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December 9, 2011

하나님 나라-양용의

예수님 당시의 하나님 나라 개념 이해

1:15절“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가복음의 처음 시작이 세례요한이 어떻게 사역을 시작했는지에 대해서 소개한 다음에 곧바로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 받는 장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른 복음서들과 달리 곧바로 광야에서 시험받는 사건을 12-13절에서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후에 예수님이 공생애의 첫 일설로 15절 말씀이 사용되고 있다. 14절에 보면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그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냐면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것이었다. 마가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분으로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포의 가장 중심적인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였다는 사실을 이 마가복음 1:15절을 통해서 확실하게 전제하고 그 복음서를 시작하는 것이다.

4복음서 전체에서 하나님 나라 하늘 나라라는 말은 124회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만약에 공관복음에서 동일한 말씀이 공관복음에서 두세 번에 겹쳐서 나타난 결과들을 한번으로 계산을 한다면 겹친 경우를 제외했을 때 61번에 걸쳐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반해서 복음서를 제외한 나머지 신약성경을 통해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36회밖에 사용되고 있지 않다. 그런가하면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 그 이전과 그 이후에 쓰여졌던 유대교 문학들에도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그리 흔하게 사용되지 않는 표현이다. 그렇게 본다면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특징적으로 사용한 표현이였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의 핵심적인 내용으로서 바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그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 보이셨는데 그렇다면 이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단어 혹은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복음에 가장 핵심적인 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통계적으로 보아도 복음서들의 구조적으로 보아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도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개념이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이해되어져야 할 것이다.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그려보고 계십니까? 그 하나님 나라는 어떠한 하나님 나라입니까? 그 하나님 나라를 20세기 한국인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될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그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던 1세기 당시 유대인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될지 그러한 부분에 대해서 저희들은 고민을 해 보아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하지 않는다면 복음서들에 나타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러가지 가르침들을 그저 우리의 생각으로 예수님의 원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저 우리의 선입견과 우리의 전통과 우리의 아집으로 그 내용을 잘못 이해할 수 있는 위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하나님 나라라는 것이 예수님 자신에 의해서 어떻게 사용되었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와 예수님이 사신 팔레스틴과는 지리적 거리가 있고 시대적으로는 2000년에 가까운 기간이 있고 그리고 예수님이 사용하셨던 언어와 우리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예수님이 사용하신 그 하나님 나라 개념과 다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다른 간격이 있는 부분들을 우리가 과거로 돌아감으로 좁혀 보자는 것이다. 완전한 일치를 우리가 이룬다는 보장이 없을 지라도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문헌들과 구약에 나타난 그 개념들의 가능성들을 점검해 보므로 하나님 나라의 폭을 예수님 자신이 사용하였던 개념으로 되돌려 가는 작업들을 우리가 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먼저 그런 작업에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서 예수님 당시에 일반적인 유대인들이 어떤 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고 있었는가? 라는 점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라고 했을 때 하나님과 나라라는 두개의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알 것이다 문제는 나라의 개념이다.

이 나라라고 하는 개념은 히브리어로는 말쿰, 헬라어로는 바실레이아라고 하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히브리어의 말쿰이란 헬라어의 바실레이아는 두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중 드물게 사용되는 의미가 영역 영토라고 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에 반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헬라어의 대부분의 문헌들은 사용된 의미가 통치 왕권의 행사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레미아스의 신약신학97페이지 이하를 살펴보라. 아마도 우리 한국인은 “나라”라 했을 때 모두 영역이나 영토로 생각한다. 과연 이런 개념이 유대인들에게도 일반적인 개념 이였는가? 전혀 그러지 않았는지는 몰라도 대개의 경우는 그렇치 않았다. 모든 유대인들에게 물어보아도 오늘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헌들에서 살펴볼때는 이 말쿰과 바실레이아는 주로 통치한다 왕권을 행사한다는 역동적인 개념과 관련되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사용한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을 이해할 때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단2:28절에 보면 한글개역에 “다리오왕의 시대에”라는 표현이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본역하면 다리오왕의 치세 때에, 다리오가 왕권을 행사하고 행사하고 있을 때에 라고 번역하는 것이 바르다. 그러나 말쿰의 히브리어 단어는 결코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성취 되어가는 과정으로서 이해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통치하심은 공간적이거나 정적인 개념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역동적인 개념인 것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말에도 하늘이 두 가지 의미 공중과 하늘(하나님의 거처)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우리는 하늘 하면 하나님 거처보다도 공중을 생각한다. 저 파란 하늘 저게 아마 천국과 관련된 무엇이 아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나 싶다. 실제 한국 교회도 이런 부분에 많이 젖어있었다. 이 천당이라는 개념은 천국보다도 더 공중의 어떤 영역으로 거기에 지어진 우리의 집으로 생각하게 하는 그러한 문제들을 야기해 왔다.

