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8, 2011

하나님 나라-이승구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적 이해

하나님 나라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우리와 어떻게 관련되고, 우리의 세계관과 각 학문 분과의 학문적 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는가를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하나님 나라란 용어와 그 의미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α το Θεο)라는 용어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rule or reign)을 뜻하는 용어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그의 주재권을 뜻하고, 부차적으로 그 다스리심을 받는 존재들과 그 다스리심이 미치는 범위와 영역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개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고 나서도 이 말의 의미가 다 드러난 것은 아니다. 과연 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온 세상을 하나님이 다스리시니,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인가? 아니면 성경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했을 때는 어떤 다른 것을 뜻하는가? 이는 아주 심각하고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그 의미를 배우기를 원한다. 그런데 중요한 성경의 많은 용어들이 그러하듯이, 이 ‘하나님의 나라’란 용어도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그 의미가 성경의 한두 곳에서 정의되어 있는 용어가 아니다.

구약에서는 정확히 이런 용어가 사용된 일이 없고, 신약에서 187회 정도 이 용어와 이를 달리 표현하는 ‘하늘 나라’, 즉 ‘천국’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용어가 사용되었을 때 당대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그 누구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 본 일이 없다. 하나님 나라라는 이 용어는 그저 당시에 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그 의미를 알고 있는 양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다. 예수님께서 주로 이 용어를 많이 사용하셨고,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도 이 용어를 다 알고 있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는 (1)구약에서 이런 개념이 사용된 예를 살펴보고, (2) 이와 연관해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 용어를 사용한 의미를 검토하고, (3) 예수님과 사도들이 이 용어를 사용한 그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그 의미를 확정할 수 있을 것이다.

2.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용례와 그 의미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구약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거의 없다. 한번 예외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를 들 수 있다면 그것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여호와의 나라 위에 앉혀”라고 말할 때이다. (물론 우리말 시편에는 “주의 나라”라는 표현도 나온다( 145:11, 12, 13). 그러나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통치” 또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다스리심”, “여호와의 나라” 등의 말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보스가 잘 말하고 있듯이 “비록 아직 명확한 명칭은 없었지만 그 사상은 구약에서도 나타난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온 우주에 미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

구약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또 창세로부터 온 세상의 왕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시므로 온 세상이 다 그의 주관 하에 있다(시편 95:3-7 참조). 그러므로 그는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이다. 보스는 이를 “창조에서 시작되었고, 전 우주에 미치는 섭리로 확대되는 하나님의 통치”라고 부르며, “이는 특별히 구속적인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말하고 있는 다음 같은 구약의 구절들을 살펴 보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스스로 권위를 입으셨도다. 여호와께서 능력을 입으시며 띠셨으므로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 93: 1-2).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로 통치하시도다( 103:19).

이 구절들은 하나님께서는 그 계신 곳, 하늘(heaven)로부터 온 세상을 다스리신다고 한다. 이를 하나님께서 “하늘에 그 보좌를 베푸셨다”고 하든지 하나님께서 보좌에 앉아 계시다고( 1:26-27), 그리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 편에 서 있다”(왕상 22:19, cf. 1:6; 2:1)고 표현하는 것이다. 또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며 그 안목이 저희를 감찰하시도다”( 11:4)고 말하기도 한다. 이 표현은 실제로 하늘에 보좌가 있고, 하나님께서 그 곳에 앉아 계신다는 말이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표현하는 말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도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라고 말하며,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에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말했던 것이다( 6:1, 6).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통치하셨다는 것으로부터 하나님은 여러 곳에서 왕으로 지칭되신다. 다음 같은 구절들을 보라: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토록 왕이시니 열방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10:16).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영토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29:10).

지존하신 여호와는 엄위하시고 온 땅에 큰 임군이 되심이로다.......우리 왕을 찬양하라. 하나님은 온 땅에 왕이심이라.......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낮으셨도다( 47:2, 6-8).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오,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95:3).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시편 145:1).

열왕의 왕이시여......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원한 왕이시라( 10:7, 11).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가라사대 나의 삶으로 맹세하노니 그가 과연 산들 중의 다볼같이, 해변의 갈렐 같이 오리라( 46:18, cf. 48:15; 51:57).

(또한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라고 옮겨진 말 중 많은 것이 “여호와는 왕이시니”라고 옮겨질 수도 있는 표현임에 유의해야 한다 시편 93:1; 96:10; 97:1; 99:1). 또 때로는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이 왕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신다: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14). 이렇게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통치자들을 세우시는 일에서( 2:37; 4:17; 5:21 )와 현세적 심판과 주재권의 발휘에서( 48:15; 51:57; 22:28) 나타난다. 그리고 이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하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렇게 말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권능을 목도한 이방의 왕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15:18).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 45:6).

주의 성도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일러서 주의 능하신 일과 ‘주의 나라’의 위엄의 영광을 인생에게 알게 하리이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145:11-13).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 하노라. 크도다 그 이적이요, 능하도다 그 기사요,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4:2-3).

시온아! 여호와 네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시리로다( 146:10).

