에게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개인으로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국가의 국민들이 법칙 가운데서 움직이듯이, 일정한 법칙 하에서 그것이 움직여 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법이라는 것이 분명히 거기 있어서 우리가 그것을 지키고 충실하게 살아가기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들인 것입니다. 다만 구약에 있는 율법만이 아니라 어떤 형식으로든지 하나님이 ‘하라’ ‘하지 말아라’ 한 것들을 우리가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하라’ 한 것은 해야하고 ‘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신약에도 있고 구약에도 다 있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형식으로서의 법을 우리가 충실하게 해 나가기 위해서 성신을 의지해서 그 인도와 주장과 힘 주심으로 나타내고 생활해야 합니다. 그런 생활의 결과가 곧 하나님 나라의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는 생활하면서 시간 속에서 어떤 길을 가는 것이고, 자기 일생의 길을 가는 동시에 뒤 돌아보면 생활 행보 가운데 지어놓은 역사라는 것은 좋거나 나쁘거나 내가 만들어 놓은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증명하는 성격을 늘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 나라의 열매를 맺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백성을 세우신 다음에 경영하셔서 나타내시려고 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을 그 백성이 점점 깨달아서 그것을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깨달음 가운데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통치라는 것이 단순히 종교 하나를 만드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모든 생활을 규제하고 통제하시는 까닭에 모든 생활에서 하나님은 무엇을 나타내시기를, 어떻게 하시기를 바라시는가? 하는 이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나타내 보여 주시려고, 산상수훈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표시하고 선언했을 때 그것은 인간관계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가르치신 것이지 사람이 교회에 가서 어떻게 해야 할 종교적 규례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같이 사람은 자기 생활과 사회와 또 공동의 시민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증시할 수 있는 그런 각성과 그러한 장성의 성숙성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가 열매로서 주의해야 합니다. 여기 복 있는 사람은 그러한 열매를 맺는 사람인 것입니다. 무조건 복만 받으려고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열매를 맺는데서 행복스럽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를 중심으로해서 복을 자꾸 받는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이 말이 원문대로 보면 이런 상태에 있는 그 사람들의 행복이여!” 라는 말로서 이러한 열매를 맺는 그 사람이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 편 (4)


시편1편에 현저하게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 중에 길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악한자의 길 혹은 죄인의 길이 있고, 거기에 대조해서 의인의 길이 있는 것을 6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은 인정하시나 악한자의 길은 망하리로다” 또 1절 말씀에도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와같이 길이라는 것이 중요하게 시에서 나타나는데, 물론 시이기 때문에 거기에 자세한 논문을 쓸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길이란 무엇이다 하고 자세히 설명하는 것도 없고 , 악한자의 그 의논이라는 것은 무엇이다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도 없고 오만한자의 자리라 하는 것도 설명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바로 알 것을 기대하면서 그리고 바로 알아야 이 시가 노래하는 정신과 참 의미를 우리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그 중에 한 가지씩 계속해서 생각해 가고 있는데 악한자의 의논이라는 말에서 사상이라든지 여러 가지 것을 살펴 보았고 지금은 죄인의 길이라는 말을 지금 생각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길에 대해서 자세하게, 악인의 길은 어떠하고 의인의 길은 어떠하다 하는 것을 자세하게 설명한 일은 없으나, 우리가 알 수 있도록 의인은 어떤 길을 걷기는 걷는데, 그 걷는 그 상태를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도 마르지 아니한 것과 같다 하는 Simile를 가지고 설명을 했습니다. 결국 의로운 자의 걷는 길을, 혹은 걸으면서 나타나는 그의 능력 있는, 생명 있는 상태를 비유로서 나타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그 율법을 묵상하는 것, 이것은 그의 한 특성인데, 악한자의 의논을 오히려 버리고, 그것을 취할 것이 아니라고 버리고, 도무지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그리고 의인의 길을 택해서 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 가운데 어떤 것이 의인의 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지식과 지혜가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한 지식과 그러한 큰 도리를, 즉 악한자의 길을 악한자의 길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것, 이것이 악인의 의논이다 라고 판단 할 수 있는 것, 이런 판단에 필요한 표준들을 자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터득해 나간 것입니다. 소위 Criteria라는 것 이것이 물론 하나님의 법을 묵상하고 즐거워하는데서 터득한 것입니다. 그냥 율법을 좋고 재미있다고 보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을 열심히 보았으면 본만큼 자기가 좀더 판단하고 바른 것을 선택하는 태도에 있어서 훨씬 바르고 명철해야 할 것인데, 이런 명철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보고 묵상하고 연구 한데서 얻어서 그것이 실행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편 119 101절에는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 하였사오니,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니” 라는 말씀이 있는데 악한 길로 가지 않으려면 악한길이 어떤 길인가 하는 것을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주의 법도를 지킴으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나이다.” 노인보다도 더 자기가 명철하게 되었다고 했는데, 왜 이런 명철이 있는가 여기 보면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함으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도 승하다” 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지식을 넓히고 하는 그런 사람들보다도 이제는 참으로 무엇이 바른 길이고 악한 길이 아닌가 무엇이 의인 길이고 악한 자의 길이 아닌가, 무엇이 그릇된 의논인가 무엇이 잘못된 자리인가? 이런 것을 다 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 필요한 Criteria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악인의 길”이라는 말도 여기에 나오는데 101절에 보면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 하였사오며” 세상에는 어떤 길을 이야기 할 때 그것을 악한 길이라 혹은 의로운 길이라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 할 수 있지만 지금 이 시에서 특별히 말하는 것은 길 자체가 악이라든지 혹은 의라든지 그렇게 말하지 않고 악인이 걸어가는 길, 악인이 그 악을 인하여 죄인이 자기 죄악 가운데 그냥 회개 없이 살면서 걸어가는 길, 이래서 이것을 죄인의 길 또는 악인의 길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악의 길이라든지 의의 길이라든지 그 길 자체에 무슨 도덕적 성격이 있는 것 같은 용어를 쓰지 않고 죄인이 회개 없이 가고 악인이 악에서 돌이킴이 없이 그냥 걷고 있는 그런 길을 지칭해서 악인의 길이라 죄인의 길이라 그렇게 말을 하고, 의인이 그 의라는 것을 증시하는 생활 행보를 가리켜서 의인의 길이라고 이렇게 말하고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악인의 길이라는 것이 의인의 길과 확실히 달라서 저 길은 악하구나 이 길은 선하구나 이렇게만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자기 나름대로 자기의 길을 대체로 다 최선의 길로 여기고 걸어가는데 그 중에는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이라는 것이 아주 대단히 비슷해서 그것만 따로 놓고 거기 악인도 안 서있고 의인도 안 서 있다면 그것을 특별히 악의 길이라든지 의의 길이라고 이렇게 말하기 어려운 것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그 생각에 의해서 걸어가고 있는 그 인생의 생활 행진을 우리가 주의해서 볼 때 그것은 계속해서 어떤 길을 걸어온 것입니다. 