과연 하늘 나라와 하나님 나라 천국은 동일한 개념인가? 다른 개념인가? 하늘 나라라는 개념은 마태복음에만 나타난다. 그럼 왜 이 하늘 나라라는 표현이 마태복음에만 사용되고 있을까? 과연 마태복음의 하늘 나라와 누가, 마가 복음에 사용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가? 구별된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가? 마태복음에 나타난 하늘 나라의 구조가 두 공관 복음에서 사용되고 있는지를 대조를 해볼 경우에 우리의 결론은 분명하다. 마태복음은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 하늘 나라로 사용한 구절에서 하나님 나라로 대치한 구절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마태복음에서는 마가, 누가 복음에서 사용한 모든 구절에서 하늘 나라로 대치해서 사용하고 있고 단4경우에 있어서만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고수하고 있다. 즉 마가복음과 누가 복음에서 하나님 나라는 마태복음에서 하늘 나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두 가지 경우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마태는 이 하나님 나라를 하늘 나라로 대치해서 사용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 마가복음의 하나님 나라와 마태복음의 하나님 나라를 대조해 볼 수 있는 경우들을 몇 가지 소개하겠다. (5:3.과 눅6:20,8:11,13:28.4:17과 막1:14-15) 세 복음서에 다 나타난 경우는 마19:14,과 막10:14, 18:16. 그리고 가장 대표적인 경우는 마13:11과 막4:11) 그럼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를 사용했을까 하나님 나라를 사용했을까 하는 문제다. 여기서는 에레미야스의 신약신학 97페이지에 보라 예레미아스는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원래 사용했을 것이라고 하는 것으로 본다. 그 반대로 보는 분은 게르할더보스의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책27-31페이지까지를 비교해서 살펴보기를 바란다. 보스는 예수님이 하늘 나라를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예레미야스의 의견을 보다 타당하다고 생각한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라고 사용했는데 마태가 그것을 하늘 나라라고 바꾸어 사용했다. 라는 입장을 따를 경우에 과연 왜 이런 변형을 마태는 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 본다. 마가복음과 눅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해서 쓰여졌다. 그러나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해서 주로 쓰여졌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쓰여졌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를 하늘 나라로 바꾸어야만 했을까 하는 질문을 또 한가지 던져볼 필요가 있다. 그에 대한 하나의 가능성으로서는 유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쉽게 사용할 수 없는 호칭 이였다. 우리 나라 사람도 아버지의 이름을 이름자 그대로 부르지 않는다. 함자를 붙여서 부른다. 그런데 유대인도 하나님을 부르는 것을 꺼려서 대신할 수 있는 어떤 호칭을 필요했는데 그 호칭이 하늘이라는 호칭이다. 왜냐하면 하늘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그의 성전을 지어 놓고 하나님이 이 우주 공간에 들어올 분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하늘은 이 우주 공간을 두고 한말이 아니다. 이 피조물의 세계를 뛰어넘은 하나님의 차원의 세계를 이야기할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하늘과 공중은 분명히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처로서의 하늘을 생각하는 가운데 하늘 하면 하나님과 가장 긴밀하게 연관되는 개념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예로 누가복음 15: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누가는 여러 복음서의 자료들을 활용하여 그대로 보존하려고 노력한 사람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한다. 누가는 하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이 탕자의 비유와 관련해서는 그 호칭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여기서의 하늘은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 아들은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다. 이 하늘은 하나님을 대신 부르는 통상적인 호칭으로 추정될 수 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  보다는 하늘 나라에 더 평안한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그들은 하늘 나라 하면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했다.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하늘 하면 공중으로, 나라 하면 영토로 생각했을 때 여기에 하나님의 개념은 쏙빠져 버린다. 그러면 우리가 갈 어디로 가서 살영역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퍼시콜레의 말이 먹혀 들어간다. 이것은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공간적인 차원의 어떤 영역으로 오해하게 되는 그런 문제점을 야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의 하늘은 어떤 우주적인 공간적인 어떤 차원이 아닙니다. 이 하늘은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과 연관된 것이다. 이 두개를 잘 정리하지 않으면 잘못된 곳으로 빠진다. 이 하늘은 공중을 말하지 않는다. 분명히 하나님을 의미한다.