(2)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

그리고 위 인용문들 중의 마지막 구절이 시사하듯이 온 땅의 왕이신 하나님은 특별히 이스라엘의 왕이시다( 33:5; 삼상 12:12; cf. 8:23).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대상 17:14; 28:5; 대하 13:8. cf. 19:6). 그러므로 구약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이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여겨지는 것이다. 보스는 이를 “신정(theocracy)이라 불리는 특별한 구속적 나라”라고 부른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온 세상이 다 하나님의 통치의 대상이나 그 온 땅의 거민이 다 타락하고 패역하여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기꺼이 받지 않게 되었다. 이 때에는 하나님의 권능의 통치는 온 땅에 미치나 그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즐겁게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마치 사단과 악한 영들도 하나님의 다스리심 안에 있으나 그들을 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것을 전통적으로 “권능의 왕국”(regnum potentiae)라고 불러 왔다. 이 권능의 왕국에는 사단과 악한 영들, 또 이 세상에 불순종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세상이 포함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이라고 할 때에는 이런 권능의 왕국의 왕이시라는 뜻이 다분하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복종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그와 그의 후손들과 언약을 맺으셔서 그들을 자신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다. 이렇게 특별히 세우신 이스라엘이 특별한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구약적인 의미의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었다. 그들은 구약적인 “은혜의 왕국”(regnum gratiae)에 속한 백성들이다. 실질적으로 그들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일 수 있는 것도 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구속 사역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도 하나님의 은혜 언약 아래에 있는 백성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은혜의 왕국은 은혜 언약 하에 있는 백성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은혜 언약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듯이 은혜의 왕국의 왕도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장차 오실 구속자 안에 예기적으로 있는 구약적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었다. 그런데 보스는 “이 구속적 나라를 처음으로 명백히 언급한 것은 출애굽 때”에 나타나는 “제사장 나라”라는 표현이라고 한다( 19:6).[5]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법궤 위의 시은소에 새긴 그룹 위에 계신 분으로도 언급되신다(왕상 19:15; 6:1). 또 때로는 시온산이나 예루살렘으로부터 다스리신다고도 표현되는 것이다( 44:22; 99:1-2; 8:19). 따라서 이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 가운데서 왕으로 세우심을 입은 자도 자신이 진정한 왕이 아니고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하며, 하나님께 속한 주권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 대표적인 왕 다윗은 이런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었다:

우리 조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여호와여, 광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이김과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유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유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자를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0-12).

 그러나 이 이스라엘은 그들의 하나님 백성 됨에 충실하지 못했다. 그들도 그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처럼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해 버렸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여러 모양과 여러 수단으로 현세적인 심판을 내리셨으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잘 생각하지 않고 더 악한 데로 나아가 버렸다. 바빌론 포수의 상태는 이 땅에 있는 구약적 하나님 나라가 무너지고 상실된 상황임을 느끼도록 해주었다. 이 역사적 시기는, 보스가 표현한 바와 같이, “그 신성한 나라가 결코 모두 파기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새롭게 가져온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할 정도로 사라져 간 때”였다.

 (3) 하나님의 미래 통치

이런 상황 가운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런 일이 임했음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선언해 주셨다. 그러나 심판이 하나님의 마지막 말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왕,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 왕이 장차 온 세상을 공정히 심판하고 만민을 다스리시려고 임하실 것임도 선언하고 강조하는 것이다.

열방 중에서는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못할지라. 저가 만민을 공평히 판단하시리라 할지로다....... 저가 임하시되 땅을 판단하려 임하실 것임이라. 저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판단하시리로다( 96:10, 13).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2:44).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하나이실 것이요, 그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며......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열국 중의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 14:9, 16).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 또는 하나님 통치의 회복이 메시아 예언과 연관된다. 메시아는 이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위해 보내지는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 메시아 예언에 속하는 시편 22편의 한 곳에서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 나라의 사상이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열방의 모든 족속이 주의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이심이로다...... 후손이 그를 봉사할 것이요 대대에 주를 전할 것이며 와서 그 공의를 장차 날 백성에게 전함이여 주께서 이를 행하셨다 할 것이로다( 22:27, 28, 30, 31).

구약 선지서들에는 결국 이런 하나님의 나라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모든 나라가 다 하나님께 속할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차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 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오바댜 21)고 말하는 예언은 오바댜에만 한정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즉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것을 예언하고, 그것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사야도 이렇게 말한다: “그 때에 달이 무색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니라”( 14:23).

3.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용례

그러면 이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이 ‘하나님 나라’란 용어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사용했는지를 생각해 보자.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온 세상을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구약에서 잘 배워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는 이런 온 세상에 대한 보편적인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지는 않은 듯하다. 오히려 우리가 지난 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보았던 장차 임할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을 ‘하나님 나라’라고 칭하며 그것을 기다린 듯하다. 이는 신약에 나타나는 당대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사용한 용례를 살펴보면 잘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한 공회원인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하였다( 15:43, 44). 하나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 나라, 그 통치가 아직은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그 나라,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심지어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도 한번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하고 물었던 것이다( 17:20). 물론 이는 요셉을 비롯한 당대의 유대인들이 온 세상에 미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부인하였다는 말은 아니다. 그 권능의 왕국을 인정하되, 현재는 그런 것에 부합한 현실이 나타나 있지 않음을 보면서 그에 부합한 현실이 눈앞에 전개되기를 기대한 것이다. 구약에서 예언하신 대로 그 왕이 임하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온 세상을 그 의와 공평으로 다스려 주시기를 고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로써 장차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지칭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그 나라가 이 땅에로 임하여 올 것이라고 믿었고, 그 통치가 이 땅에 가득하게 되어 이 온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에 방불하게 되는 날이 어서 속히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다른 곳에 현존하고 있다가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하늘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현저하게 드러나서 온 땅에 가득하게 되기를 기다렸었고, 그것을 하나님의 통치요, 하나님의 나라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 나라의 임함이 과거 구약적 하나님 나라였던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에게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이니이까?” 라고 묻기도 했던 것이다( 1:6). 이는 그들이 기다려 오던 하나님 나라의 임함, 즉 이스라엘의 회복이 지금 이루어지느냐는 질문인 것이다. 여기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이 하나님 나라와 동일시되었다. 또 이와 비슷한 것은 “이스라엘의 위로”라는 말이나 ( 2:25), “예루살렘의 구속됨”이란 말이다( 2:38).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시므온도 결국 하나님 나라의 임함을 기다린 것이고, 안나의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들은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도 결국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 나라”와 동의어적인 말로 사용한 이런 말들을 볼 때에 그들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이 땅에 임하게 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해했음이 분명해 진다. 그들이 기다린 메시아 왕국이 그런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거나, 그 실현의 전조로 이해된 것이다. 유대인들의 전통적 두 세대 개념도 유대인들의 이런 하나님 나라 개념을 잘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 세대(this age) 또는 이 세상(this world)이 끝나면 ‘오는 세대’(the age to come) 또는 ‘오는 세상’(the world to come)이 오리라고 믿었다. 그들이 바라던 하나님 나라의 임함은 바로 이 오는 세상이 임하는 것이었다. 이런 ‘오는 세대’ 개념은 유대인들의 묵시 문학 가운데 자주 등장하는 용어였고, 이는 하나님 나라의 임함과 동일시 되었다.