인생의 어떤 목표를 가지고 어떠한 철학과 인생관 하에서 생의 길을 안 걸어갈 수 없이 세월이라는 것이 하나의 길과 같이 그 길 위에서 사람이 자꾸 가는 것과 같이 세월의 길을 누구나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연히 그 사람이 싫든지 좋든지 그 사람 자신의 역사라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경력이나 역사라고 하는 것을 볼 때에 거기에 어떠한 성격이 뚜렷이 드러나는데 그것이 악인의 길을 걷는 것인가 의인의 길을 걷는 것인가 하는 것을 판단하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매우 유사한 점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사하더라도 시인은 노래를 할 때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의인으로 인정함을 받아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그 하나님의 크신 은혜 속에서 항상 믿고 의지하고 정당하게 걸으면, 그 걸음 자체라는 것이 악인의 길하고 비교할 때에 별로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이 보일지라도 분명히 그것은 의인의 길이 되는 것이고, 어떤 사람이 자기의 가지고 있는 인간적인 생각만을 가지고 자기 인생을 경영하고, 자기의 최선을 얻어 보려고 노력하면서 자꾸 나가면 인간적인 선도 있고 의도 있고 훌륭한 일도 있고 또 인간적인 정욕과 불의와 악도 함께 드러나는 것인데 그것을 보면 그 사람은 분명히 한 인간으로서 자기의 최선을 다 나타내 보려고 그렇게 한 것이지만 그가 죄인으로서, 특별히 회개함 없이 죄사함 받음이 없이, 또 하나님께서 은혜주심으로서 인도해 주시고 비춰주신대로 따라감 없이, 자기 인간의 지혜와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서 걸어간 길은 아무리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죄인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좀더 적극적으로 불의와 악을 행해서 결국은 멸망을 자취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은 물론 악인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객관적으로 어떤 생활 하나하나를 놓고서 평가해서 의인의 길인지 악인의 길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사람이 일생 변함이 없이 의인의 길만을 걷는 것이 아니고 가다가 때때로 넘어 지기도 하고 곁길로 가서 결국은 의인의 길이 아닌 길을 걸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또 다시 돌아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인의 길이라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일생 그가 걸어간 그 외길이 반드시 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가급적 그렇게 가려고 일생을 그런 방향을 취하고 나간 경향이 분명히 있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비록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종교적으로 열심히 살겠다고 했어도 너무나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가 자기 마음대로 했다 다시 한번 돌아와서 바로 살아 본다고 했다가 하는 것들이 뒤섞여 있는 아주 복잡하고 혼탁한 생활을 할 수 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의인의 길이라 하는 것을 생각할 때 사실상 철저하게 의인의 길만을 일생 걷는다고 말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에서는 의인의 길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의인의 길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하는 것을 좀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길 자체가 철저하게 의의 길이라 할 때 이 세상 아무도 일생을 통해서 잠시도 비뚤어지지 않고 의의 길만을 걸어갔다고 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의의 길이란 말을 생각할 때 문제는 의인이지만 의의 길로 갔다가 불의의 길로 갔다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을 의의 길로 갈 때는 의인이라 부르고 불의의 길로 갈 때는 악인이라고 불러야 하는가? 이렇게 의인의 그 칭호, 악인의 칭호 그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생각해야 한다고 지난 번에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하나는 검다, 하나는 희다, 흑백으로 그렇게 딱 나누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의” 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의의 길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면 완전히 철저한 의의 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할 때 성경은 우리에게 의의 길이 있는 것을 명확하게 가르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이 지키고 간 사람이라면, 일생 의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길도 의의 길이고 그 사람도 의인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으로서 그렇게 하나님의 법을 조금도 어김이 없이 다 완성해서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생명을 주어서 그 생명을 받은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담이래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다만 마지막 아담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우리 주 예수님만이 완전한 의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아담의 위치에 서서 아담이 실패한 그 의의 길을 걷는 행보를 완전하게 성취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일생의 길은 철저하게 절대로 의의 길이었고 따라서 전혀 흠이 없는 의만이 충만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그런 생활을 볼 때 그것이 철저한 의의 길을 걸으신 생활이지만 사람들은 그 철저한 의의 길을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잘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와 꼭 같은 성정을 가지시고 함께 생활하셨는데 그러기 까닭에 예수님의 생활의 기록을 보면 무엇이 특별히 이 세상의 사람이 생활하는 방식, 특별히 직업으로 이야기 할 때는 한 랍비로서 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분으로서 3년 정도 땅위에서 보내셨다는 그 사실을 볼 때 무엇이 특별히 다를 것이 없습니다. 특별히 과거에 있는 위대한 랍비나 스승과 그 생활의 상태가 크게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철저히 의의 길을 걸으신 것이지만 사람들은 그 철저히 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사실상 잘 모르는 까닭에 예수님께서 그 길을 나타내실 지라도 잘 깨닫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와 같은 한 인간으로서의 생활의 길을 걸으셨거니 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우리 인간은 철저한 의의 길이라는 것을 상상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거리가 있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상상의 정도지 실질상 의의 길이 어떤 것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편에서 의인의 길이라 하는 말로서 표시 할 수 있는 신자가 걸어야 할 길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의인의 길을 걷는 이 사람이 복스러운 사람이다 하는 것을 가르쳤다면 비 실천적이고 비 현실적인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의인의 길이라는 것이 철저하게 이야기 할 때는 의의 길이 되어버리니까 아무도 그렇게 의인의 길을 철저하게 걸어 간 사람이 없지만 비교적 어떤 정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약점을 아시고, 인간의 여러 가지 연약을 아시고, 그 인간의 죄악성도 다 아시는 까닭에 그러한 사람 속에서 의인이라 하는 말로 불러 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록이 비교적 많은 의인이라고 할 때 아브라함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구약에 나타나는 여러 성도 또 여러 하나님의 종들로 충실한 사람들을 다 의인이라고 불렀고, 롯과 같이 소돔 고모라를 택해서 간 사람이지만 성경에서는 저 의인이 그 소돔 고모라 사람들의 불의와 악을 보고서 마음이 상해 있었다고, 그를 의인이란 말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벧후 2:8)

그런 점에서 무엇이 의인이냐 할 때 그 사람이 생활 행진이나 그 사람의 모든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의 법에 비춰서 조금도 흠이 없는 그런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보더라도 인간적인 그 부족 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갈의 문제도 그래서 생긴 것이고, 이삭을 드릴 때도 그의 신앙의 동기는 다 훌륭했으나 그 이삭에 대한 그의 관념은 항상 그 시대적인 제한 가운데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삭의 인명에 대한 사상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런 시대적인 사상의 입각지를 하나님께서는 그때의 상황을 가지시고 가르쳐 주셔서 아브라함은 그 후에는 큰 깨달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삭을 드린 그 큰 사실, 큰 경험에 그의 하나님의 계시에 더 깊이 접촉한 큰 은혜를 받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사람을 의인이라고 불렀는데 왜 그런 것인가?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께서 불러내실 때 우르와 같은 도시에서 도시인으로서 쭉 생활하고 성장한 사람이 그것을 다 포기하고 아주 원시적인 베드윈의 생활로 다시 들어가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가야겠다 해서 도시의 그 화려한 데서 도시인으로서 살도록 다 기반을 쌓고 훈련이 있고 거기에 적응성을 가진 사람이 자기에게 적응성도 없는 베드윈으로 유목민의 그 한 부족을 이룬 속에 들어가서 자기의 길을 간 것입니다. 