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December 19, 2011

칼빈주의 예정론(4)

3. 제한적 속죄

지금 여기서 제한적 속죄라는 주제 아래 논의하려는 문제는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위해서 차별도 예외도 없이, 모든 개인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으로 바친 것인가, 혹은 그리스도의 죽음은 선택된 자에게만 특별한 관게를 갖는 것인지, 바꾸어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희생은 모든 인간의 근원을 가능케 하는 것인가, 혹은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자의 구원을 확실하게 하는 것인가 어느 쪽인가 이다. 이 교리가 선택의 교리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임을 곧 분간이 가능할 것이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가 이루어 놓으신 속죄의 가치 혹은 능력에 한도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이 점을 오해하고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의 고통을 제한하고 보다 많은 고통을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속죄의 가치는 전 인류를 구원하는데 충분하지만, 선택된 자만을 유효하게 구원하시는 것이다. 알미니안주의의 교리에 의하면, 속죄는 단지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협력해서 그들 자신을 구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데 불과하다 - 만일 그들이 원한다면 - 이란 것이 된다.

속죄는 그 본질상 범위가 있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단순히 구원을 가능케 한다는 정도의 것이라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속죄가 유효적으로 구원을 보증한다면 그것은 선택된 자만이 관계를 갖는다고 말해야만 될 것이다. 워필드 박사가 말한 것 같이 「우리들이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비싼 가치를 갖는 속죄인가, 넓은 범위의 속죄인가, 이 두 개는 양립되지 않는다」라고 그리스도의 사역은 이것을 보편화한다면 그 실질은 물을 탄 것이 되는 것이다.

칼빈주의는 이것을 양적으로는 제한하지만 질적으로는 불변이다. 칼빈주의자에게 있어서 속죄는 좁은 다리이긴 하나 이것은 완전하게 건널 수 있는 다리이다.  알미니안주의 자에게 있어서 그것은 강의 중간까지 밖에 갈 수가 없는 크고 넓은 다리이다. 사실 알미니안주의는 칼빈주의 보다도 훨씬 신랄한 제한을 그리스도의 사역에 가하고 있다.

만일 속죄의 은혜가 보편적이고 무제한일 것 같으면 하나님은 아담에게 요구한 것 같은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더욱 낮은 구원을 보여주셨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에 물을 타서 지극히 쉬운 길이 제공되도록 한다. 말하자면 지불능력이 없는 죄인에게 한 달에 15센트를 탕감해 주는 것 같은 안이한 은혜가 되는 것이다.

한편 칼빈주의자는 최초에 하나님이 아담에게 준 완전복종의 율법은 영원의 율법이며 그 율법의 요구는 너무나 엄격하고 혹은 그 형벌이 가혹하다는 인상을 제거해 주는 것 같은 일은 전연 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은혜, 순수한 은혜는 구원의 필요조건의 저하에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그 백성을 위한 몸값으로 하신 것이어서 그것은 비뚤어지지 않고 파기되지 않고, 바르게 존중 받음으로서, 그 탁월성이 나타나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몸을 대신하여 구원되는 자에게도 또 영원한 형벌에 복종을 당하는 자에게도 그 엄중한 율법은 강제되어 집행되는 것이다.

만일 알미니안주의의 교리가 참이라면 그리스도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지만 그러한 사람들은 나중에는 멸망되고 그리고 속죄된 자와 같이 보인 많은 자에게 구원은 적용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한 예를 든다면 이교도의 생활에 어떠한 은혜를 지적할 수가 있는가? 또는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죄로부터 무엇을 받았다는 것이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피조물에 의해서 몇번이나 방해를 받고 파괴되었다는 것이 된다. 그것은 또 하나님의 그 뜻은 천사들 사이에는 지키게 할 수 있지만 그 원하는 바를 지상에 있어서는 인간에게 행하게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속죄란 그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의는 단순히 사람들의 구원을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위해서 그리스도가 죽은 데 대해서 실제로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다.

속죄의 성질에 관한 알미니안주의의 견해에서는 만일 모든 인간이 그 권리를 사용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역한다면, 물론 수학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은 다만 하나의 죄인도 구할 수가 없게 되고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목숨에 의한 구속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갖추어 준 하늘의 후사를 아무도 받지 못하고 또 하나님 자신의 구원의 업은 완전히 실패에 돌아가는 것이 될 수도 있게된다.