물론 당대의 유대 사람들은 항상 구약에 근거한 바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구약에 근거해서 바른 생각도 했지만, 그것에 대한 기대가 여러 가지 것과 혼합되어 나타났다. 그리하여 유대인들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다윗 왕국의 회복에 대한 기대로부터 정치적이고 이 세상적인 메시아 왕국 개념으로 발전되기도 했다. 그것이 이 역사 가운데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그들은 대개 그것이 이루어지는 때가 세상 끝, 즉 종말이라고 이해했다. 거뜨리가 잘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유대인들에게는 “그 나라가 오는 세대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즉, 오는 세상에서 이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고 본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이 세상은 끝, 즉 종말에 이르고 하나님의 나라만이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4.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 (1)

바로 이런 배경 가운데서 세례 요한의 “회개하라”는 선포가 나타났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다양한 집단들은 그들 나름의 다른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가 다 그들에게 임하여 오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이 선포한 말을 꼭 그대로 사용하셔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신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 “회개하라”는 말 다음에 나오는 말은 요한과 예수님 모두에게 있어서 “하늘 나라, 즉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이었다. 예수님의 말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자. 마태 복음 4:17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때부터[요한이 잡힌 후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정확히 같은 것을 마가복음에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1:15)고 표현하고 있다. 정황이 모두 같고, 이것이 예수님의 첫 선포임을 생각하면, 이는 같은 것을 표현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가깝게 다가온 것’은 하나님 나라요, 천국이다. 그러므로 이 둘은 같은 실재에 대한 지칭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정확히 어떤 용어를 써서 표현하셨는지를 단언할 수는 없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셨는지, 아니면 “천국이 가까웠다”고 하셨는지 말이다. 유대인들의 표현 습관을 생각하면 아마 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면 왜 마태만 이 용어를 유지했겠는가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셨을 텐데 마태가 천국이란 변형을 만들지 않았겠느냐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말씀을 직접 듣지 못했으므로 예수님께서 어떤 용어를 사용해서 표현하셨는지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η βασιλεα το θεο)와 ‘하늘 나라, 즉 천국’(η βασιλεα τνο ρανν)이란 용어의 정확한 관계를 정리해야 할 것이다. 위의 인용문에 비추어 보면 이 두 용어는 동의어로 사용된 것임이 분명하다. 후크마가 말하고 있듯이, “하늘 나라라는 표현과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이 공관복음서에서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것이므로, 그 둘 사이의 의미의 차이가 없다고 안전하게 결론지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하늘 나라, 즉 천국이라고 했을까? 게르할더스 보스는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여 쓰여졌음을 생각하면서 슐러(Schurer) 등의 해석에 따라서 “하나님이란 이름을, 그것이 다양한 형태로 상당히 회피되던 것이므로 ‘하늘’로 바꾸어 사용하던 유대적 관습”과 관련해서 설명한다. , 여기서 “하늘”이라고 표현된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회피하려고 다른 말로 돌려 쓴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보스는 이와 비슷한 용례로 탕자의 비유에서 탕자가 하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5:18, 21)라는 말과, 예수께서 비판하던 자들에게 물으셨던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서냐?( 21:25)는 말을 들고 있다. 이에 해당하는 또 다른 예로 요한이 하는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3:27)는 말을 들 수 있다. 또한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이다”( 4:26)는 말의 난하주에 나타난 원문을 직역한 “하늘이 다스리는 줄을”이라는 표현도 이에 대한 용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의 “하늘”(οραν)은 “하나님”에 대한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이런 용례의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하나님 나라를 하늘 나라, 즉 천국이라고 부른 경우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우리는 신약 성경에서 천국이라는 말이 나올 때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를 하나님 나라라는 말로 이해해야만 한다. 이 용어에 대해서 하늘 나라라는 말의 어원을 가지고서 생각하는 것은 성경의 용례에 맞지도 않고, 이 말이 사용된 의미에도 반하는 일임에 유의해야만 한다. 이 말의 “하늘의” 라는 말은 이 문단에서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라는 말을 대신하여 사용된 말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하늘 나라 라는 말로써 전달하시려는 바를 오해하고자 하는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신약 성경에서 ‘하늘’(heaven)이란 말이 여러 가지 용도를 가지고 나타나고 있음을 잘 주의해 살펴보아야만 한다. 신약 성경을 면밀하게 살펴 본 학자들은 그 용례를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그 첫째는 ‘하늘’을 우주론적인 하늘로 지칭한 경우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하늘, 해와 달과 별들이 있는 그 곳을 하늘이라고 하였다.

둘째는 위에서 우리가 살펴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대신에 ‘하늘’이라고 돌려 표현한 경우이다.