왜 그랬는가? 그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 부르심의 음성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그랬고 부르심의 음성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그 거룩하신 말씀에 의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어디다 쓰시든지 쓰시려고 하시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그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의인의 길을 걷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죄가 없고, 혹은 넘어지지 않고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대로 자기 인생의 길을 걷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창세 전에 정해 놓으신 어떠한 일, 선한 일, 에베소서 2 10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이 선한 일이란 하나님이 이전에 예비하사 너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시려고 한 것입니다. 미리미리 다 준비 하셨다는 것입니다. 미리 준비 하셨던 이 길로 가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불러내시고 깨우쳐 주시고 걷도록 하실 때 그것을 들을 귀가 있어서 듣고 그 길로 가면 의인의 길을 걷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무리 정해주셨지만 자기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서 자기의 뜻대로 자기 이상을 세우고 자기의 목표를 세우고 행복 추구를 위해서 혹은 정신적인 만족을 위해서는 자기 물질이나 육신을 희생하면서 까지라도 자기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를 희생하고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 지내는 것을 보면 불쌍한 것 같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그렇게 하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그 사람이 불쌍한 처지에 있는 것은 욕심을 안 부렸다면 그렇지 않을 뻔했는데 좀더 행복스럽게 살기 위해서 소위 향상이라는 구실하에서 행복을 찾아 올라가다가 당하는 수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의인의 길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길이라는 것은 그 사람자신이 의인이 되어서 무조건 어디를 가든지 의인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보다 그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두 사람도 똑같이 안 만드신 것과 같이 개인적으로 그를 위해서 혹은 하나님의 그 나라의 거룩한 경영을 그 사람에게도 은사로 소명으로 주셔서 그에게 걸어가야 할 길을 만들어 주신 것인데 그 길로 바로 걸어가려면 하나님께서 그 길로 불러내시고 가르쳐주시는 그것을 받아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안 받고 자기 마음대로 이것이거니 저것이거니 하고 지레짐작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세우신 그 길을 그가 어떻게 알고, 깨닫고 나가느냐 하는 문제인데 그것은 물론 두 말할 것 없이 하나님께는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없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게 하셨고, 또 그렇게 하도록 미리 마련하시고 준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무엇보다도 첫째는 속죄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면 하나님의 중생한 새 사람으로서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시되 성신님으로 인도를 하시는데 이 성신님의 가르쳐 주심과 인도하심 가운데 들어가서 그의 가르쳐 주심을 늘 받고 그의 인도를 받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냥 모르는 것을 알았다는데서 만족을 해서는 안되고 알았으면 그 다음에는 그로 말미암아서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은혜를 받아서 자기의 길도 깨달아야 하고 자기의 문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해 주시는 가를 자꾸 경험을 하면서 실질상 확신과 지혜를 가지고 바로 길을 걸어가는 것이 성경을 읽는 보람이고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여러분이 성경공부를 할 때 항상 그렇게 분명한 목표를 두고 거기서 능력을 얻도록 해야지 그냥 모르는 것을 알았다는 정도만 가지고서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성신님께서 역사 하시는 그 역사를 생활로 체험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생활로 성신의 역사를 체험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성경을 보고 어떠한 새로운 관념을 얻는데서 만족하고 나아가는 이런 상태에 빠지기가 쉬운 것입니다.

성신께 의지해서 성신님의 유기적인 역사로 나를 깨닫게 하고 또 알게 하시고 그리고 믿게 하시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그에게 다 맡기고 그에게 다 바치고 그리고 나아가는 이런 생활태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얻은 종교지식하에서 자기가 판단해서 자기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말로 말해서 자기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는 이런 생각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비슷한 생각 같지만 아닌 사이비를 버리고 하나님께서 참으로 주시는 성신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성신의 인도를 받는 사람의 확실한 증거라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배워서 거기에서 뜻을 먼저 깨닫는데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성신이 오시면 모든 진리 가운데서 너희를 인도하신다고 요한복음 16 13절에 말씀했는데 그 진리 가운데 인도하시는 것을 내가 받았으면 그것이 끝이 아니고 거기에 대한 확신이 생겨야하는 것입니다. 성신님의 인도가 있으면 확신이 있는 것이고 자기가 종교적인 깨달음이 있으면 자기가 지레짐작으로 인정하고 마는 것입니다. 지레짐작으로 인정한 것과 확신이 있는 것이 어떻게 다른 것입니까? 그것은 문제가 있을 때 하나는 힘을 주는 것이고 지레짐작으로 자기가 인정한 것은 일을 해보려다가 어렵고 핍박이 너무 심하고 혹은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듯 하니까 회피해서 달리 해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신님의 인도는 그 앞에 무엇이 있던지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확신을 가지고 전진하는 것이고 그 결과  핍박도 당하고 혹은 죽음이 올지라도 그대로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나아가는 것이 발생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자기가 한번 종교적으로 영웅이 되어 보겠다든지 종교적으로서 위대한 위치에 올라가 보겠다든지 해서 자기가 해보다가 나중에는 굉장한 위협이 올 때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 그때는 생각을 바꾸어서 잠깐 해석을 달리하고 잠깐 타협을 하고 조금만 이것을 해석을 넓게 하면 괜찮을 텐데 내가 너무 고지식해서 그렇다고  핑계를 붙이고 회피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과거에 큰 핍박이 있었던 일제시대에 신사참배를 하라는 무서운 핍박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던 사실입니다. 끝까지 확신을 가지고 신사참배 하는 것은 타협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는가? 아니면 알고 보니 이것은 별것 아니고 국가의식 이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뭐 별 대단한 문제가 아니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교회가 이렇게 하면 사방으로 흩어질 테니까 교회를 흩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잠시 우리가 그냥 타협하고 나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바로 생각지 못하고 말씀의 진리를 벗어나서 교회를 생각한다는 것은 성신님에 의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성신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데 말씀으로 먼저 가르쳐 주신 다음에 확신을 주시고 확신에 의해서 그 다음에는 한 걸음을 나가게 하시는 것이지 밤낮 무엇을 자꾸 새로운 것을 알아만 보는데 치중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길에는 크고 작은 문제가 많은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자기를 인정하는가 않는가 하는 문제가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자기 앞에 있을 때 자기가 이것을 할 수 있다든지 자기가 하야겠다든지 하는 생각을 않고, 바울선생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을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한 것같이 항상 이 세상 앞에서 자기는 힘이 없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주께서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면 어떻게 할 길이 없다는 이런 절실한 생각이 드는가 아니면 그런 생각은 한때에 종교적으로 자기가 지어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하는 것이고 사실상은 자기를 믿는 자신, 그만한 것 정도야 내가 능히 이길 수 있게 다 만들어 주셨는데 하면서 자기를 하나님의 은혜 주신 것이라고 하는 핑계를 붙여가면서 잠시라도 의지하는가? 하는 이런 것이 갈림길 인 것입니다.