또 하나는 나라라는 말인데 유대인들이 별로 사용치 않았던 영토적인 개념으로만 우리가 이해한다면 보다 일반적이고 보다 적절한 개념인 통치의 개념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그러한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래서 저는 마태복음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천국을 읽을 때마다 그것을 천국이라고 지나치지 말고 우리가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인위적으로라도 이 하늘을 하나님으로 대체시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나라를 영토적인 것보다 통치적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작업을 하는 것만이 마태복음에 나타난 천국이라는 개념을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질문의 답,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개념 설명아까 제가 하늘의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다. 하나는 공중의 의미 우주적이고 공간적인 의미가 있고 하나는 그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거처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다.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아주 적절한 의미이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있는데 그 하나님이 계시는 곳은 공간적인 제한을 받지 않는 하나님의 차원의 거처라는 사실이다. 그것이 우주 공간에 들어가 계시는 하나님으로 우리가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어떤 피조물보다도 작고 피조물보다 제한된 모습으로 이해해야 한다. 저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시는 곧은 이 우주 공간적인 그러한 거처가 아니고 그 우주 공간의 차원을 뛰어넘은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우리의 상상력과 이해력으로는 온전히 파악할 수 없는 그러한 차원의 하나님의 거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했으니 우리가 부인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지만 그 하늘의 개념이 우주 공간의 어떤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거처의 개념으로서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하고, 그 하늘이라고 하는 개념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과 연관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개념으로 유대인들에게 이해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늘은 분명히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그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하늘을 유대인들은 완곡 어법으로 불렀다. 애인들이 남편을 오빠, 선생님, 자기라고 부르지만 서로 알아듣듯이 말이다. 유대인들은 십계명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했기에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하나님과 연관된 하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불렀다. 따라서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하늘에 계신 이라는 말 자체는 아주 적절하고 당연히 우리가 이해해야 할 그런 표현이다.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그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 우주 공간의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질문2. 우리가 나라라고 말할 때 영토 국민 주권이라고 생각하는데 대해? – 이 개념은 17세기 만해도 존재할 수 없는 그럼 개념이다. 왜냐하면 옛날에 나라의 개념 속에 제일 중요한 것은 왕이다. 그리고 왕밑에 신민이 있을 뿐이다. 주권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왕권만이 있을 수 있었다. 왕이 다스리는 것이지 국민들 스스로가 다스린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 국가의 3요서는 제가 이해하기로는 민주주의가 형성된 이래로 국민에게 왕의 권한을 돌려주는 그러한 차원에서 국민이 주권을 갖는다 해서 왕권을 대체하는 것이 주권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가 지금 20세기의 국가관을 가지고 이 나라의 개념을 이해해서는 안된다. 영어에서 나라라는 자체가 kingdom인데 이것은 왕이 다스리는 개념이 확실하게 나타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야기하는 나라라는 개념은 옛날에는 나라 하면 임금에게 있었다 그래서 나라님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조 시대의 개념이라면 쉽게 이해 될 수 있다. 오늘날 민주국가에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늘날은 통치자의 개념이 상당히 약화되어 있다. 바실레이아라는 개념이 통치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문헌상으로 보아도 거의 찾을 수 없다.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토라는 개념으로 생각하기에 설명한 것이기에 유대인에게 이런 강의한다면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구약적 배경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오셔서 하신 일이 구약을 성취하러 오셨다. 구약의 모든 것들을 성취하러 오셨다. 예수님은 구약의 어떤 것을 바꾸어서 자기 스스로 하신 것이 없으셨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이룬다고 한 것은 이미 구약 시대에 구약의 백성들을 향해서 선언되었던 그리고 예언되었던 그러한 내용 들이였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할 때 구약에 대한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 이해가 정상적으로 보기에는 참 어려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도 이 구약에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배경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를 이해를 함으로서만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바로 이해할 수 있다. 나라라는 말은 통치의 개념이 주된 개념이지만 영토의 개념이 배제되지는 않았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영토가 그렇게 중요한 개념이 아니였다는 것을 더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구약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 당시의 문헌들이 그렇게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통치 개념이 두 가지 표현 방식이 있었다, 시대에 있어서 현재와 미래 두 가지 개념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이 시대에 지속되고 있는  하나님의 통치 그것을 하나의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으로 이해했고 또 다른 하나는 새로운 시대에 있게 될 미래의 하나님의 통치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이야기할 때는 이 현재적인 의미와 혹은 진행적인 의미와 미래적인 의미로 생각했다.