그 셋째는 하나님이 계신 곳, 즉 하나님의 거주지를 지칭해 ‘하늘’이라고 한 예가 있다. 예를 들어서, 시편에서 “하늘”을 하나님의 “거하신 곳”의 병행법적 표현으로 쓰고 있는 시편 33:13-14를 보라: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곧 그 거하신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을 하감하시도다.” 또한 신약에 나타나고 있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란 표현이나( 6:9),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는 표현( 7;21; 10:32, 33; 12:50; 16:17; 18:10, 19), 또 “하늘에 게신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 5:16, 45; 6:1, 7;11; 18;14), 그리고 “천부”(heavenly Father)라는 표현( 5; 48; 6:14, 26, 32; 15:13; 18:35)에 나오는 “하늘”은 모두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지칭하는 표현에 해당하는 것이다. 성자께서도 그 “하늘”, 즉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부터 이 세상에 오셔서 성육신하셨고, 구속 사역을 마치신 후에 다시 그 ‘하늘’에 오르신 것이다. 예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신다: “하늘에서 내려 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3:13).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렇게 묻기도 했던 것이다: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저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 왔다 하느냐?( 6:42) 이처럼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 오셨고, 하늘에서 오셨음을 분명히 하셨다. 또한 그의 사역을 마치신 후에는 그가 계시던 곳, 하늘로 오르셨다. 그가 다시 오시기까지 마땅히 “하늘”이 그를 받아 두는 것이다. 그는 지금도 “하늘”에 계시고, 그 “하늘”로부터 심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로 임하여 오실 것이다.

이 하늘을 바울은 유대인들의 개념을 따라서 “낙원”(paradise)라고 부르기도 했다(고후 12: 2, 4).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그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한편 강도에게 “네가 오늘날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다( 23:43). 이는 그 강도의 영혼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이 분명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이 계신 곳, 즉 ‘하늘’에 계실 것이므로 ‘하늘’(heaven)을 ‘낙원’(paradise)과 동일시하신 것이다. 성경은 신자들이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면전에 있을 것임을 분명히 한다. 예를 들어서, 바울은 자신이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한다( 1:23). 이런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는 “개혁 교회들의 일반적 입장은 신자들의 영혼이 죽으면 곧바로 하늘 영광(the glories of heaven)에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성도들의 몸과 분리된 영혼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 곳, ‘하늘’ 즉 ‘낙원’에 있게 된다는 말이다. 그 곳에 있던 성도의 영혼은 부활 때에 몸과 다시 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올 것이고, 그리하여 심판 이후에 “새하늘과 새땅”으로 불려지는 극치의 하나님 나라, 영광의 왕국(regnum gloriae)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벌코프는 “신자들의 최종 상태는 현 세상이 지나가고 새로운 창조가 나타난 후에야 있게 된다”고 말한다. 그 새로운 창조인 새하늘과 새땅이 성도들의 최종적 거주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웠다”고 표현한 것은 결국 유대인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그 오는 세대의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고 하는 말이다. 유대인들은 그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 즉 은혜의 왕국과 영광의 왕국 이외의 것을 가르쳐서 천국이라고 말하거나 생각해 본 일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즉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실 때도 다른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과 신약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잘 요약하고 있는 다음 신학자들의 말을 잘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의 신적인 행위를 생각해야만 한다...... 요한과 예수께서 선포하신 천국은 무엇보다도 역동적 성격의 과정이다...... 왜냐 하면 천국의 임함은 종말 역사의 위대한 드라마의 처음 단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시며, 역사 가운데서 역사를 하나님께서 지향해 가시는 목표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행동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역사 가운데서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 목표는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마귀적 세력들로부터 구속하는 것이고, 종국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 위에서 진행되는 하나님의 통치 행위로 이는 결국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 극치에 이른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과 예수님께서 그 나라가 “가까왔다”(γγικεν)고 하신 말의 뜻은 무엇일까? 옛날에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 하나님 나라가 이제 많이 가까웠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가? 그 정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신 모든 점을 잘 고찰함으로 통해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절에서 고찰해 보기로 하자.

5.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천국 선포 (II)

 ‘하나님 나라’(βασιλεα το Θεο)에 대해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무엇보다 먼저 그 나라가 “가까왔다”(γγικεν, is at hand or has come near)고 하였다( 3:2; 4:17// 1:15). 이 “가까왔다”(γγικεν)는 말에 대해서 다드(C. H. Dodd) 같은 이는 (그 두 개의 헬라어 동사 배후에는 같은 아람어가 있다는 가정에서) 이 “가까왔다”(γγικεν)는 표현을 마태복음 12:28의 “너희에게 임하였다”는 말과 같은 뜻이라고 보면서, 이것이 그 나라가 “이미 임하여 왔음”(has come, has arrived and is here)을 표현하는 셈어적인 표현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는 좀 지나친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이 “천국이 가까웠다”고 할 때에는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 즉 심판과 통치의 실현의 임박성을 말하고 있음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를 도입시키실 것이고, 그의 종국적 통치를 수립하실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세례 요한은 아마도, 레온 모리스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예수님께서 곧 나타나실 것이고, 그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Kingdom)도 나타날 것임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미래성을 지시하고 있고, 또 예수님의 사역을 기다리고 있던 그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같은 말을 하고 계실 때 이에 대해서는 이는 아직 그 의미를 잘 모르겠는 모호한 표현으로 보든지 (그래서 좀더 명확한 후의 가르침에서 그 의미를 찾아보든지), 아니면 이전 선지자들이 선포하였고 유대인들이 기다려 오던 그 나라가 이제는 좀더 가까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미래적인 측면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단지 그 나라의 가까움이 얼마나 가까운 것인가 하는 것은 아직 드러나 있지 않다. 만일에 이 말씀을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의미로 볼 때에는 예수님의 다른 가르침으로부터 이에서 좀 더 나아간 가르침이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런데 마태복음 12:28에서는 예수님의 귀신 쫓아내시는 사역에 대한 논의 후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선언하시는 말씀이 나타나고 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1:20의 병행구절도 참조하라). 여기서는 아주 분명하고도 강하게 하나님 나라, 즉 하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여기 사용된 “앞서다(come before), 임하다(come upon)”는 뜻을 가진 “에쁘따센”(φθασεν)이란 동사의 용례를 생각할 때에 이 말씀은 전혀 모호하지 않게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였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 구절의 가르침에 의하면, 힐이 표현하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들에게 가까이 온 것 정도가 아니라, 온 것이다.” 세례 요한이 선포했던(heralded) 그 나라를 예수님께서 도입시키신 것이다(inaugurates). 그러나 이 말은 귀신을 쫓아내는 그 현장에만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은혜의 왕국이 임하여 온 것이라는 뜻이 아니고, 귀신을 쫓아내는 그 일이 이 은혜의 왕국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여 온 일에 대한 표라는 것이다. 그 일은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성령을 힘입어 하신 일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행하시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로 왔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그것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든지, 소경을 고쳐주는 것이든지, 아니면 앉은뱅이나 문둥이를 고쳐주는 것이든지 말이다. “예수의 인격, 특히 예수의 행위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권위가 사람들 가운데, 특히 예수의 대적자들에게(너희에게) 나타났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왔음을 확언할 수 있다.