이런 갈림길에서 하나님의 성신의 인도를 받아서 주의를 하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의인의 길이 라는 것은 성신의 인도함을 받고 나가는 길인 것입니다. 결국 성신께서 인도해 주시는 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신의 인도를 받는 길에서 자기 마음대로 나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의인의 길이라는 것은 열매를 맺는 길인데 열매를 맺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어떻게 가르치셨는가 의인의 길과 더불어 열매 맺는 문제에 대해서 다음에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시편 1 편 (3)


시편 1편에 나타난 “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악인의 의논, 죄인의 길 그리고 오만한자의 자리라는 말이 있고 6절에 보면 ‘의인의 길’이라는 말이 또 있습니다.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 인정을 받는 길이지만 악인들의 길은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죄인들의 길’, ‘의인들의 길’ 그리고 ‘악인들의 길’ 이 있는데 죄인이나 악인이나 결국 표현을 달리한 것이지 대개 같은 종류의 사람들인데 그들의 길이 있으면 그 반대로 의인들의 길이 있어서 의인들의 길은 인정하시지만 죄인들의 길은 저희들 생각에는 그 길이 바르다고 생각 하지만 결국은 망한다는 것입니다. 잠언 14 12절에 보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다.” 잠언에 이 말씀이 두 번 나오는데 또 한번은 16 25절에 있습니다. 그렇게 죄인들은 자기의 길을 정해놓고 혹은 자기의 길을 자기의 생각하는 최선을 다해서 걸어간다고 하지만 죄인들의 길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에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각각 자기 인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생활을 하고 어떤 일을 하고 살아가는 것은, 곧 그 사람의 삶의 역사는 하나의 긴 길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각각 어떤 역사를 지어가면서 자꾸 미지의 앞을 향해서 전진하는데 이미 지나간 시간은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이 되는 것이며, 그 사람이 걸어온 길로써 짐작해서 앞으로 어디로 가겠다 하는 것도 생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가는 길은 여러 가지로 아주 다양한 길이 있지만 이 시편에서 생각하는 길은 둘 중의 하나 뿐인 것입니다. 하나는 여호와께서 인정해주시는 길로서 의인의 길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정하시지 않는 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죄인의 길, 악인의 길로 표시된 길입니다. 사람은 두 길 중에 하나에 지금 이 순간에 서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큰 두개의 보편의 길을 말씀하실 때에 마태복음 7 13 14절에서 거기에 두개의 문이 있고 그 문에 연속해서 앞으로 나가는 두개의 길이 있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3절에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다음에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여기 보면 문이 하나 있는데, 그 문은 결국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지만 그 큰문으로 들어가면 넓은 길이 있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고 따라서 크고 넓은 그 길을 걷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처음에 우리에게 명령을 하시면서 그 다음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는데 그 문은 좁고 따라서 역시 이와같이 길이 있는데 그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는 것입니다. 찾는 사람이 적으니까 너희는 그것을 알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협착한 길로 가도록 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둘 중에 하나의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과 생명, 살지 아니했으면 죽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이면 생명으로 가는 길이 있고, 그렇지 않으면 멸망이고, 멸망이면 멸망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 그리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서 보지 않으면 저 길이 과연 멸망으로 가는 길인가 아니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좁은 길을 걷는 길인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많은 사람의 걸어가는 길을 보면 이것이 넓은 길도 아니고 좁은 길도 아닌 것 같은 그런 길,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 같은 경우가 또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 자기 생각에는 이것이 바른 길이다라고 생각하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그런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자기 생각에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는 어떤 길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원을 성취하든지 자기의 이상에 도달하는 길이라든지 사람답게 고귀한 생각을 했으면 그 생각에 의해서 바른 자리에 도달케 하는 길이 이것이다 하고 사람들은 생각을 하지만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지만 필경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오직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길로 자꾸 가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길은 당연히 죄인의 길인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자기가 자기 길을 가는 것은 아담이 인류를 대표해서 맨 처음에 지은 죄의 성격인 것입니다. 그런 죄의 오염 가운데서 오늘날 자기도 자기의 선조 그 아담의 죄의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인생의 길을 선택하고 걸어가는 것인데 이런 것은 단연코 멸망의 길인 것입니다. 죄인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없는 까닭에 그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기에는 의로운 것과 좋은 것을 구하고 그리고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한 양심,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가지고 있는 하나님과 같은 하나님과 방불케 만들어 졌던 본래의 착한 심정, 의로운 것 그러한 선, 그 사람의 본성이 그렇게 착한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큰 각성을 가지고 인류와 사회와 문화와 역사를 위해서 자기가 열심히 노력하고 봉사를 해야겠다 해서 국가를 위해서 그렇게 하면 훌륭한 애국자이고 또 사회를 위해서, 인류를 위해서 그렇게 하면 훌륭한 인도주의자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세상에 많이 있으면, 있는 만큼 세상은 살기가 좋은 곳이 됩니다. 나라를 사랑한다든지 또한 사회를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인간이라는 것을 존중히 여겨서 살아가는 그런 생활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선과 아름다운 것을 나타내는 그러한 불신자들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선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불신자에게는 그것이 최고인 것입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인도애, 인류애 가운데서 인류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 봉사하고 자기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라도 인류를 봉사해나가는 그것이 이 세상에서는 우러러 볼만한 일이고 존경할 만한 일이고 하나님께서 불신자를 다루실 때, 불신이라는 사실이 거기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신자들의 의와 선과 미와 행동에 대해서 그만큼 일반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착한 사람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지 베푸시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 COMMON GRACE, 