하나님의 현재적인 통치
47:2절이하, 99:1절이하 단 4:34이하 이런 곳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이루어지고 있다. 구약 시대에도 이미 하나님의 통치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시편 기자들이 선지자가 예언하고 찬송하고 있다. 99:1절 이하“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도다…(3)” 여호와께서 만민을 통치하고 있는 것을 시편 기자는 찬송하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완전하고 우주적으로 인정될 하나님의 통치
24:21-23,52:7-10.14:9-20,2:44 이런 곳들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때에 이르면 범우주적인 통치를 이루게 될 것을 이야기하는데 사52:7-10. 이 문맥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앞으로 이 시온을 구속하실 것인데 그때에는 어떤 일이 일어 날것이라는 말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말한다.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 이말은 현재 일어난  말이 아니고 시온이 구속을 받게 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치게 될 환호의 소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때에는 여러 가지 우주적인 사건들이 일어 날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말라기서에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로 말하는데 이날은 하나님이 통치를 시작하실 때를 두고 한말이다. 참고적으로 유대인의 매일 기도문 중의 하나인 카드쉬는 “그가 그의 말쿰을 그의 생전에 아주 가까운 시기에 이룩하시기를” 하는 기도문이 있다.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통치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모든 민족의 창조주이시다. 그러나 민족들이 그를 멀리 떠나 버렸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그의 왕국을 다시 제공해 주었을 때 이스라엘만이 그에게 복종하였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셨다. 이것은 유대인의 문학에 나타난 하나님이 통치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 준 것이다. 이 왕국은 율법에 나타난 왕의 뜻을 실현함으로 성립되었고 그 율법에 순종할 때만 하나님의 통치는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중요하였던 이유는 그 율법을 시행하므로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구체적인 그 모습이 나타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율법을 지킴으로 실현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열심당원 바리새인 중에는 자기들이 율법을 열심히 지키면  하나님의 통치의 기반이 닦여질 것으로 확신하는 자들이 있었다. 유대인들이 쉐마(공중에서 드리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셨다. 그러나 현시대에서 하나님의 통치는 제한되어 있고 감추어져 있다. 여기 현시대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아니고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에 그들의 기대 속에 있었던 그들이 처한 시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이방민족들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는 이방인의 통치는 공존할 수 없는 완전히 상치되는 개념으로 현실로 이해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때가 되면 이러한 구조가 사라지게 될 것을 내다보았다. 이스라엘은 해방되고 하나님의 통치는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라고 기대하였다. 그리고 온 세상은 하나님을 볼 것이고 그를 왕으로 인정하게 될 날이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유대인들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와 로마의 압제 하에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대한 기대였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왕권에 대해서 행사하심의 의미였다. 어떤 때에는 현재악의 와중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종말론적인 통치 개념이였다. 예수님이 오시기전에 유대교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였다. 이 시대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에게만 미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때가 되면 그 하나님은 모든 나라들에 의해서 인식될 것이다. 그리고 모든 나라가 그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유대교의 종말론적인 이원론

주의 날
구약의 여러 곳에 주의 날이라는 개념이 있다. 주의 날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런 표현을 많이 쓰는데 이 세상의 악과 죄악을 완전히 몰아내고 지상에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이룩하시기 위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방문하시는 날이다. 그 방문목적은 이 세상의 악과 죄악을 몰아내고 지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이룩하시기 위한 것이다. 요엘2:31, 2:12-17, 7:1-27. 이런 구절들을 살펴볼때 이 주의 날에는 심판과 구속의 두개의 측면이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방문하시는 목적은 먼저 이 세상에 악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악의 압제하에 있는 그의 백성들을 구출하기 위한 이중적인 목적이 있다. 그날이 바로 주의 날이다. 그들은 태어나서 한번도 자기나라의 왕의 통치를 받아본 적이 없는 굳이 받았다면 해롯 같이 로마의 앞잡이에게 착취와 압제를 받았다. 그래서 이날을 소망했다. 주의 날이 옴으로 이 세상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을 것에 대해서 그들은 기대를 하였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9:13-15, 이 세상과 새로운 세상사이에 연속적인 측면이 있을 것이다 라고 묘사하는 반면에 사65:17절에 보면 옛세상과 새로 도래할 세상사이에 완전한 단절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는 철저한 단절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가 성경의 다양성과 통일성을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데 이런 이야기를 성경상에서 이야기할 때 어떤 것이 맞는가? 그런데 어떤 것이 맞느냐 하는 그 질문을  하나님의 계시에 어떤 신비함을 무시하는 질문이 아닐까 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그 다양성속에 통일성이 있기에 그 다양성을 깊이 인지하면서도 그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시대적 구분에 어떤 성격을 보다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아모스서는 하나님의 나라, ”주의 날이 임했을 때 그 이후와 그 이전의 상태가 어느정도 연결성이 있는 성경에 대해 이야기한 반면에 이사야서는 거기에 철저한 단절의 성격이 있다. 그래서 옛시대와 세시대는 불연속성과 연속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이 옛세상과 새세상에 대해 구약은 이시대와 장차올 시대로 표현을 한다.