마태복음 11:12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준비하던 “세례 요한의 때부터 천국은 침노한다”(βιζεται)고 하신다. 이 구절은 아주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이 복음서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들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따라서 많은 해석이 이에 대해 제출된 구절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말 개역에서는 “비아제타이”(βιζεται)란 이 말을 수동태로 생각해서 “침노당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 “침노당한다”는 말을 수동태와 부정적 의미(hostile action)로 보고 해석한 것이다. 이를 좀더 발전시켜서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사탄과 그의 세력에 의해서, 좀더 자연스럽게는 열심당원들이나 예수님께 저항하고 반대하는 유대인들에 의해서 천국이 “아주 강력하게 모독당한다”(violently assaulted), “폭력 당한다”(suffer violence)고 해석하는 일부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는 이 동사의 주된 용례와도 잘 맞지 않고, 문맥과도 잘 조화되지 않는 해석이라고 여겨진다(pace Blomberg, p. 188). 그러나 이렇게 해석한다고 해도 천국이 침노당하려면 여기에 현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전제되고 있음을 (e. g., Hill, p. 201) 유의해야 한다. , 보스가 잘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비유적인 말씀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이든 간에, 이는 분명히 세례 요한의 때부터 그 나라가 실재적임을 묘사하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오히려 이 “비아제타이”(βιζεται)라는 말은 중간태로 해석되어야 하며, 따라서 “강력하게 진전해 오는”(has been forcefully advancing) 이라고 옮긴 NIV에서와 같이 옮겨져야만 하는 말씀임을 분명히 한다. 왜냐하면 리델보스가 잘 지적하고 있듯이, 이는 데포넌트 동사 중간태에 대한 헬라어 용례에 일치하고, 12절 상반절은 핵심이 사람이 천국을 소유하는 방식보다는 천국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12절 하반절에 가서야 어떻게 사람이 그 구원에 참여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는 맥락을 가지고 있음에 어울리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의 준비에 이어 나타난 예수님의 사역으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로 파고 들어왔다(break into this world)고 확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에 따라 나오는 “침노하는 자는 빼았느니라”는 말씀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것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 이에 대한 하나의 좋은 해석은 지금 침노하여 들어오고 있는 그 나라와 같은 성격을 지닌 이들, 즉 이 맥락에서는 침노하는 성격을 가진 이들은(βιαστα) 그 나라에 참여하게 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해석은, 래드가 잘 표현하고 있듯이, 12절 앞부분과 함께 “천국은 능력 있게 활동하며 힘있는 반응을 요구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2) Carson은 이런 해석이 본 장의 가르침이 배제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 절의 앞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위에서 제시한 해석을 따르면서도, 뒷부분에 대해서는 “난폭한 자들이 그것을[천국을] 파괴하려고 시도한다”고 해석하려고 한다. , 이 구절이 하나님 나라의 진전과 함께 난폭한 자들의 천국에 대한 공격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칼슨의 이런 해석은 NIV가 “모든 사람이 그리로 향하느니라” (everyone is forcing his way into it)고 해석하고 있는 누가복음 16:16과의 병행성을 파괴하는 해석이 된다. 그러므로 전자의 해석이 본문의 문맥에 더 맞는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천국의 비밀을 은닉하면서 동시에 알려주고 있는 여러 천국 비유들( 13장 참조) 에서도 천국은 일단 주어진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좋은 씨가 이미 뿌려졌고( 13:24), 천국 말씀은 뿌려졌으며( 13:19), 후에 크게 성장할 겨자씨 한 알은 이미 심겨졌고( 13:31), 후에 전부를 부풀게 할 누룩은 이미 가루 서말 속에 넣어졌으며( 13:33), 밭에 감추인 보화나 극히 값진 진주와 같은 천국은 이미 와 있어서 찾아 질 수 있으며( 13:44, 45), 그물은 이미 바다에 쳐진 것이다( 13:47).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메시아 사역에서 이미 천국 잔치는 베풀어지고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22:2).