보통은혜라는 것 이것이 아니면 또 성신의 일반적인 역사, 이런 것이 없으면 사실상 사회가 바로 유지되기 어려운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착한 마음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려고 하지만 이 세상이 악해서 그 사람을 그냥 착한 그 마음대로 살수 없게 자꾸 주위의 악한 조건들이 그를 지배하게 되면 그 착한 마음을 발휘하기가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정직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그 사회 전체가 항상 부패와 타락과 불공평과 불의가 여기저기 자꾸 드러나면 자기도 다른 사람과 같이 자기를 유지하고 살려면 다른 사람처럼 불의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세상이 다 그렇게 돌아가는데 어떻게 나 혼자만 깨끗하게 살 수 있겠는가 해서 요령을 부리지 아니할 수가 없고 의롭고 정직하게 살려면 도저히 생활자체를 유지를 할 수 없게 어떻게 아무 것도 움직일 수 없게 그렇게 사회 전체가 부패와 불의와 불공평이라는 것이 강렬하게 지배할 때 그 사람은 의롭고 착하고 공정한 사람으로서 생활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가 그런 사회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아주 날고 뛰는 것 같이 야단을 내지 않고는 살수가 없는 정직하게 순진하게 일반적인 공정이라는 것이 지배하는 것으로 믿고 나가려고 하면 살수가 없는 그런 사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회가 있는가 하면 또한 비교적 사람에게 공정하게 대하고 또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비교적 정직이라는 것이 잘 지켜지는 사회가 있는 것입니다. 서구 사회가 잘 발달을 해 나갈 때 그 사회상을 보면은 차츰 차츰 사람들은 계몽주의 정신으로 사람이 다 같은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는 평등한 위치에서 같이 교제도 하고 교통도 하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사회는 발달했던 것입니다. 민주주의라는 한 사회 전체로 흐르는 한 사상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사람과 사람끼리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 서로를 존중하고 상호를 정직하게 그리고 정의가 그 사회에서 나타날 수 있게 피차 노력하는 그런 정신을 기본으로 하고서 발전해 나갔던 것입니다. 무조건 자기 권리만 주장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사회에서 살 때 사람은 의롭고 공정하게 살수도 있고 남을 위해서 봉사하고 자기를 맡기고 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서양의 역사 가운데는 때때로 그런 의로운 사람들이 있는 것을 잘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런 길을 걷지만 그것은 사람들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것이 최선의 최고의 길이지만 그리고 많은 신자들은 거기에도 도달 못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보지만 남을 위해서 봉사하겠다는 그런 정신조차 아주 없는 자기만 어떻게든지 복을 받되 사람을 이용할 뿐 아니라 이번에는 하늘의 힘을 이용해서라도 복을 받았으면 하고 그래서 종교를 열심히 하기는 하지만 자기 종교로 열심히 거기에 도취하기까지 하지만 일단 사회적인 활동이나 한 시민으로서 의식을 보면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한 연대 책임감이라든지 혹은 봉사의 의식이라는 것이 도무지 결핍되어 있고 거짓말이라도 하고 속여서라도 혹은 그렇지 않으면 뇌물이라도 주어 가면서 자기만의 행복을 어떻게 하든지 얻어 보겠다는 이런 경우를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신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지금 말한 그런 악이 아닐 뿐 아니라 인도주의자의 고귀한 인도적인 정신의 발휘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표준은 그런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높은 표준을 세워놓고 이것해라 하고 요구하신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자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새사람으로 새로 지으신 까닭에 새로 창조된 사람과 같은 덕성을 발휘하고 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항상 옛 사람적인 그런 의와 선을 발휘하고 살아라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요구하는 것은 세상에 있는 인간적인 의와 선이 아니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의와 선은 그 자체가 항상 결핍이 있고 이지러져서 그것으로 결국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를 대표할 수 없고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너희들은 새로 지어서 새로운 창조물로 땅에 두어서 중생과 신생의 새로운 생명이 너희 속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발휘되었을 때 너희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지체로 그리스도적인 품성을 발휘 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자기의 의무를 행하고 각각 개인에게 준 특별한 은사에 의해서 특별한 사명을 행하는 책임을 잘 이행함으로 땅위에서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는 나라, 거룩한 통치의 사실이 어떠한 것인가를 세상 앞에 증시를 하고, 증시하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결국 이 세상에 최종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어야 할 큰 사실인 것을 미리 예표하고 나타내라 하는 그것입니다.

이것이 주께서 가지신 큰 경륜으로 궁극적으로는 다 그것이 완성하는 위치로 올라 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충만한 영광, 완성된 하나님 나라 자태의 충만한 그것을 이 땅에 있을 때 벌써 시작을 하고 나타내고 살아라. 그렇게 하기 위해서 너희에게는 성신님이 내주 하시고, 모든 은혜를 필요한 때 필요한 대로 늘 내려 주셔서 땅위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하나님이 다스리는 백성이라는 것,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것, 하나님 나라의 그 영광을 입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류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고 구원의 은혜 가운데 들어오게 하시려고 하는가를, 복음사실을 증거하고 살아라 하신 것입니다. 성신님이 너희에게 임하여 권능을 얻으면 너희가 내 증인이 된다 하신 말씀대로 증거를 하고 살아라 그 말입니다.

이렇게 큰 은혜 독특한 아주 하늘에 속한 여러 가지 은혜와 은사를 주셨고 그런 생명의 약동을 우리에게 주신 까닭에 누가복음 12 48절 말씀대로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다. 너희는 많이 받고 많이 맡았으니까 내가 많이 달라고 하고 그리고 많이 찾을 것이다. 너희에게 요구하는 덕성이란 타락한 인간의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이 부패하고 타락한 인류의 심정 그러나 이지러진 하나님의 형상일지라도 그것을 희미하게 나마라도 유지해서 인류의 인도적인 정신과 인류에 대한 봉사와 나라나 사회를 사랑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대해서 복지를 도모하는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사는 그것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 이상이 없으니까 불신자에게는 불신자라는 사실 때문에 그것을 용인하시고, 거기에 일반 은혜를 더 베풀어주시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살수 있게 하시고 살 수 있는 그 사회에 하나님의 백성이 있어서 그 하나님의 백성이 유지하고 살도록 조장을 해 주시며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세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 안에 건전하게 건설된 사실이 자꾸 증명되는 것을 돕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역사의 의미이며, 이를 다스리는 권능의 왕이 그 권능을 가지고 이 땅위의 사람들이 그래도 일반은혜 가운데 살도록 자꾸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정부도 의로워야 하고 언론도 의로워야 하고 사람들의 교제도 의로워야 하고 그 의로운 법 아래서 법을 무서워하고 살도록 하나님께서 권능의 왕으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잘 나타내는 정부는 그 만큼 더 훌륭해지는 것이고 그런 것들을 잘 나타내는 언론이라는 것은 그 만큼 더 훌륭한 것이고, 그런 것을 바르게 자꾸 전달하면 그런 여러 가지 전달은 그 만큼 복스러운 것입니다.