이 시대와 장차올 시대
한글 개역에서는 금세와 내세로 번역을 한다. 여기서 시대 세상이라고 하는 단어는 아이온이라고 하는 단어로서 세상자체보다는 시대적인 흐름 시대와 세상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적인 의미로 이해하겠다. 금세하면 이시대, 내세하면 장차올시대, 이 금세와 내세가 언제 사용되어졌는지는 잘알 수 없다. 이 용어가 온전한 형태를 가지고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주후1세기경의 작품인 에스라4, 바룩의 묵시서 이런 책들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용어가 기원이 어떠하던지 이시대와 내세의 사상은 현재의 세상과 미래의 구속받을 세상을 대조시키고 있는 구약의 시대 구분으로 거스려 올라가는 것을 볼수 있다. 따라서 이시대는 장차올 시대의 상반적인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것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멧세지와 전반에 대해 뼈대를 제공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셨을때 그는 히브리 유대적 사상의 배경가운데서 그의 멧세지를 전달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멧세지가 유대적 사상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것도 기억해야한다. 예수님은 그 배경을 이해하면서도 그배경의 한계와 그리고 그 배경의 오류들을 지적하시고 시정하시고 그것을 초월하시는 그하나님 나라 비밀들을 얼마든지 자유롭게 설명하시고 또 실행하실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먼저 깊이 인지를 해야 될것이다.

도표로본 유대교의 종말론적 이원론

          엘리야의 출현                                        여호와의 날
  시간------------------------------------------------------------------------->           
        현재의 악한시대(이시대)                           장차올 영광스러운 시대  
        사단의 통치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으로부터 소외()                           하나님과의 관계회복()
        사람들로부터 소외()                             새로운 사회()
        패역과 죽음                                          영생
        옛창조: 연약한 몸                                   새창조: 부활의 몸

이 연속되는 줄을 시간의 흐름이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한 단절의 시점이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이 날을 여호와의 날, 주의 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날 등 아주 다양한 모습으로 수식구들을 사용하며 이 날을 강조하고 있다. 이게 여호와의 날이다. 그런데 이 주의 날이 나타나기 전에 반드시 엘이야 선지자가 출현하게 되어있다. 엘리야 선지자가 먼저 와야 그 이후에 주의 날이 올 것이다 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 시대는 아주 악한 시대요,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백성의 통치를 받는 시대다. 사탄이 그이 세력을 발휘하는 사탄의 시대다. 사탄의 통치가 여호와의 날이 옴으로 종결되고 그때로부터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이야기를 한다. 이 사탄의 통치하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인간이 소외되어 있고 사람들로부터 서로간에도 믿지 못하는 서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그러한 소외 관게속에 들어가는 그래서 그 세상 가운데는 패역과 죽음이 성행하는 그러한 시대의 특징을 가진다. 그래서 이시대는 옛창조요 연약한 몸을 입는 자들이 살아남은 때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장차올 영광스러운 시대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의 통치권을 회복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관계가 회복되고 거기에 인간과 인간사이의 신뢰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서 새로운 사회가 이룩되게 되고 그리고 모든 하나님을 믿느 백성들에게 영생이 주어지게 된다. 더이상 패역과 죽음의 노예가 되지 않고 영생의 자리로 옮기게 된다. 새창조와 부활의 몸을 입는 세대로 유대인들은 기대했다. 이것은 신약의 가르침이 아니고 유대인들이 이런한 종말론적인 이원론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예수님이 오시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기전에 누가 먼저 온다고 하였는가?