바로 이런 의미에서 갈릴리 회당에서 한 안식일에 이사야 61장을 읽으신 예수님께서는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야 한다( 4:21). , 이사야서가 말하고 있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가 지금 예수님의 메시아의 사역 속에서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죄에게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셨고, 눈먼 자를 보게 하셨으며, 죄와 사탄에게 눌린 자에게 자유를 주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에서 이 모든 예언이 성취되고 있다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 자신이 이 예언을 성취하려고 오신 메시아라는 자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롯에 의해서 옥에 갇힌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서 “오실 그 이[, 메시아]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하고 물었을 때에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던 것이다: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11:4-5). 이는 이사야 (29:18f.); 35: 4-6; 61장을 비롯한 옛선지자들이 메시아가 임하셔서 하시는 일을 기록한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추론하도록 하는 암묵리의 선포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 오신 자신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왔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말씀과 사역 가운데 현존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서 이 땅에로 임하여 온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예수님께서 언급하고 있는 이런 일들이 나타나는 데서 때때로 그 나라가 현존하고 있음을 드러내지만, 아직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기대하고 있는 바와 같은 우주적 대 파국을 동반하고 그 나라의 승리를 드러내며 오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염두에 두신 그 때까지는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지금 이 상황 가운데서는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할 수 없다( 17:20). 왜냐 하면 “그 [나라의] 처음 강림은 정치적 쿠테타나 어떤 가시적 운동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며, 따라서 지금 그 나라는 “너희 안에 있기”( ντ μ ν στιν) 때문이다. 여기 “너희 안에”( ντ μ ν)라는 말은 크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한 말이다. 하나는 그 나라가 현존하려면 사람들의 심령(spirit)과 관련하여 있다는 해석이다. 그 나라 자체가 오직 영적인 실재(a spiritual reality)로만 여기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해석의 대표적 주장자는 보스이다. 그는 “이는 그 나라가 현재적임과 영적인 것임을 나타낸다”고 한다. 물론 이 해석에는 난점이 있다. 지금 예수님과 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이 바리새인들이기 때문이다. 그 바리새인들 안에 지금 하나님 나라가 없는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은 원칙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으로 보면 이 해석이 가능할 수도 있다. , 지금 너희 안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없는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있으려면 너희의 심령과 관련해 있는 것이라는 원칙을 선언하는 것으로 보면 말이다. 이런 입장에서 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 안에’라는 말은 꼭 개인들 안에라는 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쓰인 대명사는 포괄적이다. 그렇게 되면, 그 의미는 ‘백성 안에’(among people)라는 말과 동의적인 것이 된다.” 그러나 마샬은 예수님께서 천국을 내면적이고 영적인 사태(inward, spiritual state of affairs)라고 가르치신 일이 없다고 단언한다. 이는 좀 의아스러운 해석이다. 위에서 언급한 보스의 해석과 잘 대조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너희 심령 안에”로 보는 해석이 가진 난점은 우리로 이 구절에 대한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너희 안에”를 복수로서의 “너희 안에”, 즉 “너희들 가운데”(among you)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는 너희들의 마음 가운데가 아니라, “너희들 가운데”(in the midst of you) 또는 "너희들의 손이 닿는 그 곳에"(in the reach of you)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 곳에 누가 있는가? 바로 메시아로 오셔서 메시아로 사역하고 계신 예수께서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현존하고 있어서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하신다. [왜냐하면] 그가 자신과 함께 그 나라를 가져 오셔서, 그가 그들 가운데서 살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이 구절도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이 있는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현존하고 있음을 말해 주는 중요한 구절이 된다. 그러나 또한 아직은 그 나라가 눈에 보이는 식으로 임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왜냐 하면 지금 그 나라는 아직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비록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영적인 실재로서의 하나님의 통치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미 우리에게 와 있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예수님에 의해서만 가르쳐진 것이 아니고 바울도 같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1:13). 이는 이 세상에 있는 이들이 일부는 흑암의 권세 아래에 있고, 일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있으며 그 중간 지대는 없다는 것과 구원함을 받은 이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옮기워진 하나님 나라의 백성임을 아주 확연하게 선언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때때로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구별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비록 그리스도의 나라는 세상 끝에는 아버지께 돌려진다(고전 15:28)고 해도 그 내용에 있어서는 그리스도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가 다른 것일 수 없다. 특히 이런 구별은 “주석적으로는 지지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래드의 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엘리스는 이런 입장에서 이 구절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의해서 개개인들에게 중재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들의 집합적 지위에서 온전히 새 시대의 영역 안에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러나 새 시대적 존재 영역은 파루시아, 즉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야 온전히 실현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라고 선언하는 바울의 말에도 이런 사상이 존재한다. 우리는 흔히 이 말을 개개인에게 적용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해석하여 이를 중생과 동일시하지만, 이는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말씀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첫째로, “피조물”이라는 것은 사실 일반적으로는 피조계 전체를 지칭하는 중성 명사이다. 그러므로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 피조계 전체가 원칙상(in principle) 새로운 피조계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말이다. 랄프 마틴이 큠멜을 인용하면서 말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하나님과의 우주적 관계에서의 새로운 장이 열렸고, 옛 피조계에서 시작된 아담의 타락의 대재난적 효과가 역전된 것이다.” 이처럼 “바울은 개인의 새로워짐이 아니라, 창조의 새로운 행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나타난 새로운 종말론적인 상황으로서의 피조계 전체의 새로워짐을 말한 후에야 그 상황을 개인과 연관시켜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는 이미 새피조계의 한 부분이 된 것이다. (, 그리스도 안에서 시작되었고 천지의 재창조에서 극치에 이른 인간 실존의 변혁의 한 부분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단지 옛 피조계의 한 부분으로서만 사는 것을 넘어선 것이다.” 바레트가 말하는 것과 같이, “그가 여전히 모든 외양은 변하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있고 그 자신도 그의 이전 죄된 실존의 많은 흔적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눈에 보이는 것에 근거하지 않고 신앙에 근거해서 그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구절(고후 5:17)에서 먼저 피조계 전체의 새로움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그 바로 뒤에 이어지고 있는 “옛 것”(옛 질서)과 “새 것”(새 질서)의 대조에서도 아주 분명히 드러나는 점이다. 물론 “아직 아니”의 측면도 있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 가시적으로 드러나 있지는 않다. 그것은 미래에 될 일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세상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바울은 선언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임하여 온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생각하면서 바울이 하는 말인 것이다.