그렇지만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사회에서 그 사람들과 함께 일반적인 공리와 대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그 독특하게 경영하시는 그 은혜의 왕국에 은혜의 사실과 영광의 사실을 이 땅 위에다가 자꾸 증거해서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그리스께서 오심으로서 영광의 충만한 위치에 올라 그때 완성할 것으로 하고 그 완성을 위한 그 큰 일을 우리에게 맡기시고 지금 전진을 해 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계관 가운데에서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나타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영광과 의의 내용들인 까닭에 결코 세상의 인류애나 인도애 정도로서 그것이 증시되지 아니 하므로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높은 도덕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이 원칙대로 신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의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신의 열매, 빛의 열매를 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타내는 의라는 것은 옛사람의 의가 아니라 새사람의 열매를 나타내라는 것이 성경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성신의 힘 주심과 또 그 인도하시는 의인의 길이라는 길을 걸어가기를 바라시는 것이고, 이 의인의 길과 죄인의 길을 왔다 갔다 하면서 방황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들에는 다양의 길들이 있지만 크게 나누면 첫째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자행자지하고 자기 마음대로 가는 사람의 길이 있고,  둘째 불신자일지라도 사람의 최고의 의나 선을 추구해서 그것을 따르고자 고통과 희생과 괴로움도 개의치 않고 나가는 그런 훌륭한 이 세상 사람들의 길도 있으며, 셋째로는 세상의 정욕과 인간의 대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어느 때는 자기 욕심을 찾고 돌아다니다가 어느 때는 또 사람의 대도를 따라 가야지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바른 길을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자들 중에도 어느 때는 좀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좀 해 보겠다고 하다가 또한 그것이 얼마 못 가서 그것을 버리고 자기 욕심의 지배를 받아서 질질 끌려서 또 가기도 하고 요컨데 성신의 충만한 지배와 주장을 받지 못했을 때에 내가 마음에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좋은 것을 원하지만 내 속에 있는 다른 법을 보는데 그것은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7:21-23) 나를 잡아 가지고 내가 원치 않는 길로 끌고 가는 것이라고..... 이렇게 해서 이 길로 저 길로 방황을 하는 것입니다. 신자라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신자가 온전히 성신께 다 맡기고 성신의 충만한 역사로 그의 가르쳐주심과 손을 잡고 인도하시는 그 길을 걷지 않으면 의인의 길을 걸을 수 가 없는 것입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신자들 중에는 의인의 길과 의인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방황하는 그렇게 넘나들면서 사는 그런 사람, 결국 그 인생의 길이 장기간에 의의 길 하나로 일관하지 못하고 가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한 신자가 경건히 살고자 하면서도 의인의 길을 걷다가 넘어지고 거기서 벗어나서 방황하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많이 다 이런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순간도 변함없이 성신님만을 의지하고 신령한 생활만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것입니다. 가령 성자라고 하더라도 베드로 같이,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아문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던 것처럼 그렇게 넘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잠시라도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가 의를 나타내 보이겠다고 하는 동안에는 심히 위험한 상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신자의 길도 일생동안 끊임없이 의인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고 정도를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일생의 방향과 그의 전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인의 길에서 현저하고, 그 사람의 생활의 길을 보면 한때는 넘어지기도 했지만 그의 생활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성격은 역시 의인의 길이라고 할만한 이런 생활이라는 것이 바람직한 생활이 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 목표로 세울 것은 잠시라도 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바로 의인의 길만 걷기를 원할 것입니다. 잠시라도 성신을 의지하는 생활에서 떠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다 그렇지 못하고 성신을 의지하는 생활이 긴 사람도 있지만 얼마 못되어 가지고 다시 다른 길로 방황하는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우선 일생 생활의 행진의 자취를 바라볼 때에 성신을 의지하고 의인의 길을 걸은 그 시간이 가장 많아서 그것이 결국 그 사람의 일생의 생활의 길의 특성이 된다면 그를 의인의 길을 걷는 사람이라고 평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시편 1편에서 의인의 길이라고 할 때에 어떤 사람이 일생 변함없이 의인의 길만 걷는 사람만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의인이라고 한다 할지라도 항상 인간적인 연약이 있는 까닭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에 반드시 늘 도달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의인으로 확실히 이야기한 사람을 예로 들면 그 생애를 비교적 많이 알 수 있는 사람도 있고 알 수 없는 사람도 있는데 예를 들면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고 했지만 우리가 노아의 생활을 자세히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교적 생활의 기록이 좀더 나타나 있는 사람으로 의인으로 칭함을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 6:9, 18:23)   

그러나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활을 돌이켜 보면 아브라함이 반드시 의인의 길의 그 대도에서만 걸어간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갈을 얻은 일을 볼 때는 그 당시의 도덕으로서는 크게 비난받을 일은 아니었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언약을 입어 보겠다고 하갈을 그것도 사라가 권고해서 얻었는데 그런 것이 그 당시의 사회상 도덕상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엄격하게 생각 할 때 그것이 결국 대도를 걷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이 인위적인 어떤 방법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뤄 보겠다고 하는 것은 얼마만큼 사람이 어두움 가운데 있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일부다처를 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이뤄 보겠다 하나님의 뜻이 결국 일부다처에 의해서 나타내야겠다고 하는 그런식 해석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칙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령 이삭을 드리는 가장 훌륭한 신앙적인 행동을 하는 시간일지라도, 이삭의 인권에 대한 고려가 없는 그 사상이라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공의, 대도를 걸어가는 그런 사상적인 행동은 아닌 것입니다. 그것을 미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는 가상하게 신앙을 발휘했지만 그러나 그 신앙은 그의 가지고 있는 그 당시의 제한된 사상의 터 위에서 움직였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리아 산에 이삭을 드리게 함으로 말미암아 그에게 사상상 큰 비약을 하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결국은 그를 이끌어서 당대의 사람들의 생각에서 훨씬 벗어나는 천국적인 사상을 터득 할 수 있게 하시지 아니했다면 아브라함이 스스로 거기 도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도라는 것은 항상 그런 고귀한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이라는 것은 그 방향이 항상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방향이 하나님을 향해서 자기가 못났을 지라도, 힘이 없을지라도 혹은 절름발이 일지라도, 거기를 향해서 자꾸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의인의 길을 그 사람은 걷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생의 방향과 전진의 사실이 의인의 길에 속한 사람이라고 할만한 현저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이 바람직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죄인의 길, 세상의 길로 잠시 갔다 나온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생활에서든지, 전체적으로 볼 때 결국 하나님을 향한 행진을 일생 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갔구나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의 길인 것입니다.