그리스도는 그 백성을 위해서 “RANSOM"(구속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Ransom 이란 노예의 몸값의 돈이란 의미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20:28)

주의해야 할 것은 주 예수가 여기서는 많은 「사람을 위한 구속」이라 하고, 「모든 사람의 구속」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은 일이다. 구속의 성질은 이와 같은 것이다. , 구속이라 말하는 것은 그것이 지불되고, 받아들여질 때에 그가 지목한 사람을 자동적으로 자유케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참된 구속이 아니다. 율법은 구속된 자에게 어떠한 책무로부터도 자유하기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이 선택된 자만의 구속이 아니라, 모든 인간의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공적은 모든 인간에게 균등하게 전달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영원한 형벌은 누구에게도 정당하게 가해지지 못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보증을 서 주시는 자에게 한정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성하는 자에게 한정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구성하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속죄는 유효한 것이다.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0:15)라고 예수가 말했을 때에 예수 자신은 그 죽음의 목적을 제한하신 것이다. 그런고로 만일 그가 자신의 목숨을 양을 위해서 버리신 것이라면 그의 구속의 사역의 속죄적 성격은 결코 보편적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 10:26). 「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8:44)라 말한다. 예수께서 이와 같이 그들을 지적하고 제외한 것을 알면서, 도대체 누가 그리스도는 그들을 위해서 그 존귀한 목숨을 버리셨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요셉에게 나타난 천사는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 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1:20-21)라고 고하고 있다. 이것은 결코 모든 백성은 아니며 자기 자신의 백성이라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업은 절대로 헛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고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선택된 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구속되는 자, 성령에 의해서 깨끗함을 입은자, 선택, 구속, 거룩하게 되는 것은 동일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17:9)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이나 요한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며, 바로 왕이나 가롯 유다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양은 아니다. 우리들은 바로나 유다가 그리스도의 벗이며,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가르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인류는 두 종류로 분류된다. 그리고 그 한편에 있어서는 명확하게 긍정되지만, 한편에 있어서는 암암리에 부정된다. 그리스도가 그 백성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씀하실 때에는, 그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균등하게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무질서한 전체를 위해서 죽으신 것은 아니다. 그의 백성, 그의 신부, 그의 교회를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 농부는 자기의 밭을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아무도 그가 거기 나는 식물을 균등하게, 가라지도 밀도 돌본다고 생각할 자는 없을 것이다.

옛날의 이스라엘의 대 제사장과 우리들의 대 제사장인 그리스도와의 사이에는 주목할만한 비교가 있다. 말할 것도 없이 전자는 후자, 즉 그리스도의 모형이지만, 대 제사장은 속죄의 큰 날에 이스라엘의 12 지파의 죄를 위해서 희생을 바쳤다. 제사장은 그들을 위해서 다만 그들을 위해서만 화해를 시키셨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시고, 다만 그들을 위해서만 기도를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 백성에 대한 긍휼은 알미니안의 조건적 선택과 무제한적 속죄와의 교리에 있어서 보다도, 칼빈주의의 무조건적 선택과 제한적 속죄와의 교리에서 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문제의 결론에 있어서 칼빈주의 자는 일반 인류가 그리스도의 속죄에서 중대한 은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칼빈주의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아담의 죄 때문에, 전 인류에게 가해져야 할 형벌을 받지 않는 것, 또 그리스도의 속죄가 복음선전의 근저가 되며, 많은 도덕적 감화를 세상에 가져오고, 많은 악한 감화를 억제하는 것을 인정한다. 하나님은 태양을 악한 자에게도, 선한 자에게도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에게도, 불의한 자에게도 내려주신다. 많은 현세적 축복이 구원을 보증하는데는 부족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이와 같이 보증하는데는 부족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이와 같이 보증하는 것이다.

「특정적인 구원, 혹은 제한적 속죄를 주장하는 자는, 인류 일반 드디어는 멸망될 자조차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무엇인가 은혜 혹은, 이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들이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 죽음의 본래적인 특유한 결실로서의 축복,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의 특수성격에 있어서 축복을 전 인류에게 가져 왔다는 것, , 그리스도가 용서와 화해를 전 인류에게 가져왔다는 것이다. 많은 축복이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인류에게 넓게 흘러온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은혜는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주실려고 할 때에 예견되는 것이다」라고 컨닝함이 말한 그대로이다.

그런고로 어떤 의미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을 위해서 죽으셨다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알미니안의 모든 주장을 절대적으로 부정해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선택된 자에게 있어서, , 그들의 구원에 대해서 효과적이라는 특별관계를 갖는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자에게 생기는 효과는 이 큰 목적, 선택된 자의 구원의 부수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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