6.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에서 다 와 버려서 이제는 더 이상 올 것이 없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사역에서, 또 자신의 메시아로서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로 임하였음을 강조하며 가르치신 예수님께서는 또한 그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아직 오지 않은 측면도 가르쳐 주시고 있다. “최선의 것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의 일로 염려하지 말 것을 권면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12:32). 그러므로 제자들로서는 “그의 나라를 구하는” 일만이 필요한 것이라고 하신다( 12:31). 이는 이 말씀을 하시는 시점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가 아직 오지 않았든지, 적어도 그 통치의 극치에 이르지는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 여기 나오는 “나라”는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인 것이다. 그 미래적 하나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 현재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후에 주실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는 이미 여기서도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항상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추구하고 추구해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 말씀이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주어진 말씀이기에 아직 오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아닐까고 생각하는 이들을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 말기에 주어진 한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달란트 비유에 따라 나오는 심판을 양과 염소를 나누는 것처럼 하시겠다는 말씀에서( 25:31-46) 예수님께서는 그 오른 편에 모아진 자들을 향해 하시는 심판자인 임금의 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신다: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25:34). 이들은 그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 때까지는 아직 그 나라를 받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적어도 그 나라의 충만한 현시가 심판 때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의 그 나라는 블롬베르그가 잘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것의 모든 미래의 충만 가운데 그려지고 있는 것”(here envisioned in all its future fullness)이다. 그러므로 이 나라는 “새 하늘과 새 땅”인 것이다. 래드가 잘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렇게 “종말론적 완성 때 하나님 나라는 의로운 자가 무상으로 유업 받을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그런 나라의 충만은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예비하신 것, 즉 영원부터 예비하신 것이 결국 성취되는” 것이며, “실로 이것이야말로 전 세상이 창조된 큰 목적이었다”고 말하는 리델보스의 말은 아주 옳고,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 충만한 나라는 유업으로 받는 것이므로 그들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더구나 그 나라가 창세로부터 예비되었다고 표현한 것은 이를 얻게 되는 것이 인간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준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의 극치(consummation)는 장래에 심판 때에 있게 될 것이다. 그 때에는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구약의 하나님 백성으로 자처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하신다( 8:11, 12// 13:28, 29). 이는 최후에 있게 될 오는 세상의 메시아적 잔치(cf. 25:6-9; 65:13-14), 즉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온 세상으로부터 온 많은 이들이 참여하고, 유대인들이 쫓겨나는 일이 있을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쫓겨남”이란 단어에 대한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 래드의 다음과 같은 말을 유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단어는 “역사와 언약에 의해서 나라의 본 자손이 된 유대인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일단 들어간 후에 그들이 다시 쫓겨날 것을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악한 자들을 ‘그 나라에서’ 거두어 낼 것이라는 언급은 그들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70]

예수님께서는 또한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13:43)라고도 말씀하신다.[71] 이런 말씀을 생각하면서 과거의 신학자들은 이 생명과 의와 영광과 기쁨으로 가득할 나라를 “영광의 왕국”(regnum gloriae)이라고 불러왔다. 이는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충만해 지는 것이며,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르는 것이다. 이런 의미의 극치의 나라는 아직 우리에게 임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 갈 것이 아니요”( 7:21)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이제까지 우리가 관찰한 바 “극치에 이른 하나님의 나라”, 즉 “영광의 왕국”을 뜻하는 것이다. , 모리스가 말하듯이, “천국이 충만하게 임할 때”를 지칭하는 말인 것이다. 이는 이 말씀이 심판을 염두에 두고서 하시는 말씀임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 진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7:22). 여기서 말하는 “그 날”은 분명히 예수께서 심판자로 임하시는 최후의 심판의 날을 뜻한다.[74] 그러므로 같은 맥락 가운데 있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도 같은 시점을 배경으로 하고서 생각해야 하는 말인 것이다. 최후의 심판에 들어가는 천국은 “극치에 이른 천국”, 즉 “영광의 왕국”(regnum gloriae)인 것이다.

이는 후에 베드로후서와 요한계시록에서 이사야의 예언을 반영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언급된 것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주의 날” 또는 “하나님의 날”, 즉 심판의 날이 올 것을 말하면서(벧후 3:10, 12),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고 쓰고 있다(벧후 3:13). 하나님의 날에 있을 심판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게 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요한계시록에서도 최후에 있을 소위 백보좌 심판( 20:11-15) 후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을 그려 주고 있다( 21:1-7, 9-22:5). 이는 모두 이사야 65:17-25 66:22-23에서 예언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성취를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이후에 나타날 “영광의 왕국”, 극치에 이른 하나님의 나라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런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의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임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는 지금도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한다. 이는 그 나라의 극치가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가능한 기도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의미에서 이 기도를 날마다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것이다. 이렇게 그 나라가 극치에 이르도록 기도하며 그 나라를 위해 애쓰는 이들을 주님께서는 바울과 같이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 것이다”(딤후 4:18). 이 때의 “천국”도 그 모든 맥락을 고려하면 극치에 이른 천국임을 알 수 있다. 윌버 왈리스도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 “이는 이 땅 위에서의 하나님의 미래 통치와 새 땅에서의 미래 통치의 모든 국면을 다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라고 한다. 물론 그는 천년 왕국과 영광의 왕국을 지칭하는 것이다. 여기에 천년왕국이 과연 포함되는가는 또 다른 논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왈리스는 이 “천국”이라는 말로써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측면을 지칭한 것이다. 랄프 얼도 말하기를 “아마도 여기서는 영원한 상태에서의 미래 왕국을 언급하는 것이다”고 한다. 디모데후서 4 1절이 심판과 그리스도의 나타남과 그의 나라를 연관시키며 말을 시작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에 4:18의 “그의 천국”도 역시 극치에 이른 천국임을 무리하지 않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극치에 이른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아니하였다. 그것은 아직 미래에 우리에게로 임하여 올 실재인 것이다. 그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여 오는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7. ‘하나님 나라’의 ‘이미’와 ‘아직 아니’ 속의 현존하는 그리스도인과 그의 삶

그러므로, 요약하자면,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가운데서 이미 이 땅에로 임하여 왔으며, 그러나 올 것이 다와 버린 것이 아니고 언젠가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를 때가 있는 것임을 확언할 수 있다. 이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유명해진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already, but not yet)의 구조, 또는 그 둘 사이의 긴장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 이런 하나님 나라의 임함의 구조 가운데 있는 것이 중생자의 삶이다.