시편 1 편 (2)


시편 1편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확연히 대조 되어 있는데, 그 하나는 행복스런 사람 즉 의인이라는 말로서 표시를 했고 또 하나는 악인, 죄인, 오만한자 이런 이름을 가지고 표시하는데 그것을 대표적으로 쓰는 말은 악인이라는 말입니다. 4절에 "악인은 그렇지 않다" 해서 악인이라는 말을 대표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행복스러운가 하는 것을 시인은 노래하는데 물론 그것만이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시편 1편에서는 특별히 세 가지 하지 않는 것과 두 가지 하는 것을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복의 개념을 이 세상 사람이나 옛날 고대의 헬라사람들을 위시해서 인류에게 끊임없이 내려오는 소위 행복주의와는 다르다는 것을 지난시간 생각했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복, 즉 산상보훈에서 복이 있다 하는 말이나 여기 이 시편 1편에서 복을 이야기 할 때 그 복이라는 개념을 주의해서 바로 생각하지 않고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행복, 그리고 쾌락 자기 정욕의 만족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항상 개인이 하나님 앞에 복을 받고 산다 하는식 생각을 하기가 쉬운데 이것이 교회 안에 많이 영향을 주고 있는 현실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보더라도 큰 교회 같으면 사람이 많이 모이니까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이 많이 섞여 있을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을 모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대로 이 장소에 와서 자기가 하나님과 교통해서 은혜 받으려고 온 것이고 본인은 본인대로 내가 또 하나님 앞에 교통하고서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겠다고 하는식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교회의 회중 즉 성도의 거룩한 교통 이라는 의미는 별로 없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어떤 일정한 장소에 목사가 예배를 집행하고 있으니까 거기에 따라서 나도 예배를 하고 복 받고 가겠다 하는 정도의 생각이지 자기가 교회 회중의 한 분자로서 이 회중을 형성시키는데 자기는 자기의 부분이 있고 자기의 해야할 것이 있다는 생각이 희미해서 생각하는 것이 개인주의적인 것, 개인적 행복추구라는 점에 맴돌고 있고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일이 많은 것을 주위에서 보게 됩니다.

또한 선행을 한다 할 때라도 자기 개인이 아주 거룩해져야하겠다. 도덕적으로 완성의 경계를 향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나가겠다 하는 정도의 생각에서 늘 맴돌고 있지 자기가 왜 이 선행을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자기 개인의 도덕적 완성이란 것을 떠나서 별로 무엇을 생각하는 일이 적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안 믿는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선을 행하면 이렇게 함으로서 자기도 좋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한테 그 만큼 유익을 끼칠 테니까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혹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사회의 복지를 위해서 나는 이렇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사회에 그 만큼 봉사를 하고 기여를 하고 하는 것을 우리가 보지만 오히려 많은 기독교인의 경우에는 생각을 거기까지도 하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시편 1편을 보면 개인의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이 복 있는 사람은 이렇다하고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이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그러한 잠재의식이 있든지 혹은 선입관이 있든지 또한 그런 견해를 가졌으면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복 있다 하는 것이 결국은 나 개인의 도덕적인 완성이라든지, 나 개인이 하나님과 긴밀한 교통을 가져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고 그리고 칭찬을 받고 그렇게 살아가는 결국 생각이 자기 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로 다 끝내고 마는 이런 생각을 우리가 참으로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신앙생활에서 장성을 하지 못할 때에는 항상 그 신앙이 개인적인 것으로 그치고 교회의 한 분자로서의 교회아의 의식, 내가 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편교회의 지체 안에서 비로소 존재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며 개인의 존재의 의미도 그런 교회 안에서 가지는 것이며, 구원도 교회 안에서 비로소 가지는 것이다 라는 이런 생각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내가 그의 지체라고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의 연결에 의해서 지체가 된 사실을 떠나서 구원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었으면 나만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자가 거기 연결되어 있어서 하나의 거룩한 신령한 몸을 이룬다는 이 큰 원칙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원래 우리가 구원을 받기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어있어서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가치로 인정을 받을 존재가 아니었지만 그 존재의 가치가 인정되는 시간은 그리스도와 연결되어서 거룩한 그 신령한 몸의 한 분자가 된 까닭에 받은 것인데, 이렇게 하나님 앞에 살았다고 인정을 받는 것도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고 생명이 연결되어 있는데서만 받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생명의 연결이라는 것을 나 개인이 그리스도 안에 붙어 있으면 그만이다 하는 심히 부족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신령한 새 몸을 이루실 때 나 하나만을 대상으로서 이룬 것이 아닙니다. 원래 그리스도께서 그 신령한 대상을 이룰 때에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모든 자를 그 거룩한 생명체에 소속하게 한다는 이 전제하에서 하시는 까닭에 나를 하나의 완성품으로서 그리스도와 나와 연결되어 있으면 그것으로 더 바랄 것 없이 완성한 것이다 하고 만들지를 않았습니다. 다른 모든 지체가 와서 붙어 가지고 신령한 몸을 이루기까지는 완성이 없는 까닭에 그런 나를 향해서 날마다 성전이 되어서 지어져 가는 것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 2:20-22)

이렇게 명백히 가져야 할 사상은 철저한 개인주의가 아니고 행복스럽던지 또 하나님 앞에 유용하던지 간에 개인주의적인 사상에 근거해서 생각할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생명의 일체를 이룬 거룩한, 신령한 몸, 전체의 한 부분으로서의 나의 의미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전체가 완성하기까지 철저한 의미로 완성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러한 사상의 그 견지에서 시편 1편이든지 어디든지 대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뿐 아니라 시인은 시의 형태로 표현을 해서 그것이 서술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여기에서 하나의 사회적인 사실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을 주의해서 보면 소위 하나가 아니고 복수로서 쓴 것들이 여러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원문의 단수 복수를 정확하게 표시해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복 있는 그 사람들은 영어 같으면 ‘the man’으로 소위 말하는 대표 단수로서 복 있는 한 그룹의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악인들의 꾀라고 할 때는 꾀는 단수이고 그 꾀의 출처인 악인은 복수입니다. 어떤 한 악인의 의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죄인들의 길에서는 길은 단수고 죄인들은 복수입니다. “오만한자들의 자리에서는 자리는 단수이고 오만한자들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수에서 그것이 소유하고 있는 어떤 하나, 그것은 공동의 소유이고 그리고 그것은 보편의 한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의 악인들의 사회가 있고 여러 사람이 만들어낸 사회의 의논이라면 그것은 '공동의 의견' 즉 공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들이 다 그렇게 공통으로 보편적으로 생각해 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꾀를 쫓지 않는다 할 때도 어떤 한 악인이 괴상하고 비상한 꾀를 내서 그대로 하자 하는 그런 식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악인이라고 규정한 자들에게 있어서는 누구에게나 공동으로 보편적으로 다 지지하고 그렇다고 하는 그런 사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수 단수를 분명히 하면 의미가 더욱 분명해 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2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에서는 나무는 단수이고,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여기라는 것은 복 있는 사람 한 개인을 의미하는데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뽑힌 