말라기 4:5-6절에 “...선지 엘리야를 보내리니...” 그날이 이르기전에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겠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의 날을 그처럼 기다렸다고 했는데 그보다 앞서 선지 엘리야를 대단히 많이 기다렸다. 이 엘리야가 옴으로서만이 선지 엘리야가 올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엘리야가 오기를 무척 기다렸다. 그런데 이 엘리야가 어떤 모습으로 언제 올 것인지를 여러 사람들이 다양하게 추측하고 있을 때에 세례 요한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세례요한에 대해서 복음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복음서에서 엘리야와 같은 선지자의 모습으로 요한을 표현하고 있다. 누가복음 3:1-2절을 보라. 대개 구약에서 어떤 선지자을 소개할 때 호세아1:1절의 패턴을 따른다. 거기보면 누구의 시대에 누구의 아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다. 그러나 눅3:1절에는 누구누구의 시대에 분봉왕으로 있고 분봉왕으로 있는 그런 시대에 또 누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누구의 아들 누구에게 임하였다. 분명히 여기서 요한이 선지자적인 역활을 하고 있음을 암시적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이러한 요한의 멧세지를 들으려고 나타났던 반응들을 살펴보자. 먼저 요한의 모습이 막1:6절에 나타나는데, 예수님이 무엇을 먹고 입으셨는지 여러 정보가 있지만 단적으로 무엇을 입고 먹었는지에 대해서는 없다. 그런데 마가는 요한을 설명하는데 굳이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왜 그런 것일까? 구약의 배경을 보면 의미심장하다. 왕하1:8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더이다” 아하시야가 병이 들어서 그가 죽을 병인지 살병인지 점쟁이에게 자기 신하를 보내어서 점을 쳐오라고 했다. 그런데 그 신하들이 가다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죽을병에 걸렸다고 하니까 깜짝 놀라 신하들이 왕에게 와서 보고를 한다. 그러니 왕이 묻기를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더냐 했더냐 했더니 그 사람은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띠를 띠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만났습이다. 하니까 아 그는 디셉사람 보기도 싢은 엘리야 이구나 라는 사실을 금방 알았다. 이 엘리야의 특징이 털이 많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는 사람이였다.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어떤 모습으로 올지 익히 잘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모습의 엘리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털이 없는것 같다. 그래서 요한은 약대털옷을 입었다 왜요? 유대인들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성경적으로 들어내어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엘리야와 세례요한은 털이 많은 것과 허리띠를 띠었다. 요한이 얼마나 친절한 삶인가를 생각해 볼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람들을 사용하실때 얼마나 친절하게 사용하시는가? 그래도 모를 사람은 모른다.

이 요한이 나타나자 막1:5 예루살렘 사람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다른 지방에 갈 필요가 없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오도록 되어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와야지 예루살렘 사람이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광야로 나갑니까? 그러나 그들의 기대에 정말 부응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거기에는 자기들이 어떤 자존심이나 권위가 아무 소용이 없었다. 유대와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 그에게 나아가 세례를 받았다. 이스라엘 백성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선지자의 축복을 제하여 버렸다고 믿고 있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선지자와 같은 요한의 출현 그리고 엘리야의 모습으로 나타난 요한의 출현에 대해서 그들은 대단한 열광과 기대를 가지고 광야로 나가서 세레를 받았다. 더군다나 요한이 엘리야와 같은 외모를 가지고 광야에서 나타 났을때 엘리야 처럼 그리고 그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를 전파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사40:3절 말씀에 나타난 그 선지자의 역활에 대해서 요한의 멧세지가 설명되고 있는 것을 볼수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요한의 모습은 말라기 3:1절의 말씀 그 예언에 대한 성취로 이야기할 수 있다. 요한 자신도 스스로를 엘리야의 모습으로 연관지어서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한이 엘리야의 모습으로 나타난 모습에 대해서 눅1:15-17에서 요한이 잉태 되었을때 사가랴에게 말씀이 임했다. 그 말씀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요한은 모태로 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고 그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앞에 돌아오게 한다. 이것은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임했다. 이 요한은 나타나서 임박한 이 세상의 마지막 때로서의 선지자의 역활을 감당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임하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하는 말4:5-6절의 예언을 엘리야는 예수님앞서 그 자신의 사역을 시작하므로서 그는 종말론적인 선지자의 역활을 감당했던 것이다. 요한을 통한 주의 말씀은 요한이 기대했던 대로 성취되지는 않했을지도 모른다. 7:19절을 보라. 그러나 요한이 한 약속은 지극히 중요한 의미에 있어서 즉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고 하는 예언의 말은 이미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 성취되어가고 있음을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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