그러므로 중생자는 먼저 자신이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사역 가운데서 임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의식을 가져야만 한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여 왔고 자신이 중생으로 말미암아 그 천국에 속해 있으면서도 마치 자신이 아직은 천국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래서 죽은 뒤에나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자신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세상에 임하여 온 천국에 지금 여기에서도 속해 있음을 의식하고 표현해 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천국과 관련하여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첫째로 회개하는 일이다. 천국 선포와 관련해서 처음 언급된 것은 언제나 “회개”임을 주의해서 보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운 나라이므로 의롭지 못한 이는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로운 하나님 나라에 속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존재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하지 않음을 인정하고 따라서 회개해야만 한다. , 자신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음을 인정하고서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 모두를 내어 맡기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 회개가 공로가 되어서 그가 의로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보스가 말하듯이, “회개가 필수적이라는 것을 공적적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회개는 근본적으로 과거와 관련되어 있고 죄에 대해 반응하는 소극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서 자신의 존재와 행위들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으며 바르지 않은 것임을 인정하고[회개의 지적인 요소], 그런 자신의 존재와 행위들에 대해서 진정으로 슬퍼하고[회개의 감정적 요소], 그런 자신의 존재와 행위들을 미워하고 그로부터 돌이키는 것이다[회개의 의지적 요소]. 이렇게 회개는 전인적인 것이고 전 포괄적인 것이다.

그리고 진정한 회개는 믿음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다. 참으로 회개 한 이는 이제 하나님을 바로 알며, 그의 말씀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그를 신뢰하여 하나님에게 자신을 전부 맡기는 것이다.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뢰하여 그에게 자신의 전폭을 맡기는 그는 그 하나님에 의존해 살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게 된다. 그는 그의 삶 전부를 하나님과 관련해서 사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으니, 그 나라는 힘있는 나라요, 하나님의 전능하신 힘으로 이루는 나라이기에 사람은 그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을 믿고 받을 뿐이다. 그 나라와 관련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을 믿고서 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다.

이런 천국 백성들인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이(willingly) 자신들의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아 나아간다. 여기에 하나님 나라의 실재가 있다. 거듭 강조하여 말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기 때문이다. 순간 순간의 모든 삶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살되,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뜻을 잘 받들어서 그 뜻을 이 땅위에 다 실현해 나가고자 애쓰는 노력을 힘써 해 나가야만 하는 것이다.

8. 신국적 세계관의 함의

바로 이런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인 중생자의 세계관은 신국적 세계관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의 세계관은 하나님의 통치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을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어야 하는 장으로 본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관계하여 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 그리스도인의 관점을 좀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본래 이 세상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을 때에도 모든 측면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다 드러나는 곳이어야 했다고 그는 바라본다. 창조된 세상은 마땅히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려져야 하고 그 뜻의 성취를 향해 나갔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피조계의 대표자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해서 자신들이 먼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이 세상을 통치하여 하나님의 통치하심의 실재를 드러냈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창조는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고 있다는 말로 표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창조된 세계는 그 자체의 모습으로 정태적인 상태에 있어서는 안되고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바 더 높은 상태(the higher state)를 향해서 나아갔어야 했던 것이다. 그 더 높은 상태가 바로 하나님 나라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쫓아 이 세상을 다스리지 못하고 타락해 버리므로 이 세상은 하나님의 통치가 와야 하는 상황 가운데 있게 된 것이다. 물론 타락한 세상도 하나님의 힘과 전능 아래 있으므로 타락한 세상 전체를 향해서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를 신학 상으로는 “권능의 왕국”(regnum potentiae)이라고 불러 왔다. 이런 의미의 통치에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포함된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이라도 이 통치 아래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통치(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혜의 왕국(regnum gratiae)을 이 세상에 도입시키신 것이고, 이 은혜의 왕국이 신약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로 임하였다고 했을 때는 이 “은혜의 왕국”이 임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능의 왕국[통치]의 대상인 이 세상 안에 그리스도 이후에는 은혜의 왕국[통치]이 함께 하는 것이다. 그 은혜의 왕국은 이 세상 안에서 진행하고 성장하다가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에서 급기야 “영광의 왕국”(regnum gloriae), 즉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화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인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은 영광의 왕국의 도래, 즉 은혜의 왕국의 극치에 이름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살아 나간다. 그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으로 특별히 돌아보시며 통치하신다. 하나님 백성에게 있는 이런 특별한 인도하심과 돌보심과 통치를 전통적으로는 “아주 특별한 섭리” (providentia specialissima) 라고 불러 왔다. 이는 “은혜의 왕국”(통치) 아래 있는 이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은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이 은혜의 왕국 백성들의 돌봄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그밖에 있는 것도 하나님께서 유지시키시고 발전시키시며 통치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 또는 보편적 왕권이다(regnum potentiae). 그러므로 이 권능의 왕국은 결국 은혜의 왕국, 즉 신약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 세상 전체를 이런 신국적 진행의 과정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신국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