한 사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선택받은 한 사람, 그 사람을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4절에서는 그 악인들은에서자라는 말은 꼭 어떤 것을 지정한 것 보다도 너희들 생각하고 있는바 소위 악인의 모든 수, the evil man이든지 the wicked 이렇게 말할 때에는 결국 악인의 총수를 대표적으로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의미에 있어서의 the wicked, 그 악인들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그러므로 악인들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회중에서 회중이란 congregation, 그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결속이 되어있는 자리인데, 그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회중이란 말은 구약에서 사용된 말인데 70인역에서는 교회라는 말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예배를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하나인 것을 의식하고 모여있는 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여기도 의인들의 길, 악인들의 길, 할 때 길은 단수이고 그 앞에 있는 형용사는 복수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 시의 정신으로 볼 때, 복 있는 사람의 행복이라는 것이 결국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때 그 사회적인 성격이라는 것을 항상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시적인 표현으로서 명백하게 사회적인 성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시인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사상이 이런 문장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그러나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한다의인들의 회(에다), 또 의인들의 길 이러한 말로서 거기 또 역시 보편적인 어떤 사실, 공동의 사실을 표시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시편을 읽을 때 첫째 하지 않는 3가지가 있는데 악인들의 의논이나 사상이나 의견을 다만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비판하고 그것을 취할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그리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이성이란 것, 사람의 지적 작용이라는 것은 악인의 사상과 가치관을 취할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위험한 것이다 옳지 않은 것이다 생각하고 그것을 판단을 해서 포기를 하지만 그리고 포기하는 까닭에 그 의지도 분명히 그의 바른 인식에 의해서 악인과 같이 움직여 나가지 않고 그리로 행치 않는데 그러면 그 사람의 감정은 이런 때 어떤 상태인가? 물론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 하는 것을 보면 그가 즐거워하는 것은 그 악인들의 사상이나 주장이 아니고 여호와의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율법에서 기쁨을 얻고 그것을 연구함으로 그 세계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차츰 차츰 더 탐구하고 터득해 나가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여타의 악인들의 사상이나 주장이나 그러한 것들이 그에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지,,의가 정당하게 움직이면 그런 사람이 참으로 행복스러운 사람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하나님 나라의 사상을 형성하는데만 그런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의 길을 결정을 할 때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 자기네가 어떠한 길로 인생을 걷고 있어야 가장 유리하고 행복스럽다고 생각해서 자기 인생의 행복을 찾아서 유리한 길을 생각하고 모두가 같이 인정하고 그래서 따라서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성격의 길을 죄인들의 길이라고 하는데 그런 죄인들의 길에 서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어떤 길에 서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그 길을 걸어왔고 그리고 앞으로도 지금 서 있는 길에 서서 계속 걸어가겠다는 것인데, 복 있는 사람은 그런 성격의 길로 걸어온 것도 없고 앞으로 그리로 걸어 갈 사람도 아니란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인생의 길이라는 것은 별달리 있어서 걸어가는 길이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서의인의 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은 인정하신다는 것인데 그 의인들이 가는 길이 당연히 있는 것입니다. 어떤 한 개인이 자기 일생의 길을 어떻게 갔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고, 모든 하나님 앞에 복을 받은 의인들은 어디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것은 좁은 문으로 가고 험한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걷는 것입니다.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많은 사람들이 그 길로 가지만 그리고 그것이 죄인들의 길이지만 생명을 향한 길이란 좁은 길이지만 의인들의 길이며, 생명의 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오만한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해서 오만한자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자리가 있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한 의자의 자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집단적으로 사람이 살고 생활하는 터전을 의미하는 것인데 즉 "모샤브"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오만한자들의 그 거처에 같이 가서 그 세계에 거주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인의 길로 가다가 보면 오만한자의 자리, 그런 세계에 도달하겠지만, 복있는 사람은 그러한 그릇된 의견도 안 듣고 그리로 가지도 아니 할뿐 아니라 죄인의 길에 서서 결국 오만한자의 자리에 이르는 그런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계시다 하더라도 인생의 길은 우리가 스스로 경영해야 한다. 나는 내가 내길을 정하고 내가 할 일을 내가 한다. 우리가 행복을 추구해야하고 우리가 복리를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나 개인의 복리뿐만 아니라 남의 복리까지라도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최대 다수의 행복을 위한 노력을 한다면 그것이 최고의 선이 아닌가. 이런 철학, 이런 생각 가운데서 사람은 노력을 하게 되는데, 그러한 사람들은 인간이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한번 진노하시고 사람이 범죄로 말미암아 받는 이 비참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현상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그러한 기본적인 사실을 무시하고 인간이 노력해서 무엇인가를 행복스럽게 만들 수 있는 것 같이 생각하고 혹은 적어도 그런 희망을 주는 까닭에 그런 주장을 자꾸 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는가 그 진노에서 벗어나기 전에는 어찌 할 길이 없는 것이라고 이렇게 생각을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자기가 인간의 행복을 추구하고 건설하겠다는 노력을 하지만 참으로 깨달은 사람이라면 현재의 이 비참하고 괴로운 현실이란 것은 무엇이 원인이고 그 원인은 그대로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을 기본적으로 바로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기본적으로 생각하면서 자연히 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 할 때 자기 개인과 동시에 사회라는 것을 생각할 수 밖에 없듯이 의인들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율법을 주야로 묵상을 하는데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로 어떠한 세계를 추구하고 사모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어떠한 마음자리와 생활 행동을 가져야 할 것인가를 개인적으로도 알고 그리고 자기 개인에게만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으로서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세계가 거기 건설 되어야하고 어떤 여러 사람의 사회가 거기 전개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사회가 바로 전개되고 바로 건설되고 바로 나타나기 위해서 나는 내 부분이 있다 하는 것을 비로소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열매를 맺을 때 그 열매에 필연적으로 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성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열매가 자기 개인의 선한 행실로 끝나는 정도라면 이 시의 의미가 바르게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항상 이 시가 가지고 있는 그 정신, 기저의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항상 드러내는데 행복스러운 사람의 참된 행복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주의해서 생각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